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솔하사 제지 공장
태건은 경원현 솔하사에 자리한 경원제지공사로 향했다.
솔하사는 경원의 북쪽 끝에 자리한 훈융사와 경흥진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제지 공장은 서쪽 계곡에 자리했다.
현재 동해부에서 화폐 발행과 함께 가장 시급한 사안으로 떠오른 종이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태건과 이하륜, 홍은 셋이 오랜만에 솔하사로 동행하게 되었다.
공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태건은 크게 감탄했다. 증기기관이 여러 기계를 돌리고 있고, 지장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공정을 살피고 있었다. 기계에 붙어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꽤 많이 진척시켰네?”
“틈틈이 애쓴 덕분이죠. 은이가 진짜 수고했고.”
“그러고 보니 은이가 하는 일이 참 많네.”
“에효!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첨부터 칼 들고 전장으로 나갈 걸 그랬어.”
“니가?”
이하륜이 놀리자, 홍은이 도끼눈을 뜨고 이하륜을 노려보았다.
“그래, 나 아직 가녀린 소녀다. 됐냐?”
홍은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다. 물론 조선의 기준으로 보면 이미 성인이나, 세 사람은 여전히 나이에 관한 의식이 21세기 기준에 머물러 있을 정도로 예민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홍은도 자신을 미성년자로 인식했다.
두 남녀가 말싸움을 즐기는 사이, 태건은 공장 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부수는 공정까지 용케 완성해 놓았군.”
종이의 원료는 펄프이다. 이 펄프를 만들려면 나무의 껍질을 벗긴 다음, 잘게 자르고 부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공정을 통해 생산된 작은 조각을 ‘칩’이라 하는데, 여기까지만 해도 공정이 많이 진전된 상태였다.
“얼마 전에 겨우 완성했지.”
기계 전문가인 이하륜은 증기기관 동력을 이용한 분쇄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 이 제지 공장에 들여놓았다.
“너도 참 대단하다.”
“다음 공정도 있는데?”
“뭐? 어디?”
태건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하륜은 태건을 다음 시설로 데려갔다. 그곳은 소위 ‘쇄목펄프’ 공정을 진행하는 곳이었다. 쇄목펄프란 물과 함께 칩을 갈아서 섬유소를 뽑아내는 공정이다.
“여긴 아직 시험 가동만 하고 있어. 칩이야 많이 만들어 놓을수록 좋은 거니까 계속 생산 중이고.”
“그렇군.”
쇄목펄프 공정을 통하면 화학적 처리 없이 종이를 만들 수 있어, 신문지와 같은 저급 용지를 생산하는 데 적합했다. 목재가 함유한 성분 중 종이에 필요한 건 소위 셀룰로스란 것인데, 다른 성분도 같이 섞여 있어 신문지처럼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단 쇄목펄프 공정부터 완성해 볼까?”
태건은 칩을 물과 함께 갈아 펄프를 뽑아내는 공정과 함께 종이를 뜨고 압착하는 공정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이하륜은 그 공정에 필요한 기계가 뭔지 빠르게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형 롤러도 필요하고?”
“그렇지.”
“근데 오빠, 화학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해?”
홍은이 물었다.
“일단 수산화나트륨, 즉 가성소다가 필요하지. 그 이외에 황화나트륨도 쓰이는데, 일단 수산화나트륨을 제조해 펄프를 만드는 공정부터 연구해 보자고.”
수산화나트륨을 양잿물이라고도 하는데, 세척 기능이 있어 비누의 원료로 쓰이기도 한다. 물론 홍은이 만든 비누는 그냥 잿물을 사용한 것이었다.
“아, 수산화나트륨이 들어가는구나.”
“몰랐어?”
“관심 없으면 어떻게 알겠어요? 가만, 가성소다를 만들려면 전기분해를 해야 하나?”
“그게 가장 빠르지.”
소금물을 전기분해 하면 음극과 양극에서 각기 수소와 염소가 발생하고, 전극 주변에 수산화나트륨이 생성된다.
