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개선
경흥 읍성의 남문 앞 거리.
이제 경흥은 과거의 경흥이 아니었다. 거주민도 예전의 경흥 사람이 아니었다. 남문 앞엔 그 폭이 무려 30미터에 달하는, 광장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넓은 도로가 닦여 있었다. 이 길가에 수많은 상점과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공방이 세워졌고, 또 그 뒤로 주택이 줄지어 들어섰는데, 대부분 기와집이었다. 살림살이가 넉넉해지고 있어 초가는 계속 퇴출 일로에 있었다.
오늘 이 남문 앞 거리와 주변 골목이 곱게 차려입은 주민들로 가득 들어찼는데, 팔도 사투리가 다 들릴 정도로 주민 구성이 다양했다. 거기에 더해 주션어도 들렸고, 어설픈 조선어도 들렸다. 즉, 이 거리는 동해부 전역의 복사판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경흥을 놔두고 향후 수도 자리를 훈춘에 내준다는 발표가 나자, 주민들 사이에 불만에 찬 목소리도 불거져 나왔다. 그러나 계속해서 새로운 생산 시설과 관청이 들어서자 이런 목소리는 금세 사그라졌다.
주민 무리에 섞여 있는 허성도 사람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허허! 누가 나오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백성들이 알음알음으로 이렇게 많이 모이다니 놀랍구려.”
“다 관보 덕입니다. 관보에서 오늘 귀환한다고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허성의 측근 역할을 맡게 된 조찬정이 웃으며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앞으로 여정에 동행할 사람들이라며, 허균이 허성에게 붙여 준 이는 조찬정이란 젊은 선비와 온로가라는 번호 출신 중년인이었다.
“육진 사람치고 로툰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도독님이 로툰까지 정벌, 우리 동해부의 우환을 깨끗이 없애 주었지요. 그런 위대한 업적을 쌓은 태 대장군님과 우리 장졸들이 개선한다는데, 나와서 수고했단 말 한마디라도 보태 주는 게 백성 된 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온로가가 유창한 조선어로 설명을 덧붙였다.
온로가는 온성 출신으로, 기존의 김씨 성을 버리고 고을 이름을 따서 온씨로 개명한 이였다. 이런 방식의 개명은 번호들 사이에 생겨난 일종의 유행이었다. 그로 인해 온성 온씨와 종성 종씨, 회령 회씨, 부령 부씨, 경원 및 경흥 경씨 등 새로운 성씨가 대거 생겨났다.
“그렇군. 그게 도리지.”
지난 몇 달 동안 요양에 힘쓴 결과, 허성의 건강은 이제 많이 회복되어 곧 허균이 권한 일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와아! 도독님이다!”
“오오오! 드디어 오셨군.”
남동쪽에서 큰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태건과 장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번에 원정을 다녀온, 전역이 예정된 장졸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허허! 태 도독도 놀란 모양이오.”
“그렇네요. 하긴 이처럼 많은 백성이 나와 맞이해 준 건 처음이니까요.”
처음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를 발견하고 놀란 기색을 보이던 태건은 이제 쑥스럽게 웃으며 손을 들어 답례했다. 주민들은 말에 탄 태건을 우러러보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장하다! 우리 아들!”
주민들은 장수와 병사들에게도 환영 인사를 건넸다. 허성은 이제 멍한 눈빛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석을 촘촘히 깔아 하얗게 빛을 발하는 도로. 남쪽 주민과 달리 건강해 보이는 주민들. 표정 하나하나가 화창한 봄날을 연상케 할 정도로 밝은데다, 한껏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런 얼굴로 수장 태건과 장졸, 백성이 서로 소통하고 있다.
허성은 이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이곳 주민이어서 다행이다’, 혹은 ‘자랑스럽다’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새로운 기운이지. 일취월장하는 기상, 새 나라의 기틀이 세워지는, 생동하는 기운…….”
