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276
276화
무역선 어화진호 (1)
건흥 13년, 서기 1608년 5월, 류큐 남부의 미아쿠(미야코)제도 북부 해상.
아열대 기후 특유의 무덥고 습한 날씨. 더위에 지친 선원 대부분은 요즘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반팔 통상의(미래의 반팔 티셔츠 형태) 차림으로 상갑판으로 나와 바닷바람을 쐬고 있었다.
삼우해운의 중범선 어화진호는 목적지 미아쿠섬(미야코지마)을 향해 한창 항해 중이었다. 이 배는 아오지급 군선을 상선으로 개조한 형태의 범선으로, 삼우해운이 보유한 다섯 척의 동급 선박 중 한 척이었다. 이 회사는 중범선 이외에 연안 항로에 투입된, 승객 6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병오선 ― 1606년 병오년에 개발된 범선이라 병오선이라 불림 ― 도 11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바람을 쐬는 선원들과 달리 선장 박술은 초조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침로를 확인했다.
“270도로 가는 거 맞지?”
“예, 선장님.”
조타수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만 더 가면 수평선에 분명 섬이 나타날 겁니다.”
항해사 안철진도 박술의 조바심을 달래 주었다.
선장과 항해사는 모두 발해 해군 3함대 출신의 해군 예비역 장교였다. 박술의 최종 계급은 참령이고, 김명철은 정위였다. 이들 모두 해군 선배인 김홍선의 제안을 받자, 고심 끝에 전역해 삼우해운에 입사, 오늘에 이르렀다.
삼우해운 대표 김홍선은 허균의 소설 ‘김참령전’의 실제적인 주인공이었다. 그는 회사 상호를 ‘3함대 전우’를 뜻하는 ‘삼우’라 지을 정도로, 3함대에 대한 긍지가 매우 높았다. 그래서 3함대 출신 직원을 더욱 우대했다.
“그래도 첫 항해 아니냐? 긴장해야지.”
“전 두 번째입니다만.”
항해사 안철진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아차! 그랬지. 넌 공주님과 함께 마카오에 다녀왔다고 했지?”
“그거 술자리 때마다 입이 닳도록 얘기한 건데, 벌써 까 잡수셨소?”
“허허! 미안. 깜박했네?”
“그때도 조바심 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류큐 본섬에서 미아쿠섬까지 보통 먼 게 아니라서.”
“그러게나 말이다.”
실제 그 거리는 무려 270여 장미에 달해, 선장 박술이 바짝 긴장한 것이다.
미아쿠섬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다. 성종 대 어느 제주도 어민의 유구국 표류 후 귀환 사건 보고서에서 ‘멱고시마’라는 한자어 지명이 등장하는데, 그곳이 바로 미야코지마, 즉 미아쿠섬 ― 류큐식 발음 ― 이었다.
현재 삼우해운은 대마도 초량과 류큐 내 발해 영토인 금성진을 오가는 국제 무역업에 뛰어들어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발해산 면포와 기성복, 도자기, 인삼, 세제, 필기구, 장신구와 같은 전통 공예 상품, 성냥 등 인기가 많은 발해 상품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아 금성진 시장으로 가서 풀었다. 또 거기서 류큐의 특산물인 사탕수수로 만든 흑설탕과 야광조개 껍데기(수공예품의 원료)를 비롯해, 류큐 상인이 명나라에서 구해온 비단과 남방 약재 등을 실어 와 이익을 실현했다.
이들 중 가장 큰 이윤을 남겨 주는 상품은 역시 수요가 가장 많은 면포였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고품질의 발해 면포는 명과 왜, 류큐, 심지어 서양에서도 유명해졌다. 거리가 인도보다 멀지 않았다면 인도산 면직물의 인기를 진즉에 추월했을 것이란 평가가 서양 상인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졌을 정도였다.