“쳇! 그럼 또 발전기를 만들어야 하는 거네?”
듣고 있던 이하륜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증기로 발전기를 돌릴 테니까, 화력발전소랑 똑같다고 봐야지. 규모만 키운다면.”
“그러게. 일단 작게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 그래야 나중에 전기도 활용하지.”
“그래서 그다음은?”
홍은이 물었다.
“칩에 물과 수산화나트륨을 넣고 170도 고온으로 찌면 죽처럼 변하거든. 여기서 펄프를 뽑아내는 거지. 수산화나트륨이 다른 성분을 제거해 주니까 한결 질이 좋은 종이가 나올 거다.”
“그렇구나.”
“그럼 전기 분해할 때 나오는 염소와 수소는 어떻게 해?”
“그걸 활용하는 건 나중에 생각하자. 수산화나트륨이야 용도가 많으니, 일단 많이 생산해 두고.”
“어, 알았어.”
“잘하면 종이가 생각보다 빨리 나오겠는데?”
태건이 기대감이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동생들이 일을 많이 진척시킨 덕이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할 수 있는 게 참 많아지지. 교과서를 마구 찍어 낼 수 있으니 집체 교육이 탄력을 받을 테지. 신문과 잡지도 왕창 발행할 수 있고. 행정도 더 편리해질 거고.”
이하륜이 한탄하듯 대답했다. 그간 내정을 맡아 오며 종이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 * *
전라도 남원성.
충청병사 황진은 이곳에서 벌써 명군 및 홍계남 의군과 함께 여러 번 왜군을 물리쳐,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조명연합군은 오늘도 승리했고, 왜군은 또다시 물러나야 했다. 후퇴하는 왜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황진이 의병장 홍계남에게 물었다.
“저들이 과연 전라도로 들어올 의도나 있는지 모르겠네요. 너무 건성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내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영감.”
“그럼 정말 진주성을 얻으려 한 건, 전략적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왜국 관백에게 잘 보이려 한 건가?”
“일리 있는 말입니다. 저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군대요. 병력도 절반가량 상실했고요. 그러니 남해안에서 버티며 화의 협상에 주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흠. 역시…….”
황진은 다시 한번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 그렇게 평가하는 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이 보낸 선전관이 와서 황진에게 어명을 전한 것이다.
진주성을 포기하자고 제안한 황진의 일은 이미 장계를 통해 조정에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조정은 당연히 진주성 함락의 책임을 황진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주성을 포기하는 게 옳았다는 권율의 장계도 같이 들어갔으나, 희생양이 필요한 조정 입장에서 황진을 놓아줄 리 만무했다.
결국 황진은 파면되었고, 여죄를 추궁한다는 명목으로 부하들과 함께 조정으로 압송되었다.
황진은 조정에서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백성과 병사를 합해, 수만의 인명을 구하려 진주성을 나오게 했다는 그의 변론은 통하지 않았다. 적과 내통한 건 아니냐며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조선통신사 일원이었음을 들어, 태건의 어떤 관계가 있는지 추궁당해야 했다.
끝내 황진에게 참수형이 선고될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자 몇몇 중신이 용기를 내어 변론하기 시작했다. 그간 황진이 세운 공이 너무나 크다는 점을 내세웠다. 특히 한양을 되찾는 데에 그의 역할이 컸다는 논리도 변론에 동원되었다.
이항복도 나섰다.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운 장수들을 이처럼 한 번 그릇된 판단을 했다고 목을 벤다면, 앞으로 누가 나서서 왜적과 싸우겠나? 더구나 왜란 이후 단 한 번도 태건과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는 데다, 그간 왜적과 싸우는데 진력했으므로 태건을 지지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니 파직하는 정도로 처벌함이 맞다’고 주장했다.
결국 국왕도 이항복의 주장을 받아들여 파직하고 그간의 모든 공을 무효화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황진뿐만이 아니라 그의 측근들도 파직당하는 벌을 받았다.
