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295
295화
증기 기중기 (1)
2년 후, 건흥 17년, 서기 1612년 봄, 건흥궁.
태건은 류큐의 사자 옹대성이 바친 국서를 읽은 후, 그를 지긋이 바라보다 한마디 툭 던졌다.
“서울은 처음인가?”
“그렇습니다. 그간 남해부를 통해 국서를 전달하거나, 기하께서 직접 남해부로 오셨을 때, 알현해서 전해 드린 바 있습니다.”
옹대성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류큐인 중 최초로 서울을 방문한 그는 서울의 신문물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굳이 안내자가 붙어서 서울을 구경시켜 주지 않아도, 고층 건물과 기차만 접해도 알 수 있었다. 발해는 차원이 다른 나라였다. 그는 해군 전력만으로 발해의 국력을 평가했던 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바로 깨달았다.
“직접 올 정도로 급했나 보군.”
“그, 그건 아닙니다.”
“후후! 류큐는 왜 생각이 바뀌었을까?”
태건의 질문은 다소 짓궂은 면이 있었다.
류큐가 사신까지 파견해 해결을 보고자 한 사안 역시 어화진호 사건으로 인해 파생된 문제였다.
어화진호를 찾기 위해 발해 함선이 대거 금성진에 들어왔을 때, 류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그런 일을 겪고 나자 수도 코앞에 외국 해군기지가 자리해 있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이냐는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외부의 위협에 노출되었을 때만 해도, 발해의 존재는 든든하기만 했다. 왜에서 갈라져 나온 구마국 역시 언제든 류큐를 노릴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이고, 명나라도 그랬다. 그래서 발해의 보호국이 되길 자처했다. 그런데 막상 발해가 제해권을 확보한데다 포르모사에도 진출해 모든 위협이 사라지자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읍소하러 왔기에 옹대성은 더욱 소심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태건이 폭군에 가까운 인물이라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기하! 부디 선처를…….”
“그럼 대안도 갖고 왔겠지?”
“그렇습니다, 기하. 발해 해군기지로 아구니섬을 제공할 계획입니다.”
“그 땅을 빌려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기하.”
“흠, 금성진은 할양해 줬는데, 아구니섬은 빌려준다?”
아구니섬(한자로 속국도)은 나화에서 서북쪽으로 약 55장미 떨어진 섬으로, 길이가 약 4장미, 폭이 3장미 정도의, 매우 작은 섬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면적은 금성진과 비슷했다.
태건은 이 제안만 듣고도 류큐의 심리 상태를 바로 파악했다. 그간 발해가 단 한 번도 적대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들은 발해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해군기지만이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간청하고 나선 것이다.
태건은 이하륜을 바라보았다.
“의정대신 생각은 어떤가?”
“조금 더 숙의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알았네. 그럼 류큐 사신은 숙소로 가서 쉬게.”
“예, 기하.”
옹대성이 정전인 대흥전에서 물러나자, 태건은 여민부 도독 지위에 있다가 새로 외부대신이 된 이붕에게 물었다.
“외부대신 생각은 어떻소?”
“유구국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발해가 아무리 저들의 우호국이고 종주국이나 다름이 없다고 하나, 도성 바로 앞에 덩치가 큰 외국 군선이 드나드는 걸 좋아할 나라는 없지 않겠습니까?”
참정대신 조경린도 그의 의견에 일단 찬성하고 나섰다.
“소신의 생각도 같습니다. 그러나 나라 간의 약속을 경솔하게 변경하는 일 또한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봅니다. 그러므로 유구국이 일정 부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속국도란 섬을 빌려준다고 하지 않았나?”
“수도 수이가 자리한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꼭 그렇지는 않은데…….”
이하륜이 살짝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다 문득 영해나 경제수역 개념이 아직 없는 시기라는 걸 깨닫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의문점이 생기면 바로 따져 묻는 조경린이라,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의정대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요?”
“음, 그러니까…….”
이하륜은 잠깐 생각을 정리한 다음, 그의 질문에 답했다.
“금성진은 류큐의 수도와 붙어 있어, 앞으로 꾸준히 반환 요청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지요. 그러니 우리가 남방으로 향하는 징검다리로 삼을 확실한 영토, 영구적인 영토를 이번 기회에 얻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하륜의 의견에 태건의 눈이 반짝였다.
