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14
14화. 홍은과 송화상단 (2)
홍은은 두 사람을 자신의 공방으로 안내했다. 상단 사람들이 파견되어 외부인의 출입을 막아 주고 있어, 긴밀한 얘길 나누기에 이곳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홍은은 그간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하소연하듯 털어놓았다.
김미림도 홍은이 병에 걸려 죽은 다음, 홍은의 몸을 빌어 깨어났다고 한다.
대대로 개성에서 살아온 홍은의 집안은 몰락 양반가로 가세가 완전히 기운 상태였다. 태건의 집안처럼 양친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 두 남매는 직접 살림을 꾸려야 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하다 보니, 오빠 홍진은 결국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야 말았다. 홍진은 양반 체면 따위 따지지 않고 생존을 위해 개성의 상계를 기웃거렸다. 그런 상황에서 홍은이 죽다 살아난 것이다.
“겨우 열다섯이라니.”
태건은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홍은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자신이 알던 우아하고 성숙한 미림 대신, 꽤나 귀엽게 생긴 어린 소녀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들도 한참 어린 몸으로 깨어났잖아요?”
“후후! 그렇긴 하다.”
박철헌과 최진형 모두 30대 초중반의 나이에 변을 당했다. 김미림도 당시 스물아홉이었다.
홍은은 자신의 기억 속 모습과 완전히 다른, 태건의 외모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이 외모는 좀처럼 적응이 안 되네?”
“크크크! 그거 내가 처음 형보고 한 말이다.”
이하륜이 낄낄거렸다.
“그래도 다행히 뭐, 잘생기긴 했네. 그때나 지금이나. 아휴! 근데 난 미성년자로 깨어났으니, 이게 무슨 꼴이람?”
홍은의 시선은 여전히 태건에게 닿아 있었다. 친오빠처럼 친하게 지내던 박철헌의 달라진 모습에 익숙해지려 나름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뭐? 다행히 잘생긴 형하고 미성년자인 네가 뭐어?”
이하륜이 짓궂게 웃으며 묻자 홍은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됐네요.”
“비누와 샴푸는 어떻게 만들었어?”
태건의 질문을 받자, 홍은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오! 더러워서 살 수가 있어야지!”
“아하!”
“크크! 그렇지. 그만큼 확실한 동기는 없었겠다.”
홍은의 짧은 답변에 두 남자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태건의 짧은 반응과 달리 하륜은 홍은의 마음을 너무나 정확히 헤아려 주었다.
“기억이 없다면 모를까, 유난히 깔끔 떠는 나라에서 살다가 여기로 떨어졌으니 오죽하겠어?”
다시 태건이 물었다.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구나.”
“먹는 게 문제야? 씻어야 살지요.”
범인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말이지만, 홍은의 분노한 표정 때문에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비누 제조가 뭐 어렵겠어요? 어릴 때 수업 시간에도 만들어 봤잖아. 그거랑 좀 다르긴 하지만, 만드는 법 정도는 이미 꿰고 있으니까 바로 작업 들어갔지.”
홍은은 내친김에 공방 내부를 보여 주었다. 세 사람은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공방을 구경했다.
“근데 놀랍게도 그게 돈이 되더라고. 오빠가 써 보더니 좋다며 아까 그 상단 주인한테 보여 줬거든요. 그 다음부턴 말 안 해도 알지? 결국 상점 측이 신나서 이 공방까지 세워 줬어. 대신 독점 판매권을 달라고 해서 응해 줬고.”
“기름은 뭘 썼어?”
이하륜이 물었다.
“주로 아주까리기름을 썼어요. 그게 부족해서 등겨도 썼고. 생각보다 마땅한 재료가 별로 없더라고.”
“잘 선택했네. 아주까리의 용도가 많으니까 대량으로 재배해도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아주까리는 ‘피마자’라고도 하는데, 씨앗의 기름 함량이 꽤 높은 편이었다. 현재 조선은 그 기름을 약재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하륜은 윤활유와 염료 등 다른 공업적인 쓰임새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제조법은 넘겼어?”
태건은 가장 궁금한 점을 물었다.