행궁이 있는 평안도 강서현을 나선 황진과 그의 측근들은 지친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개성부에 도착했다. 일행은 개성에서 잠시 휴식하며 몸을 추슬렀다. 황진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결국 참고만 있던 부장들이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황진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강승덕이 먼저 울분을 토해 냈다.
“도대체 영감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더구나 왜군이 스스로 진주성에서 물러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상대로 되었는데, 어찌하여 영감과 우리를 이렇게 대한단 말입니까?”
이들이 국문을 받는 동안, 왜군은 진주성을 비우고 동남쪽으로 흩어져 갔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말대로 진행된 것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우리가 살았는지도 모르겠네.”
“그랬을 겁니다.”
또 다른 측근, 소형이 대답했다. 황진은 한숨을 내쉬더니 부장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정말 미안하네. 나로 인해 다들 큰 고초를 겪었군.”
“아닙니다, 장군. 영감께서 진주성에 남길 고집했다면 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됐을 겁니다. 무슨 수로 진주성에서 10만 대군을 상대한단 말입니까?”
양사원이 손사래를 치며 반응했다. 황진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면, 실제 역사대로 황진과 그의 부장들은 모두 진주성에서 전사했거나 자결했을 것이다.
“영감. 이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휴! 남원으로 낙향해야 하지 않겠나?”
“장군. 너무 억울합니다. 한창인 나이에 벌써 초야에 묻혀 살아야 한다니.”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김충언도 억울함을 토로했다. 무장으로서 경력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황진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들을 바라보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자네들에게 해 줄 말이 있네. 문초당하는 과정에서 듣게 된, 태건이란 인물에 관한 얘기지.”
“으, 태건…….”
강승덕이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고문당한 이유 중 삼 할은 태건 때문이었다. 강승덕은 일면식도 없는 자와 만났다고 실토하라며 고문을 당해야 했다.
“어쩌면 그가 자네들의 목숨을 구해 준 셈이니, 너무 미워하지 말라.”
황진은 그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태건과 얽힌 이야기를 이들에게 풀어 놓았다. 부장들은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눈 대화 대목에서 깜짝 놀랐다.
“그, 그럼 진주성의 일은 태건의 조언을 따른 겁니까?”
강승덕이 말까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렇네. 백성을 위하라는 말. 그게 생각나서 생각을 바꿨지.”
“놀라운 인물입니다. 왜에 있을 때도 앞날의 일을 척척 예측하더니, 진주성의 일까지 내다보고 그런 조언을 남기다니.”
“그럼 왜 그의 얘길 우리한테…….”
“남원으로 돌아가 가족을 데리고 북도로 가게. 가서 뜻을 펴 보게나.”
부장들 대부분은 황진과 같은 남원 출신이라 남원에 다녀오라 말했다. 황진의 권유에 부장들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영감은 어찌하실 심산입니까?”
소형이 물었다.
“불사이군.”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영감!”
“난 그저 조용히 사라지고 싶네.”
“장군, 같이 갑시다. 가면 태 장군이 장군을 반겨 주고 큰일을 맡길 겁니다. 그러니 부디 같이 가시지요.”
소형이 간절한 표정으로 동행하길 요청했다. 황진은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계절은 한여름이었다. 뭉게구름이 빠르게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후후! 지난 경인년 이후 벌써 4년째……. 그간의 삶이 꼭 저 구름 같구나.”
황진은 태건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기의 삶이 얼마나 변화무쌍하게 흘러왔는지 반추해 보았다.
“물론 출사할 생각은 없다만, 한번 만나 보고 싶긴 하군.”
“하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장군.”
강승덕이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황진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만 보낼 수 없어서 하는 말이네. 자네들만 보내는 거야말로 무책임한 행동이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러면 갔다가 다시 돌아오실 겁니까?”
“아니, 북도의 초야에 묻혀 살 생각이네. 그게 나나 내 친지들, 조선 땅에 남은 이들을 위한 좋은 선택일 것 같군.”
황진도 사실 허성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사라진 사람이 되길 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