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13
13화. 홍은과 송화상단 (1)
집으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허성이 태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온 길이라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했다.
“먼저 기별이라도 주고 오시지요. 정말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태 판관 말대로 금방 풀려났으니 고생이라 할 것도 없어요.”
허성은 자신의 운명까지 완벽하게 예측한 걸 보고, 태건의 특별함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다만 그는 태건과 이하륜의 생각처럼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기 보다는, 이 모든 일을 태건의 뛰어난 지적 능력에서 기인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저녁 늦게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무슨 급한 일이라도······.”
“비록 나이 차가 많이 난다 해도 우린 벗이 아니던가요? 벗과 어울리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소.”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저도 기쁘군요.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이 참군도 같이 듭시다. 두 분이 형제나 다름없다고 알고 있소만.”
허성은 현재 실직 상태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셋이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주안상이 들어왔다. 허성은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끌더니 조심스레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주상 전하를 알현했다고요.”
“듣고 오셨습니까?”
“그렇소.”
허성은 김성일과 만나 태건의 알현 건에 대해 얘길 나눈 다음, 이곳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대답을 회피하셨다고?”
“음, 그렇습니다.”
태건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고서 북변으로 떠나시겠다?”
허성의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사실 그는 김성일로부터 태건이 북변 근무를 청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태건의 집으로 달려온 길이었다. 그는 왜란이 일어나면 태건이 큰 역할을 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태건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이하륜도 나서서 한마디 하려다 태건의 손짓을 보고 그만두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시오. 태 판관처럼 혜안이 깊은 사람이 왜란이 발발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소? 김 부사님도 솔직히 그렇게 생각한다고 얘기했소. 하지만 나라가 혼란에 빠질까 저어되어 왜란이 없을 거라 주상 전하께 고했다 하오.”
허성은 동인 내부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태건에게 풀어놓았다. 태건의 솔직한 대답을 들으려고 약점까지 드러낸 셈이다. 김성일이 사사로이 판단해 왕에게 거짓을 고했으니, 이는 중죄에 해당되는 사안이었다.
태건은 이 사실을 깨닫고 한참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타인에게 전하지 않는다고 약조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깊이 고심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우리 백성의 미래를 위해서··· 약속할 수 있습니까?”
태건은 조선의 미래가 아닌, 백성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라고 정확히 표현했다. 하지만 허성은 이 미묘한 차이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음, 약조하지요.”
태건은 허성에게 계획한 바와 속내를 일부분 털어놓았다. 국서의 내용까지 훤히 알고 있는 마당에 왜란에 대해 끝까지 모른 척하는 것도 사실 예의가 아니었다.
“허! 이런······.”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던 허성은 태건의 말이 끝나자 장탄식을 터트렸다.
“그 정도로 심각하단 말이오? 아,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 조선이 겪을 고난은 허성의 생각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태건은 여러 근거를 들어 앞으로 조선이 맞이할 운명을 추론했다. 허성이 몇몇 사안에 대해 반론을 펼쳐 보았지만, 태건의 광범위한 지식과 논리 정연함에 이내 손을 들어야 했다.
“이처럼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 두만강 육진으로 행선지를 정한 겁니다.”
“음···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갑니다. 그럼 내가 도와줄 일이 있소?”
허성의 말에 태건의 귀가 번쩍 뜨였다. 안 그래도 힘 있는 누군가에게 어떻게든 부탁할 참이었다.
“예. 조금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여기 이하륜 참군을 포함, 이번 사행길을 같이 떠난 훈련원 무관들과 같은 곳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송찬황 봉사와 정강빈 봉사까지?”
“그렇습니다. 욕심을 더 내보자면, 다른 하급 무관도 보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그간 사행길에서 꾸준히 함께 훈련한 동지들이라.”
“흠, 일리 있네요. 같이 복무하면 그만큼 힘이 배가 되겠지.”
“화포에 쓸 화약도 많이 필요합니다.”
