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11
11화. 국왕 알현 (1)
서기 1591년, 선조 24년 양력 2월 21일.
새해 초, 늦겨울의 쌀쌀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한기가 등을 타고 올라오자 허성은 몸을 부르르 떨며 옷깃을 여몄다. 갑판에 나와 서성이는 이들을 일별한 그는 짓궂은 표정으로 태건에게 말했다.
“여인을 깊이 연모할 때 나오는 얼굴 아니오? 같은 사내한테 저런 눈빛을 받다니 끔찍하군.”
태건은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뜨거운 눈빛에 당혹감을 느껴 이내 고개를 돌려야 했다.
“히유! 드디어 돌아왔구나.”
허성은 선수 쪽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부산진 포구가 아스라이 수평선에 붙어 있었다. 대마도와 부산이 가깝다 보니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곧 부산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반가움에 승객들이 우르르 갑판으로 몰려나온 것이다.
태건은 대마도를 출발할 때, 정사 황윤길의 양해를 얻어 서장관의 배에 올랐다. 허성과 긴밀히 나눌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었지. 주상 전하께 올릴 보고서에 태 판관 이름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아시오?”
“그렇습니까?”
허성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보다 한참 어린 태건을 더욱 존중하게 되었다.
사신들은 마침내 오사카 체류 다섯 달 만에 교토로 들어가 도요토미를 접견했다. 태건의 예언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 이후 정사와 부사, 허성은 태건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들을 정도로 신뢰하게 되었다.
도요토미를 접견한 이후의 일정도 순탄하지 못했다. 태건은 도요토미가 답서를 가지고 장난을 칠 테니까 잘 대처하라고 허성에게 사전에 조언해 줬는데, 그 또한 그의 말대로 흘러갔다.
국서의 내용은 참으로 경악할 만했다. 명을 공격할 테니 조선이 앞장서라는 것이다. 심지어 도요토미가 명으로 들어가는 날, 조선 국왕이 병력을 이끌고 마중 나오라는 내용도 있었다. 한마디로 조선을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는 물론,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의도가 듬뿍 담겨 있는 외교 문서였다.
정사 황윤길은 전쟁이 임박했으니 이를 한시라도 빨리 조정에 알려야 한다며, 즉시 일본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또다시 국서에서 예법에 맞지 않는 부분을 수정해야만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국 왜 조정과 수차례 힘겨루기 끝에 일부 관철했지만, 그만큼 세월을 허비해야 했다. 이런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 보니, 이들은 도합 열 달 만에 부산진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행단 사람들은 태건의 두뇌가 비상하다 못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까지 있다고 믿게 되었다. 여기에 도전해 오는 일본 무사들을 모두 깨끗이 물리친 전적까지 더해지자, 영웅처럼 받들었다. 심지어 모든 사안에 대해 정반대 입장을 취하던 정사와 부사마저도 태건에 대한 호감과 평가만큼은 일치할 정도였다.
“게다가 왜인도 수하로 거두고 말이오.”
사카타, 즉 전지로 이야기가 나오자 태건은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전지로는 이 배의 격군으로 위장해 있었다. 허성이 태건의 부탁을 들어줘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야 배려해 줘야지.”
허성은 씨익 웃더니 부산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말이오. 태 판관은 왜란이 언제쯤 일어날 거라 보시오?”
“글쎄요. 그걸 제가 어찌······.”
“허허! 참으로 모를 일이로고. 어찌 전쟁 이야기만 나오면 대답을 회피하시는지.”
태건은 왜란 발발 예측 자체가 정쟁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삼사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으면 철저히 대답을 회피했다.
그럼에도 태건은 일본 체류 마지막 날, 대마도에서 젊은 무관들을 불러 한참동안 얘기를 나눴다. 이들 모두가 그의 수하나 다름없다 보니, 꽤 긴밀한 얘기까지 주고받았다. 그는 먼저 왜란이 반드시 일어날 테니 대비하라고 했다. 또한 그런 얘기를 다른 이에게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국서에 명백히 드러난 침략 의도를 도요토미의 과대망상 정도로 치부하고, 그 반대의 주장을 하면 탄핵하고 벌을 줬기 때문이다.