또 사탕수수의 경우, 발해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널리 퍼지지 못한데다, 류큐산 흑설탕 완제품 가격이 다소 저렴해 발해 상인이 주로 구매하는 상품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상품이 추가되었다. 바로 말라리아 치료제 원료인 기나나무였다. 발해 보건부는 키나를 기나로 고쳐 불렀고, 따뜻한 곳일수록 잘 자라는 이 나무의 특성을 고려해 미아쿠에 재배를 위탁했다. 그래서 보건부의 주문을 받은 삼우해운이 미아쿠섬을 오가며 기나나무 재료를 실어 오게 된 것이다. 아울러 사탕수수 또한 많이 재배되고 있어, 가는 김에 설탕도 실어 올 계획이었다.
그 첫 거래를 어화진호가 맡았는데, 초량에서 실어 온 상품을 모두 금성진에서 하역한 후, 이렇게 미아쿠섬으로 향한 것이다.
“선장님! 전방에 배가 나타났습니다.”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견시수가 소리쳤다.
“배가?”
선장은 재빨리 천리경을 들어 전방, 즉 서남쪽을 살폈다.
“음, 맞는군.”
“서양 배겠죠?”
“그래. 남만선일 가능성이 크지.”
발해 해군이나 상선 선원들은 서양과 남만이란 단어를 혼용했다. 서양이란 단어는 조정을 통해 보급된 용어이고, 남만은 원래 사용하던 말이라, 동의어처럼 활용되고 있었다.
“어딜까요?”
“글쎄다. 요즘 포르투갈과 스페인 배의 입항이 전보다 뜸해진 대신에 네덜란드 배들이 자주 오던데. 영국도 몇 번 왔지, 아마?”
작년에 처음 대마도로 진출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발해 측에서 유상으로 임대한 대포항 해변 땅에 임시 상관을 열고, 벌써 두어 번 상행을 다녀갔다. 그 상행에서 큰 이익을 본 영국 측은 중간기착지로 삼을 만한 곳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이 노리고 있는 곳은 보르네오섬 동북부 끄트머리에 자리한 라부안섬 혹은 가야섬으로, 이 섬을 빌려 쓰기 위해 그 땅의 주인인 브루나이 술탄국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보르네오섬 북부와 필리핀 땅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브루나이 왕국은 한때 스페인에 수도를 점령당하기도 하는 등, 밀려오는 서양 세력에게 벌써 시달리고 있었다.
라부안섬과 가야섬은 훗날 영국 식민지가 되는데, 영국이 이 땅에 눈독 들일 계기가 너무나 일찍 발생한 셈이었다.
박술 선장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상선이길 바랐다. 이들 두 국가는 발해 상단들과 긴밀하면서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영국은 아직 진출 초창기라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아, 네덜란드 상선입니다. 거선 급입니다.”
깃발을 확인하고 견시수가 또다시 추가로 보고했다.
“거선? 거선이라면 그 고려호 아닌가?”
코레아호를 발해인들은 고려호라 불렀다. 코레아란 말의 유래를 듣자, 즉시 고려라 바꿔 부른 것이다.
박술은 다소 안심했다. 네덜란드인들이 간곡하게 통상을 요청하려고 타고 온 배가 고려호였기 때문이다.
코레아호와 어화진호의 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코레아호도 어화진호를 발견하자, 침로를 수정해 다가왔다.
박술 선장은 인사나 나눌 심산으로 선미 갑판 지휘석을 벗어나 선수 갑판으로 이동했다.
* * *
조선 한성부 경운궁.
광해군이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 선조가 정궁으로 활용한,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던 이 행궁에 정식으로 궁호가 붙었는데, 그게 바로 경운궁(미래의 덕수궁)이었다. 현재 창덕궁을 법궁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중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 조선 조정은 당분간 경운궁을 쓸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오후 늦게 열린 만조가 끝난 이후, 대사간 이이첨, 이조판서 기자헌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군의 반란 시도를 교묘하게 이용해, 선왕의 양위를 유도해 낸 두 신하를 국왕은 몹시 믿고 따랐기에, 불편한 대화도 스스럼없이 나누곤 했다.