“당연히 안 넘겼지. 우리 집안 밥줄인데······. 나와 오빠 둘만 작업하거든. 생산량이 적긴 해도 워낙 비싼 값에 팔리니까 송화상단도 꽤 많이 벌었대요. 아, 그리고 유리 제품도 개발 중이거든요. 이곳 개성이 그런 면에서 참 좋더라고. 다양한 공방이 있다 보니, 의뢰할 장인들도 있고.”
홍은은 두 사람과 재회한 기쁨에 수다쟁이가 되어 있었다. 김미림이었을 때의 인격과 사뭇 달라 보였다. 김미림은 당찬 구석이 있으면서도, 성격이 무척 차분한 편이었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 알고 있어?”
“알고 있지. 안 그래도 그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알고 나니까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미림 역시 홍은의 기억을 고스란히 흡수했기에 선왕의 묘호 ― 명종 ― 는 물론, 작년과 올해에 해당하는 간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근데 오빠들은 어디서 깨어난 거야?”
이하륜은 그간 겪은 일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근데 너 성격이 많이 변했다?”
하륜의 질문에 홍은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참 말 많은 시기의 기억과 섞여서 그런가봐.”
“뭐, 나름 귀엽고 좋네. 앳된 외모와 잘 어울리잖아?”
“오빠!”
이하륜이 역린을 건드리자, 홍은이 빽 하고 소리 질렀다.
태건은 미소를 짓더니 홍은에게 말했다.
“어쩌면 네가 우리 계획을 최소 반 년 정도 앞당겨 준 것 같다.”
“그래? 그럼 지난 일 년 간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네요?”
“맞아. 여러모로. 근데 김명신이란 상인은 어때?”
“괜찮아요. 신뢰할 만해. 전형적인 개성상인 있잖아? 대체적으로 합리적이고 신용 잘 지키고. 돈 욕심이 많긴 하지만··· 아, 발도 넓은 편이더라고. 순식간에 비누 판로를 전국 각지에 개척하더라니까.”
“출세욕은.”
“그건 모르겠는데, 좀 있지 않을까요? 언젠가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 개성상인들의 억눌린 욕구에 대해.”
태건은 턱을 쓰다듬으며 김명신에게서 받은 인상을 반추해 보았다.
“흠. 그 또한 나쁘지 않군. 공방 쪽 인맥은 어때?”
“직영하고 있는 공방도 있고, 거래처도 꽤 많은 것 같더라고. 아까 유리 얘기했잖아요? 모발 비누라 이름 붙인 샴푸를 만들고 보니 유리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유리 제조법을 읽었던 게 기억나서 어떻게든 해 보려고. 잘하면 한두 달 이내에 성공할 것 같기도. 그 작업을 하고 있는 곳이 바로 직영 공방이거든요.”
“유리까지? 정말 대단하군.”
“그래서 계획은요? 나 빼고 둘이 찰싹 붙어 그동안 온갖 모의를 했을 거 아냐?”
태건은 대답을 미뤘다. 그는 여전히 김명신이란 상인에 관심이 가 있었다.
“김명신을 더 강하게 유혹해 줄 수 있어?”
“뭐어~ 오빠!”
“아, 그, 그게··· 그런 뜻이 아니고······.”
홍은이 쏘아보자 깜짝 놀란 태건이 말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신제품 개발 말이야. 거기에 욕심이 동해 우리한테 본격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하란······.”
“아, 그거! 그거라면 뭐. 그러고 보니 진형 오빠 전공이지 않나?”
“앞으로 하륜 오빠라고 해.”
“아, 알았어.”
“안 그래도 많이 생각해 뒀거든. 그러니 앞으로 차근차근 진행해 보자고.”
이하륜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 한번 만나 얘기를 좀 나눠 볼게.”
태건은 아예 김명신과 직접 대화를 나눠 볼 작정이었다. 이제 태건은 홍은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 시작했다.
“일단 두만강 쪽으로 간다. 국왕을 알현했을 때, 그곳에 내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지. 정식으로 발령이 나면 즉시 실행에 들어갈 생각이야. 그게 성사될 가능성은 구할 정도?”
태건의 얘기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 * *
우의정 류성룡의 저택.
“태건? 요즘 들어 자주 듣는 이름이군. 주상 전하도 몇 번이나 언급하셨고 말이야. 태 판관이 그토록 뛰어난 인물인가?”
류성룡이 허성에게 물었다.