“저··· 서장관님.”
태건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시오?”
“부산포에 도착하면··· 자칫 체포될 지도 모릅니다.”
“체포? 체포라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체포한단······.”
허성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기축옥사가 한창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속한 동인이 주로 피해자였고, 심지어 불교계 명사인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까지 국문을 받아야 했을 정도로 미쳐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너무나 많은 인재를 죽였기 때문에 당장 쓸 사람이 없어 임진왜란 초기에 그토록 형편없이 밀렸다고 평하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태건은 허성에게 무슨 혐의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체포되어 동래부 감옥에 갇힌 다음, 의금부로 압송된다는 기록만 기억할 뿐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풀려날 테니까요.”
“그, 그래요? 태 판관은 정말 미래를 내다볼 줄 아시오?”
“글쎄요. 뭐, 깊이 생각해 보면 결말이 보일 때가 있는 법이지요.”
태건은 또다시 답변을 피했다.
태건과 이하륜은 조선 시대에서 인재를 얻기 위해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태건이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게끔 유도하였다. 물론 태건의 추론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것이지만, 오해하는 이들에게 굳이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허성은 깊이 탄식했다. 그간 태건이 말한 대로 모두 이뤄졌기에 자신이 체포당한다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몇 시간 후, 선단은 부산포에 도착했다. 그리고 허성은 하선하자마자 체포되었다.
* * *
서울 도성 북촌에 자리한 태건의 집.
조부가 병마절제사를 지낸 집안이다 보니, 그의 가세는 문벌 고관대작만큼 부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양반가다운 면모를 유지할 정도는 됐다. 눈앞에 보이는 큰 저택과 서울 근교에 이천여 두락(마지기)의 농지도 보유했다.
아울러 다른 양반가처럼 꽤 많은 수의 노비 또한 거느리고 있는데 솔거노비, 즉 집안일을 하는 노비는 겸인(청지기 역할을 하는 자)을 포함 열두 명이고, 근교의 가문 소유 농토에 붙어있는 외거노비도 대략 이백여 명 정도 되었다. 하지만 외거 노비는 사실상 소작농에 가깝기 때문에 실제로 보유한 노비는 솔거노비 열두 명이었다.
이제 전지로로 변신한 사카타는 태건의 집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 그는 허성의 배를 타기 전부터 이미 조선인으로 감쪽같이 변모했다. 머리도 꽤 많이 자라 상투까지 틀었다. 아울러 꾸준히 조선어를 학습해 간단한 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거의 일 년 만에 돌아온 그를 남동생 태원과 여동생 태미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무탈하게 잘 다녀오셨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형님.”
“벌써 부북에서 돌아왔구나. 언제 왔지?”
“한 달 전입니다.”
남동생 태원은 올해 스물둘로, 그 역시 무관이었다. 무과에 급제하자마자 두만강 변경지대로 부방을 갔다가 막 돌아와 있었다. 부방이란 군역자들이 북부 변방이나 바닷가 수영에서 병영 생활을 하는 일을 말함인데, 보직을 받지 못한 무과 급제자들도 1년 간 부방을 다녀와야 한다. 그중 북쪽 변경으로 부방 가는 걸 ‘부북’이라 줄여 말하곤 했다.
태건에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태원도 나름 키가 크고 체구도 탄탄했다. 아울러 학문에 관심이 많고 글도 잘 쓰다 보니, 문관 같은 무관이란 평을 자주 듣곤 했다.