“음, 그럼 의정대신 의견은 금성진과 속국도의 지위를 바꾸자는 뜻인가?”
“그, 그렇습니다.”
태건이 한발 더 나아가자, 이에 자극받아 이하륜의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것이지요. 금성진을 임대 혹은 조차지로 바꾸고, 속국도를 영구적인 우리 영토로 삼는 겁니다.”
“조차지로 바꾼다면 기간은 얼마나?”
“30년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길면 저들이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유구 국왕에게 신하와 백성을 설득할 명분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건과 이하륜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빠르게 논의를 발전시키자, 조경린과 이붕은 몹시 당황해했다. 30년 임대 혹은 조차지란 개념이 아직 머릿속에 자리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실한 명분을 제공하려면 약간의 비용도 곁들여야 하지 않겠어?”
“그게 정석일 겁니다. 속국도 주민의 토지를 수용하는 대가로 줄 비용도 필요하지요. 또 어쨌든 애초에 속국도를 빌려주는 조건을 류큐에서 제시한 상황이니, 성의를 보여 주는 차원에서 10만 원 정도의 임대료를 제공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니까 이 임대료는 사실상 금성진을 빌리는 대가로 제공되는 셈이지요.”
류큐국이 보기에 10만원은 분명 큰 금액이나, 발해 처지에서 그리 큰돈이 아니었다.
이하륜의 의견에 이붕과 조경린 모두 찬성했다. 현재 발해가 가장 믿을 만한 나라는 류큐이기 때문에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사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음 날, 태건은 옹대성을 부른 후, 정리된 의견을 제시했다.
“알겠습니다, 기하. 그럼 돌아가 국론을 정해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옹대성은 당연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류큐 측은 발해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한다고 통보하고, 조약까지 일사천리로 체결했다. 그 결과, 아구니섬은 발해의 영토로 귀속되었고, 금성진은 30년간 발해 조차지로 변경되었다.
발해도 만족했지만, 류큐국도 매우 기꺼워했다. 30년 후, 지금보다 더 흥성한 도시가 되어 있을 금성진을 돌려받게 된다는 점을 특히 높이 샀다.
태건은 아구니섬을 ‘율도’라 명명했다. 당연히 홍길동전의 율도국을 떠올리고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 * *
남해부 초량시 초량항.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블루드래곤호가 입항했다. 이번 항해에 헨리 미들턴도 동행했기에, 선장 윌리엄 칼링은 미들턴을 수행하느라 먼저 배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지사장님. 지사장님?”
초량항에 상주하는 영국인 직원 둘이 마중 나와 두 사람을 반겨 주었다. 그런데 미들턴은 직원의 인사도 받지 않고 멍하니 북쪽 부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링 선장도 마찬가지였다. 모종의 굉음에 이끌려 시선을 빼앗긴 탓이다.
“저, 저게 뭔가?”
미들턴은 인사도 받지 않고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아, 화물 하역용 신형 기중기랍니다. 한 달 전에 설치되었지요.”
“신형 기중기라고? 가 보세.”
“그러시죠.”
미들턴 일행의 발걸음이 부리나케 북쪽 부두로 향했다.
초량시 인근 해역에 다다르게 되면,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들은 으레 지점이 있는 대포항부터 들른 다음, 초량항으로 와서 경매에 참여하는 절차를 거치곤 했다. 통상 이 경매에 올라간 상품은 물론이고, 경매를 거치지 않는 물품까지 꽤 많이 구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남방에서 실어 온 화물이 많았기에 직접 초량항으로 들어온 것이다.
걸어가면서도 미들턴의 시선은 신형 기중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다 따라붙은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짧은 지시를 내렸다. 원래 하선하자마자 해야 할 얘기였다.
“우리 배에 정향과 후추, 명나라 비단이 잔뜩 실려 있으니 그걸 하역해 고려상단 측에 넘기게.”
“아, 그래서 이곳부터 오셨군요.”
“그랬지.”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 없다는 듯이 앞만 보고 가던 칼링 선장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오오! 기중기가 움직입니다. 고정형이 아니네요?”
