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폐사군 (2)
조산만 포구에 내린 황진과 강승덕은 말을 타고 경흥 읍성으로 이동했다.
읍성 남문 앞에 이른 황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바로 마중 나와 있는 태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옆에는 태건만큼 친했던 이하륜의 모습도 보였고, 또 몇몇 조선통신사 동료들이 눈에 띄었다. 황진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부 관리 중, 사행단의 일원이었던 이들이 모두 마중 나온 것이다.
태건이 다가오자, 황진은 황급히 말에서 내렸다. 태건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드디어 황 장군님을 뵙네요. 그간 어찌 지내시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황진은 태건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덕분에 살아서 이렇게 만나게 되오. 허허! 태 도독 소식은 그간 잘 챙겨 들었지. 아주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하셨더군.”
“저 또한 황 장군님의 활약상을 여기서 잘 듣고 있었습니다. 자 일단 들어가시지요.”
“오라버니, 저도 들어갈게요.”
“그래.”
황진을 안내해 온 태미도 복귀하지 않고 성으로 들어갔다.
황진이 자리를 잡자, 곧바로 푸짐한 주안상이 나왔다. 무인 간의 대화 자리에 술만큼 좋은 게 없었다.
“허허허! 왜국에서 술자리를 꽤 많이 갖지 않았소?”
“그랬지요. 남는 게 시간이다 보니……. 정말 그때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새 세상이 많이 바뀌었군요.”
“참 많이 바뀌었지. 그런데, 동생분이 아주 유능해 보이더이다. 수군 장수로 말이오.”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아직 혼인하지 않았던데.”
자신의 혼인 이야기가 나오자 태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알아서 좋은 사람 찾아서 가겠지요.”
“태 장군도?”
“전 워낙 바빠서.”
“허허! 이게 말이 되나? 곧 나라의 주인이 될 분이 아직 미혼이라니.”
“그게, 그러니까…….”
결혼 이야기에 태건이 몹시 당황했다. 함께 자리한 홍은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규수입니다. 두뇌가 몹시 총명해, 우리 동해부에 큰 도움이 되고 있지요.”
태건은 얼떨결에 홍은을 황진에게 소개했다.
“너무 뵙고 싶었습니다. 잘 오셨어요.”
홍은이 깜찍한 표정으로 인사하자, 황진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허허! 내가 괜한 질문을 했구먼.”
“어머! 센스… 아니, 감이 좋으시다~”
황진에게 오늘 추종자가 하나 더 늘어났다.
그렇게 사람 소개가 끝나자,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진은 그간 보인 태건의 행보에 대해 가타부타 평하지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 또한 조선 조정으로부터 내침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황에 관한 얘기가 빠질 수는 없었다.
“명은 어떻게든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고 있소. 조선 조정은 당연히 반대하고 있고. 또 명과 왜의 협상에서 배제되고 있지. 그래서 다들 크게 개탄하고 있다오.”
“참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이하륜도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전라 좌수사 영감의 활약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전히 전라좌수사 직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한두 달 뒤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허허!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조선은 진즉에 패망했겠지.”
“황 장군님도 큰 공을 세웠다 들었습니다. 이치 전투에서 호남을 지켜 냈고요.”
“권 장군의 힘이 컸지요.”
황진은 겸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앞으로 전쟁이 어떻게 진행될 것 같소?”
황진은 태건의 생각이 궁금했다. 항상 태건의 예측이 맞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몇 년간 지지부진하게 흘러갈 겁니다. 경상도 남부에서 대치한 채로. 협상도 잘 진행되지 않을 테고요.”
“음, 결국 왜적의 군세가 건재하니 그렇겠군.”
“맞습니다. 그때 왜국에서 같이 봤지 않았습니까? 풍신수길의 됨됨이에 대해.”
“그랬지.”
“그자가 대군을 조선에 밀어 넣은 이유가 아직 해소되지도 않았지요. 얻은 것도 없고, 아직 덜 잃었고.”
“음. 그런 시각으로 보니, 현 정세가 이해되는군.”
“어휴! 백성만 고생이네요.”
이하륜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투는 소강상태라 하나,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까지, 백성들은 앞으로 여러 해를 더 고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태 도독 덕분에 그래도 많은 백성이 혜택을 입어 다행이오. 내 오면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굶주린 이주민들은 정말로 태 도독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소. 여민단 사람들이 음식을 나눠 주며, 곡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꼬박꼬박 알려 주고 있더이다.”
“함경남도 백성들이 낸 조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해부가 그 많은 식량을 다 감당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그게 어디요? 정말 덕원의 구휼소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곳이었소.”
“듣고 보니 정말 다행입니다.”
“황 병사님. 이제 이곳에 사시면서 우릴 도와주시지요. 여긴 무장이나 관리들 대부분이 젊어, 연륜이 있는 분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이하륜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러자 황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난 그럴 처지가 못 되오.”
“왜, 그런…….”
“이유는 묻지 마시오.”
이하륜이 다시 물으려 하자 태건이 슬쩍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서장관님과 같은 이유일 거네.”
“오! 허성 서장관도 오셨나?”
“그렇습니다. 그분 역시 여기 정착해 사시지만, 관직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티 나지 않는 일을 맡겼지요.”
“허허! 잘하셨소. 허성 좌랑이 이곳에서 태 장군을 돕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조정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오. 아, 이런. 내 얘기만 하느라 잊고 있었군. 인사드리게.”
황진은 뒤쪽에 앉아 있는 강승덕을 태건에게 인사시켰다. 물론 그는 강승덕의 존재를 잊고 있지 않았다. 다만 소개할 적절한 시점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장 강승덕이올시다.”