“오라버니 신수가 더 환해지셨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여동생 태미가 활짝 웃으며 반겨 주었다. 이제 열아홉, 꽃다운 나이였다. 하얀 피부로 인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빨간 입술, 갸름한 얼굴형, 외까풀에 길게 뻗은 눈꼬리 등 귀티가 흐르는 조선 미인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반의 여식답게 여인치고 키가 큰 편이고, 체형도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친척들은 결혼을 서둘러야 한다고 성화였다. 하지만 태미는 결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활달한 성격의 태미는 혼전의 자유로움을 되도록 오래 즐기고 싶어 했다. 아울러 무예에 관심이 많고 틈만 나면 병서를 탐독하기도 했다.
태건의 부모 모두 병으로 세상을 일찍 떠나는 바람에, 이들 남매 사이는 꽤나 좋은 편이었다.
태건은 마당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지로를 불러 소개시켜 주었다.
“이 사람의 본명은 사카타 코지로, 왜인 무사지. 왜도를 아주 잘 쓰더군. 그러니 아우도 틈틈이 이 사람한테 왜검술을 배우라고.”
“예에? 왜인이라고요?”
태원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태미는 왜인이란 점보다 왜검술의 달인이란 부분에 더 관심을 보였다.
“오호! 왜검술!”
“이제 전지로로 개명한 조선인이자 우리 식구가 되었으니 그렇게 알아.”
전지로는 두 동생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태건은 겸인 소동구에게 앞으로 전지로가 쓸 방을 하나 내주라 명했다.
“형님. 도대체 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따가 자세한 얘길 해 주지.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할까?”
“좋지요.”
“호호! 나도··· 응? 뭐야?”
뒤늦게 도착한 태건의 짐을, 하인들이 소동구의 지시에 따라 마당으로 들여놓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무슨 살림을 차려오셨어요? 무슨 짐이 이리 많담?”
태건은 미소를 짓더니 짐 보따리 몇 개를 대청마루에 올려놓고 풀기 시작했다. 짐이 풀려 가고 태건의 설명이 이어질 때마다 두 동생은 놀라거나 신기해했다.
마침 주안상이 나오자 오랜만에 해후한 세 남매는 즐겁게 술을 마셨다.
“오라버니 성격이 좀 변한 거 같지 않아? 전보다 말도 많아졌고.”
분위기에 취해 연거푸 술잔을 기울인 태미가 태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오랜만에 만나 그런가······.”
태건은 동생들의 반응을 보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혈육들이라, 태건의 인격이 바뀐 걸 부지불식간에 느낀 것이다.
“솔직히 두렵다.”
태건의 뜬금없는 말에 동생들이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예?”
“오, 오라버니가 두려움을?”
“나 개인이나, 우리 가문이나, 아국 조선이나··· 앞으로 겪을 일을 생각하면 그렇다.”
“형님, 도대체 무슨······.”
태건은 굳은 표정으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우리 집안의 운명이 걸린 문제니까.”
“예, 형님.”
“내년 봄에 왜군 수십만이 바다를 건너올 거다. 그것도 전국시대를 지나오며 전장에서 꽤 오랫동안 실전을 치른 병력들이. 무장도 당연히 충실하지. 저 철포란 신무기로 무장했고.”
태원도 무관이기에 병사들의 실전 경험 여부가 전투에서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장을 횡행하던 수십만의 병력이 충실하게 무장하고 침략해 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오라버닌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태건은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특히 도요토미의 국서 얘길 듣자 두 동생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휴!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 군정의 문란으로 병력은 문서에나 존재할 뿐, 막을 병력이 없단 말입니다. 있는 병력도 오합지졸이나 다름없고.”
“내 예상인데, 한양 도성은 순식간에 점령당할 거다. 전쟁 발발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형님 말이 맞을거야. 실태가 그러하니까.”
“어, 어떻게······.”
태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래서 이하륜과 같이 계획한 바가 있거든. 난 아우들이 내 계획에 따라 주었으면 좋겠어. 계획이 다소 파격적이니 놀라지 말고.”
“예. 형님. 얘기부터 들어보지요.”
태원과 태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태건의 계획을 들었다. 그리고 끝내 태건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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