허성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태건의 진면목을 몰라봤군. 그냥 탁월한 인재가 아니라, 진정한 잠룡이었어.”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 * *
그날 밤, 태건의 숙소.
강철 체력을 자랑하는 태건도 오랜 원정으로 인해 몹시 지친 상태라, 아무런 공무를 보지 않고 숙소에 머물렀다. 그런 태건의 저녁 시간을 차지한 이는 오매불망 애타게 그를 기다렸던 홍은도, 친동생 태원과 태미도 아닌 허성이었다.
허성은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으려 변복을 한 채 태건의 숙소로 들어왔고, 미리 와 있던 허균이 그를 맞아주었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태건은 그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을 잡고 반겨주었다.
“반갑습니다, 서장관님. 그간 고생이 자심하셨다지요?”
“허허! 나야말로 정말 반갑소. 태 도독.”
태건은 허성을 예전처럼 서장관이라 칭했는데, 허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은 그간 밀린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눴다. 물론 허성이 앞으로 동해부에서 비공식적으로 수행하게 될 그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럼 별지사란 비밀 관직을 학부에 마련할 테니, 별지사로서 녹봉을 받으며 그 일을 수행하시지요.”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허성은 전혀 사양하지 않았다.
“그간 경흥에 머물며 많은 것을 느꼈소. 그래서 더욱 손이 근질거리오. 경흥이 이런데, 강외 풍경은 어떨지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예. 편하게 유람하듯 다니며 보고 느낀 바를 자세히 기록해 주세요. 그런 기록이 많이 쌓일수록 우리 동해부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성심성의껏 일해야 할 것 같군요.”
“오랑캐령… 아니, 금강령 너머 북쪽은 어떻습니까?”
말이 나온 김에 허균이 물었다. 금강령은 태건이 오랑캐령을 대신해 붙인 이름이다.
“험한 산지도 많지만, 그만큼 훈춘평과 같은 광활한 옥토가 줄지어 펼쳐져 있는 땅이네. 그곳에 자리한 평원 네 곳만 잘 개발해도 동해부와 함경도 전체가 먹고살 수 있을 정도지.”
태건이 말한 네 평원은 광명벌, 동해란벌, 서해란벌, 마을우벌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이주민을 보내 개간하게 해야지.”
“역시… 그럼 무산 쪽은 어떻습니까?”
이제 삼봉평은 무산진이 되고, 내하 즉 도르기 비라는 무산현으로 바뀔 예정이었다. 그래서 허균도 아예 무산이라 말한 것이다.
“첩첩산중이라 하나 백성들이 정착해 살 만한 땅이 두만강 강변과 그 지류를 따라 곳곳에 분포해 있지. 특히 감… 아니, 방울마까지 보급해 주면 충분히 먹고살 만한 곳이지.”
태건도 감자의 명칭이 방울마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귀환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백두산 주변과 혜산진까지 모두 정벌해, 그 남쪽 함경도 북방의 안전을 도모하기로 했네.”
“정말… 놀랍소. 조선이 못한 일을 동해부가 가볍게 해내다니. 그럼 영토도 많이 늘어났군요.”
허성도 몹시 감탄했다.
“그렇습니다. 서쪽과 서남쪽으로 크게 넓어졌지요.”
“그럼 삼수는요?”
허균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삼수군도 우리가 건사해야지. 그 북쪽의 여진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삼수군은 갑산 서북쪽에 붙은 함경도 끝에 자리한 고을이었다.
“그럼 평안도는…….”
허균은 의도를 갖고 물었다. 태건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태건은 씨익 웃더니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삼수 서쪽은 폐사군이잖아?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세력권과 겹치고. 그러니 나중에 생각해 보고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태건은 다시 관심을 허성에게 돌렸다.
“황진 장군은 어떻게 지내시지요?”
“큰 공을 세워 충청병사의 지위에 올랐다고 들었소.”
“혹시 진주성 얘긴…….”