“그럼 서애 대감과 상의해 보겠소.”
서애 대감은 류성룡을 말함이다. 허성의 부친, 허엽이 동인의 실세이다 보니, 허성 역시 직위에 비해 만만치 않은 힘과 인맥을 보유했다.
“서애 대감께도··· 오늘 나눈 얘기는 비밀입니다.”
“휴! 알겠소. 이런 얘길 해 봐야 망령이 들었다며 힐난하지 않겠어요? 태 판관도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할 테고.”
태건이 그린 미래를 이해하려면 태건에 대한 신뢰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제삼자는 그렇지 못하기에 허성은 서애 류성룡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 * *
태건과 이하륜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짐을 챙긴 다음, 말을 타고 개성부로 향했다.
며칠간의 여정 끝에 개성 남대문 앞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남대문에서 개성부 관아로 통하는 대로변 좌우에 여러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데, 이들이 이른바 개성 시전으로, 서울처럼 관의 관리를 받는 상점들이었다.
개성 시전이 취급하는 물품들도 한성부만큼 다양했다. 특히 수공업의 도시답게 공방에서 출시된 제품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서울 시전 상인이 알려 준 곳을 찾아냈다. 그곳 역시 잡화점인데, 눈에 띄게 북적였다. 예상대로 서울 시전에서 본 그 물건이 고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같은 상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꽤 많았고, 종을 앞세워 직접 나온 양반들의 모습도 간혹 볼 수 있었다.
이하륜은 점포 앞에 도착하자 곧바로 상점주를 찾았다. 근처 공방에 있다 서울에서 온 두 양반이 자신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상점 주인은 서둘러 돌아왔다.
상점 주인은 30대 중반으로, 총기가 있고 반듯한 느낌을 주는 이였다.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어요?”
태건이 나서서 물었다.
“아, 예. 김명신입니다. 송화상단의 상단주입니다.”
김명신은 심부름꾼을 보내지 않고 직접 상인을 찾아온 양반이라면 성가신 손님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단단히 각오하고 나왔다. 그런데 이 훤칠하고 번듯하게 생긴 젊은 양반은 다짜고짜 자신을 하대하지 않았고, 태도 또한 공손했다. 그래서 내심 놀랐지만,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그저 태연하게 응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셨습니까?”
“저 물건 말이오.”
태건이 손을 들어 그 물품을 가리키자, 김명신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수차례 겪은 일이기 때문에, 태건에게서 받은, 좋은 느낌도 금세 사라졌다.
“저 네모난 조각은 비누입니다. 그리고 저 질그릇 병에 머리 감을 때 쓰는 기름 형태의 모발 비누가 들어있지요. 혹시 이걸 만든 분을 찾고 계십니까?”
“어찌 알았지요?”
이하륜이 물었다.
“워낙 많은 분이 찾아와 같은 부탁을 했으니까요. 만나게 해 달라, 기술을 사겠다. 뭐, 그런······.”
“음, 그렇다면 그분은 그때마다 퇴짜를 놨겠군요.”
“아··· 예.”
상대방이 예상과 달리 차분하게 반응하자 김명신은 살짝 놀랐다. 하지만 되도록 이들을 빨리 돌려보내고자 서둘러 자초지종을 설명해 나갔다.
“처음엔 몇 사람 만나주다 아예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제 선에서 그런 부탁을 잘라 달라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분이라 칭하는 걸 보니 양반가 사람인 모양이군. 혹시 여자분인가요?”
태건의 질문에 김명신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합시다.”
태건은 소매 춤에서 세필과 종이를 꺼내더니 빠르게 몇 글자를 써서 김명신에게 건넸다.
“이걸 그분한테 전해 주시오. 날이 저물고 있으니 숙소를 찾아 유숙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리다.”
“근데, 성함이······.”
“나중에 알려드리지요.”
“알겠습니다. 전해드리겠습니다.”
김명신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이들을 배웅했다.