국왕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그야말로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4년 전부터 경기도에 한 해 시범 도입한 대공수미법의 성과가 좋게 나오자, 이 제도를 더욱 보완해 대동법을 제정, 이를 전국으로 확대해 시행했는데, 예상보다 강한 향반들의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경기도에서 성공하게 된 이유는 경기도가 이제 발해와 국경을 접한 변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슬 퍼런 중앙군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감히 왕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방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민심도 여전히 잡지 못했다. 임해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 시킨 후, 결국 사사까지 했고, 대동법도 실행해 민심을 얻는 듯했으나, 발해가 문제였다. 조선이 아무리 잘해도 양반 중심 사회란 한계가 있었다. 같은 군주제 국가이나 상대적으로 백성 중심 국가인 발해와 매사에서 비교되다 보니, 민심을 얻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몰래 국경을 넘는 자들이 여전히 많단 말인가?”
국왕이 한탄조로 물었다.
“송구하나이다, 전하. 강원도 관동 지방이 가장 심하고, 국경을 접한 경기도 역시 떠나는 자들이 속출하는데, 밤을 틈타 산으로 넘어가니 근절하기도 어렵답니다.”
대사간 이이첨이 대답했다.
조선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은 이처럼 인구가 계속해서 빠진다는 점이었다. 국경을 접한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이 현상이 특히 심하게 일어났다. 삼남 지방에서도 이주자들이 나왔지만, 넘어야 할 관문이 많다 보니, 검문에 걸려 중간에 되돌아가는 경우가 흔했다.
“정말 목숨 걸고 넘어가는군. 맹수는 어쩌고. 그렇게도 가고 싶을까?”
국왕은 맹수를 걱정했다. 그러나 조선 측은 발해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 나름 손을 써 두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주민들이 밤에 산을 넘어온다는 사실을 훤히 파악하고 있는 발해 조정은 황해도와 강원도 국경 지역에 주둔 중인 군부대에 맹수를 철저히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그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 이주민이 주로 다니는 통로에서 호환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주민이 좀처럼 줄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이와 같은 발해의 적극적인 유치 정책 덕분이었다. 근래에 들어온 이주민들 대부분은 풍요로운 남해부 규슈 지방을 정착지로 배정받았다. 벌써 40만에 달하는 왜인 주민들이 북방으로 떠난 상황이라, 그 공백을 이들 신규 이주자로 채우고 있었다.
“그보다 재정이 문제입니다. 인구의 유출로 소출이 크게 줄자, 세금 또한 줄었지요. 그 때문에 도무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중앙군 병력도 대폭 늘려야 하나, 아직 손도 못 대는 실정입니다.”
조선이 재정 위기에 빠진 이유는 당연히 생산 가능 인구가 발해로 대거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소작농은 물론이고, 자영농이라 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빈농들이라면 모두가 발해 이주를 꿈꿨다. 이들 중 조상 묘를 돌보고, 노모를 봉양하느라 아직 떠나지 못한 이들도 있으나, 벌써 꽤 많은 수가 고향을 등진 상태였다. 심지어 노비들이 야반도주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대지주들은 이제 꽤 비싼 품삯을 주고 노동력을 구해야 했다. 그래서 더욱 대동법을 반대하게 되었다. 전에 비해 지출이 증가한 데다, 세금까지 대폭 늘어나니, 반발이 일어나는 건 필연적이었다. 이들은 같은 처지에 놓인 양반들과 연명해 꾸준히 상소하고, 상경해 시위도 벌였다. 아울러 집권당의 반대파 중앙 정치 파벌인 서인을 노골적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후발해는 어찌 일 할의 세금만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지?”
국왕은 이제 더 이상 북방 역도란 말을 쓰지 않았다. 왜국 본주 북부를 정벌하고, 남아 있는 피로인을 모두 구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물론 조선 조정은 이를 쉬쉬했지만 발해 신문이 문제였다. 사실 조정도 이 신문을 통해 이 놀랄만한 소식을 접한 상황이라,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쯤 되니 ‘북방 역도’란 개념 자체가 너무 무색해, 왕은 물론이고 신하들도 언젠가부터 ‘후발해’라 불러 주기 시작했다. 발해는 이미 일개 왕국이 아닌, 여러 민족을 거느린 제국의 면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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