“진주성? 그게 무슨 말이오?”
“아, 아닙니다.”
태건은 날짜를 헤아려 보고 이미 2차 진주성 전투가 일어났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아직 그는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한 상태였다.
“별지사님께 부탁할 게 있습니다.”
“허허! 말씀해 보시지요.”
“먼저 의견을 여쭙겠습니다. 유교 의례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의례라면…….”
“동해부는 유교를 조선처럼 국시로 삼지 않을 겁니다.”
태건이 조선을 예로 들어 설명했지만, 허성은 태건의 말속에서 새 나라를 개국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게 되었다.
“흠, 그래요?”
“그러나 유교를 개혁해 좋은 방향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오! 개혁이라고요? 그럼 무엇부터 버릴 생각이오? 이를테면…….”
“사대주의.”
“아…….”
태건의 말에 허균이 더 큰 반응을 보였다. 그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경흥에서 생활하며 이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사대주의라……. 신료 중 일부도 문제를 느끼고 있지만 후환이 두려워 말도 못 꺼내는 주제이긴 하지요. 필요악이라 하나, 폐단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그다음은?”
“허례입니다.”
“허례? 흠. 그 또한 문제라 할 수 있지요. 그다음은?”
“경직성입니다. 사농공상이니 뭐니 하는 서열이나 계급의식도 그렇고. 성현이 사람을 그렇게 차별하라 하던가요? 공자님도 가르침만 있을 뿐, 차별은 없다고 했지요?”
조선처럼 엄격한 신분제는 사실 그 사상적 근거가 미약했다.
“허허허! 내 진즉에 알아봤지. 태 도독이 조선통신사 시절에 쓴 글을 보고 도독의 성향을 말이오. 더구나 경흥에 와서 보니, 아주 신분제를 싹 갈아엎었더군요. 노비도 완전히 사라졌고.”
“사실 이런 문제 때문에 함경남도 지방을 단번에 동해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투표제를 도입했지요.”
“그 또한 잘 알고 있소.”
“그러고 보니 버릴 것투성이네요. 그럼 뭐가 좋은 겁니까?”
허균이 물었다.
“충효, 인의예지는 물론이고 민본주의, 천명사상까지. 그 근본정신이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지요. 측은지심과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 그런 마음이 없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랴? 어릴 때부터 백성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베풀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겠습니까?”
측은지심은 불쌍히 여겨 도움을 베푸는 인(仁)의 마음이고, 수오지심은 불의를 미워하는 의로운 마음이다. 어릴 때부터 인과 의, 이 두 정신만이라도 잘 교육하면 훨씬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태건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설파하곤 했다.
태건은 유교의 폐단에 대해서 특히 더 극심해지는 조선 후기 상황은 물론, 현시대에 불거진 문제 또한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그러나 유교 문화가 대한민국의 시민 의식 형성에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그 또한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무엇이오?”
“우리 동해부가 권장하는 현실적인 의례 기준을 정해 주십시오. 예를 들어 삼년상을 간소화하는 것부터 말입니다. 시묘살이… 이걸 돌아가신 부모님이 과연 좋아할까요? 사랑하는 자식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이나 고생하며 사는 거 말입니다.”
태건이 시묘살이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자, 허성은 그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사실 국가적 차원에서 이러한 허례허식은 큰 낭비이고, 개인 또한 자신이 도약할 기회를 잃는 일이었다.
“형님. 정말 정신이 중요하지, 의례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허균도 태건에 뜻에 동조했다.
“음, 그건 그렇지.”
“어떻게…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좋습니다. 해 보지요. 아우와 상의해가며 만들어 보겠습니다.”
“노파심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동해부 구성원 중에 이민족의 수도 꽤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두십시오. 그들 중엔 날짜를 헤아릴 줄 몰라, 자기 나이와 생일을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아시지요?”
“아, 그렇군요.”
허성은 이제 더욱 정확히 태건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