칼링 선장은 부두에 붙박이로 설치된 크레인만 염두에 두고 있는데, 부두와 평행하게 가로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신형 기중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그렇군. 세상에나, 저 큰 바퀴가 돌아가는 것 보게. 음 저 바퀴가 동력을 제공하는 것 같군.”
“근데 너무 시끄럽군요. 오! 저 시꺼먼 연기 좀 보십시오.”
“그러게. 신기하군. 일하는 말도 없이 스스로 움직이다니.”
작업 중인 신형 기중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자, 두 사람은 갑자기 수다스러워졌다. 이 기중기는 삼우해운이 운영하는 석탄 운반선에서 석탄을 하역하고 있었다.
원래 초량항에 설치된 기중기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서, 말이 끄는 힘으로 움직이는 목재 기구였다. 그런데 증기기관으로 구동되는 기중기가 그걸 대체한 것이다.
“저거, 석탄을 태워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직원이 웃으며 이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석탄으로?”
“석탄을 가지고 어떻게?”
두 사람이 동시에 되물었다.
이번에 초량항에 설치된 증기기관 기중기는 발해기계연구소가 내놓은 작품이었다. 물론 이하륜도 설계에 관여했는데, 그는 철도 레일을 부두 바닥에 심어서, 기중기가 레일을 타고 움직이며 작업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저 동력원이 발해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증기기관이라고 들었습니다. 꽤 오래전부터 저 기계를 발명해서 써 왔답니다. 두 분 아직 정미소에 가 보시지 않으셨죠? 이곳 초량에도 한곳 들어섰는데요.”
“정미소라면 벼 껍질을 벗기는 곳인가?”
“예. 거기에도 저 증기기관이 설치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일을 그 기계가 다 하더군요. 사람이나 가축이 붙어 몇 날 며칠을 해야 할 일을 기계가 금방 끝내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허허! 이게 도대체 뭔 일인지.”
미들턴은 발해가 보유한 문명의 이기를 처음 접한 터라, 이걸 드러낸 발해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아, 지사장님. 저기에 남해부 도독도 나와 있네요.”
허균 역시 이 증기 기중기에 흥미를 느껴 틈만 나면 부두로 나와 작업 장면을 구경하곤 했다.
허균은 미들턴을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들었다. 미들턴은 종종걸음으로 허균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고려어에 능한 직원도 통역해 주려고 따라붙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도독님.”
“허허! 오셨군요, 미들턴 경.”
허균은 손을 들어 기중기를 가리켰다.
“놀랍지요?”
“예.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부품 형태로 배에 싣고 와, 여기서 조립해 설치하느라 고생깨나 했다오.”
“아, 본토에서 싣고 왔군요.”
“그렇소. 본토 항구에선 진즉에 설치되어 팽팽 돌리고 있는데, 여긴 변방이라 조금 늦게 도착했지.”
“놀랍군요. 근데 저거 석탄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소. 하지만 그 이상은 알려 줄 수 없소. 뭐, 말해 주지 않아도 금세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겠지만, 발해의 신하인 내가 어찌 그걸 내 입으로 순순히 알려 줄 수 있겠소.”
허균은 익살맞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과 다르게 기술이 유출돼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아, 예.”
미들턴 역시 영혼이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미들턴도 허균이 장난기 많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아울러 그가 발해를 대표하는 작가이고, 그래서 성격이 다소 괴팍하다는 점도 인지했다.
“대마도에서 석탄이 생산됩니까?”
미들턴은 우선 석탄에 대한 호기심부터 풀고자 했다.
“그렇지 않소. 석탄은 저쪽 북구주에 지천으로 널려 있지. 벌써 몇몇 탄광이 개발되어, 거기서 난 석탄을 쓰고 있다오. 저 배에 실린 게 바로 송원현 신진에서 캐온 거지요.”
“아, 그렇군요.”
송원현 신진(사세보)은 석탄의 산지이고, 또 남해부 최초의 면직물 공장이 들어선 곳이기도 했다. 북구주는 발해의 면화 수요량 중 8할가량 책임지고 있는 지방이라, 예전부터 면직물 관련 공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그래서 남해부에 대한 증기기관 반출 금지 조치가 해제되자마자, 함강상단이 가장 먼저 신진에 진출해 공장을 세운 것이다. 함강상단에 이어 다른 상단들도 북구주로 진출하려고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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