“내 오른팔 노릇을 하던 무장이외다.”
“반갑습니다. 그럼 다른 분도 오시겠군요.”
“헉! 그걸 어찌…….”
강승덕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 장군님은 측근들에게 길을 열어 주고자 오셨군요.”
“허허! 과연 태 도독답소. 어떻소?”
“무조건 환영입니다. 여긴 인재가 항상 부족한 곳이니까요. 더구나 황 병사님이 추천한 분이라면 당연히 믿고 중용해야지요.”
“참으로 고맙소.”
“더 데려올 분이 있다면 사람을 보내시지요.”
“음. 알겠소. 그럼 생각해 보리다.”
황진은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술을 마셨다. 그러다 보니, 조선통신사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 * *
신첨은 태건의 허락이 떨어지자, 구갈파지보에 일개 중대 병력만 남겨 둔 채 천여 명에 달하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따라 전진하며 폐사군 영역으로 진입했다.
폐사군은 공식적으로 평안도 소속이다. 자성, 우예, 여연, 무창 등 네 곳으로 이중 신첨의 최종 목적지는 무창이었다.
신첨 군은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다. 무력시위를 충실히 하라는 태건의 지시를 따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약 40리를 나아가자 중간 기착지인 후주에 도착했다.
조선이 관리를 포기한 이후, 폐사군은 여진족 거주지로 이미 변모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신첨 군은 이동 중에 여러 여진족 마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마다 주민들은 대부분 압록강을 건너서, 혹은 산속으로 도주하곤 했다.
하지만 후주라는 곳은 달랐다. 그간 봤던 곳과 달리 제법 큰 마을이 자리했는데, 신첨 군이 접근하자 아예 촌장이 나서서 항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첨은 후주에 다시 중대 하나를 주둔시킨 다음, 다시 길을 나섰다.
서북쪽으로 계속 전진하다, 라신천이란 압록강 지류를 건너자마자 신첨은 병사들에게 휴식을 부여하고, 무창으로 떠난 정찰병이 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정찰대 소대장이 돌아와 보고했다.
“연대장님, 뜻밖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무창에서 온하위 추장을 만났는데, 연대장님과 협상하길 원합니다.”
“그래? 무슨 협상을 해? 싸우거나 항복하거나, 둘 중 하나지.”
“추장도 같은 생각인데, 조금 사정이 복잡한 모양입니다. 얘기나 한번 들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분명 투항을 전제로 한 협상을 제안한 것 같습니다.”
“음, 알았네.”
신첨은 군을 움직여 무창으로 나아갔다. 무창은 압록강변에 자리한 지름이 대략 3㎞ 정도 되는, 반달 모양의 평야 지대였다.
신첨 군이 마을 앞에 이르자, 온하위 추장 김하르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들은 신첨의 병력을 보자마자 두려움에 떨었다.
신첨과 김하르카는 자리를 잡고, 통역을 통해 본격적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김하르카는 신첨이 이끌고 온 병력의 정체부터 물었다.
“혹시 동해부 군입니까?”
“어떻게 알았지요?”
“두만강 쪽에서 큰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전란이 한창이니, 일반적인 조선군은 아닐 거라 판단했고요.”
“잘 아시는군.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귀측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무슨 뜻이지요?”
“우리 촌민의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니 그 정도는 물을 수 있지 않습니까?”
신첨은 김하르카의 표정을 보자,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즉 그의 유일한 선택지는 바로 항복인데, 그러고 싶어도 못 할 사정이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후후! 누르하치 때문이군.”
“휴!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린 이미 복속되어 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라, 우릴 끝내 지켜 주지 못한다면 항복하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알겠소. 우리 계획은 말이오.”
신첨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폐사군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오.”
추장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낮게 한숨마저 내쉬었다.
“이 정도 병력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그럴 리가? 우린 선발대에 불과하오.”
“예에?”
추장은 깜짝 놀랐다.
“그럼 누르하치 버일러 군과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단 말입니까?”
“그렇소. 그런 각오가 없다면 여기로 오지 않았겠지? 온하위를 공격하는 건 곧 누르하치를 건드리는 거니까. 그러나 엄밀히 말해 여긴 조선의 영토요. 그러니 누르하치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온하위의 세력은 미약하나, 거주지의 위치상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추장의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고래 싸움에 낀 새우 신세이기 때문이다.
“그럼 얼마나 더 많은 병력이 옵니까?”
“일단 삼천 정도?”
신첨은 앞으로 연대 병력이 무창군에 주둔하게 될 거란 점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놀랍군요. 그 정도면 능히 지킬 만합니다. 그럼 우리 부락은 흔쾌히 귀측에 투항하겠습니다. 그럼 저와 같이 여연으로 가시지요.”
“여연으로?”
“예, 그곳에도 온하위 부락이 있습니다. 제기 그쪽 암반을 잘 설득해보겠습니다.”
온하위 인구는 그리 많지 않으나 여러 부락이 있고, 부락마다 암반, 즉 추장이 있었다.
“음, 알겠소. 그럼 안내 부탁합니다.”
신첨은 뜻밖의 전개에 다소 놀란 상태였다.
태건은 폐사군 중 무창만 점령하고, 그곳을 교두보 삼아서 압록강 이북과 다른 폐사군 지역으로 천천히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연으로 진출할 경우, 누르하치를 더 강하게 자극할 염려가 있었다. 그런데도 신첨은 굴러들어 온 호박을 굳이 걷어찰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여연까지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태건에게 사후 보고하고 승인을 얻어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