“정말 뛰어나지요.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될 자라 해도 손색이 없어요. 일본 무사들을 상대로 백전백승할 정도로 뛰어난 무예에, 시세를 정확하게 읽을 줄 아는 명민한 두뇌까지, 정말 모든 자질을 갖춘 인재라 할 수 있습니다.”
류성룡은 허성의 극찬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김성일도 이미 같은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일을 맡기기에 너무 젊고 경험이 적지 않나?”
“그게 문제입니다. 군 요직에 태 판관을 발탁한다면 모든 신료들이 들고 일어날 겁니다. 더구나 대감께서 추천한다면 더욱 강하게 반발하겠지요.”
“그래서 걱정이야.”
“요즘 전라좌수사 문제로 골치 아프시죠?”
“그러니까 말일세. 그러니 다른 이들까지 챙기기 쉽지 않지.”
류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봉하는 문제로 조정에서 열띤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순신을 크게 쓰기 위해 빠르게 승진시키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다른 신하들, 특히 서인의 반발이 극심했던 것. 그로 인해 태건이란 신성이 떠올랐음에도 류성룡은 태건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류성룡도 그간 기축옥사 과정에서 서인들의 무고로 꽤나 고생한 바 있었다. 정여립과 친분이 있다는 등의 고변도 잇달았지만 국왕의 믿음 덕분에 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다 얼마 전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과 크게 부딪쳤는데, 왕이 동인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주도권을 겨우 회복한 상황이었다. 그 덕분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보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태 판관은 스스로 육진으로 보내 달라고 자청했잖습니까?”
“나도 들었네. 그래서 더욱 아쉽단 말이지. 거기로 보내면, 왜란이 일어난다면 쓸 수 없는 패가 되니까.”
“만약 왜란이 길어진다면 어떻습니까?”
허성의 질문에 류성룡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성의 가정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매우 컸다.
“흠, 예비 전력으로 생각하자?”
“그렇습니다. 그러니 어차피 육진으로 보낼 거라면 힘이라도 확실히 실어 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태건의 육진 행은 국왕은 물론 서인도 찬성하는 사안이었다. 태건은 여전히 어느 당에도 관계하지 않았지만 동인과 더 친분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지원을?”
“철포를 보셨지요?”
“봤네. 놀랍더군. 하지만 우리 무장들과 주상 전하는 별로 관심이 없던데? 실전에서 쓸모가 없을 거라며.”
“왜국의 전국시대를 끝낸 무기입니다. 그걸 어찌 경시한단 말입니까?”
“휴! 그러게 말일세.”
“태 판관은 철포로 인해 우리 조선군이 크게 낭패를 볼 거라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저 철포를 직접 만들고, 철포병을 육성해 전란에 대비할 생각이랍니다.”
“철포병을? 오, 정말 놀라운 계획이군.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말일세.”
“그러니 도와줘야죠. 철과 화약을 되도록 많이 모아 보내 줍시다. 육진 중에 야인들과 충돌이 가장 잦은 곳으로 보내면, 물품을 보낼 명분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음, 좋은 생각이로고.”
류성룡은 허성의 의견에 부쩍 기울었다. 그러자 허성은 태건의 다른 부탁도 피력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사행을 같이 간 무관들도 그의 수하로 배치해 주는 게 어떨까요? 그래야 현지에서 군율을 더욱 빨리 휘어잡지요.”
“그렇긴 한데, 그들이 반발하지나 않을지. 대부분 부방을 갔다 왔거나 변경 근무를 마친 자들일 텐데, 또 보내도 되겠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다들 어떻게든 태 판관 곁에 찰싹 붙어 있으려고 애쓰더이다. 또 그리 처결하면 이로운 점도 있지요. 그들이 교대해 들어가면, 변방에서 경험을 많이 쌓은 장수들을 대거 불러들여 전란에 대비할 수 있지 않습니까?”
류성룡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좋은 생각일세. 단 한 명의 인재라도 아쉬운 형편이니··· 좋은 명분이 될 수 있겠어.”
류성룡은 국왕 또한 태건을 육진으로 보내기로 이미 결심한 마당이라, 태건을 따르는 무관들을 같이 보내는 일이나, 화약을 비롯한 보급품을 듬뿍 안겨주는 일 또한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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