* * *
이른 아침, 시전 상점들이 문을 열기도 전에 양반가 사람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잡화점을 찾아왔다. 남자는 올해 스무 살이 된 홍진이고, 여자는 홍은으로 남자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거 봐라. 문도 열지 않았잖느냐?”
홍진이 책망조로 말하자 어린 소녀처럼 보이는 여동생이 답했다.
“조금 기다리면 될 걸 갖고 뭘 그래요.”
“그렇게 친한 사람이야? 내가 아는 한 그런 사람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꼭두새벽부터 조바심을 내고 그래?”
“그러게 왜 따라왔어요. 나만 간다니까.”
“어떻게 어린 널 혼자 보내냐?”
“칫! 내가 뭘 어리다고.”
여동생은 오빠를 흘겨보았다. 어리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오는 반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단주 김명신이 도착했다. 그는 두 남녀를 보자마자 공손히 인사한 뒤, 홍진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홍은이 가게 앞에서 기다리겠다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홍은은 초조한 표정으로 가게 안과 거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성거렸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다. 드디어 태건과 이하륜이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말고삐를 잡은 채, 천천히 걸어왔다.
이른 아침이라 행인이 많지 않은데다, 두 사람 모두 키가 훤칠하게 크다 보니 김명신은 먼발치에서도 이들을 알아보고 급히 밖으로 나오려했다. 김명신의 반응을 본 홍은은 자신이 기다리는 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홍은은 김명신과 홍진을 향해 손을 들어 가로막으며 말했다.
“두 분, 잠깐 거기 있어 봐요.”
홍은은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태건과 이하륜에게 다가갔다.
태건은 무척 앳돼 보이는, 머리를 길게 땋은 소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두 사람 앞에 선 홍은은 어제 태건이 써 준 종이를 내밀었다.
“이거··· 전통무술연구회.”
태건이 적어 준 문구였다.
“그게··· 뭔지 알아?”
태건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네. 당연히 알지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홍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 그럼 미림이?”
“오, 오빠? 혹시 철헌 오빠? 아니면 지, 진······.”
“그래, 내가 철헌이다.”
“아, 오빠!”
눈치 빠른 이하륜이 재빨리 말을 움직여 상점 쪽 방향을 가려 주었다.
홍은은 박철헌이 생전 처음 보는 이의 모습으로 나타났음에도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
“죽은 줄 알았잖아··· 흑흑!”
“정말 다행이다, 난 네가··· 우리처럼 살아 있을 줄 알았다.”
이하륜이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하자 홍은의 고개가 그를 향해 홱 돌아갔다.
“지, 진형 오빠?”
“그래, 미림아!”
홍은은 또다시 이하륜을 부둥켜안았다. 보는 눈을 의식해 급히 떨어진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 죽음의 순간을 함께 했고, 또 낯선 시간대에 살며 쌓인 여러 감정이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무뚝뚝한 태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자 고개를 돌려야 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가게 안에 앉아 있던 홍진이 나가려 하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김명신이 그를 만류했다.
“잠깐 두고 보시지요. 세 분이 아는 사이 같은데.”
“생판 모르는 자들인데, 저 어린 은이가 어찌 안다고.”
“음, 이쪽으로 오시네요.”
가장 먼저 냉정을 되찾은 태건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한양에서 왔습니다. 훈련원 판관직에 있는 태건이라고 합니다.”
“으헉! 그, 그럼 무관?”
홍진이 깜짝 놀라 소리치더니 황급히 예를 갖췄다. 같은 양반이라도 자신과 격이 다른 사람이었던 것. 김명신 역시 상대방의 지위가 생각보다 높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동생분과 예전에 인연이 있던 사이였습니다. 아마 오라버니 되시는 분은 모를 겁니다. 그러니 우리한테 잠시 얘기 나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오후에 돌려보내지요.”
“아, 알겠습니다. 그리하십시오.”
동생한테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에 홍진은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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