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333
333화
정인홍의 여정 (1)
춘궁기에 접어들자 조선 조정의 사정은 더욱 악화했다. 안 그래도 부족했던 군량이었다. 그런데 보릿고개에 이르니 더 이상 군량을 조달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조선의 편에 서 있는 주변 고을에 아무리 강력하게 요청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관청 곳간이 텅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전관들은 지방관청에 기대지 않고, 직접 지역을 호령하는 향반 가문을 돌며 식량을 구걸하고 있었다. 또한 겨울을 나며 많은 병사가 빠져나가 이제 보유 병력도 겨우 2천 정도만 남은 상황이었다.
국왕은 초라한 수라상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좌의정 정인홍을 포함해 모두가 배를 곯고 있는 형편에서 화려한 수라상을 차리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물론 그럴 여력도 없었다.
국왕은 이내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라상을 깨끗이 비우는 것도 눈치 없는 행동이었다.
행궁 뜰을 조금 거닐다 보니, 곧 신하들이 들어왔다. 신하들도 행궁, 즉 충청 감영 주변에 거주하고 있어 출근이 꽤 이른 편이었다.
국왕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은 가을처럼 더없이 높아 보였고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랬다. 봄의 훈풍이 뺨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국왕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목에서 통증이 느껴졌으나 자세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신하들은 국왕이 들지 않자 행재소 건물에서 나와 국왕 근처로 모여들었다.
“다들 왔소?”
국왕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눈을 뜨고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예, 전하. 들어가시지요.”
정인홍이 임금을 데리고 들어가려 했다.
“날씨도 좋으니 여기서 얘기합시다. 얘기할 것도 별로 없을 테니.”
“전하…….”
살림이 단출해지자 조회도 형식적이었다. 그저 정보나 공유하는 게 전부였고, 식량 걱정, 탈영병 걱정하다 끝이 나곤 했다.
평소와 다른 국왕의 태도에 신하들은 다소 당황했다.
“보고할 게 있소?”
국왕이 물었다. 그러자 이이첨이 대답했다.
“아뢰기 송구하오나 동부 고을이 결국 발해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진잠현과 회덕현이 국경처럼 된 상황입니다.”
회덕과 진잠은 미래의 대전에 해당하는 곳이다.
국왕은 비보가 전해졌음에도 별다르게 동요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래도 경상도 전역이 발해에 넘어간 듯합니다. 호남의 남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국왕은 다시 눈을 감았다.
신하들은 더 이상 국왕을 방해할 수가 없었다. 보고해 봐야 모두가 안 좋은 소식뿐이기 때문이다.
국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좌의정.”
“예, 전하.”
“이제 내려놓읍시다.”
“예?”
“이제 그만하자고요. 여기서 더 버텨 봐야 뭐 하겠소. 모두가 괴로울 뿐이지.”
국왕의 속내를 알아챈 신하들이 곧바로 반응했다.
“전하!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북방역도에게 나라를 바치다니요.”
오랜만에 북방역도란 말이 등장했다.
“전하!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정인홍마저 만류하고 나섰다.
국왕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시오. 지금 우리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발해의 배려 덕분이란 걸 모르시오? 수십만 대군을 보유한 발해가, 명과 후금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어렵지 않게 승리한 발해가 왜 군을 움직이지 않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전하…….”
“저들은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는 법을 아는 자들이오. 조선 백성의 민심을 얻어 솜에 물이 스며들 듯 자연스레 조선 땅을 잠식해 왔소.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고을을 고스란히 바쳐 왔지 않소? 군사력만 강한 게 아니라, 책략까지 능하니 무슨 수로 저들을 이기겠소?”
국왕은 발해를 예찬하고 있었다.
“전하!”
“으흐흐흑! 전하!”
신하들은 이제 조선이 끝났다는 걸 깨닫자, 땅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좌의정이 협상단을 꾸려 발해와 접촉해 보시오. 그래서 항복하더라도 되도록 왕실은 물론이고, 신료들도 이로운 상황을 조성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저들의 도성으로 가는 길에 우리 군사들과 백성들을 먹일 식량도 요청하시오.”
“예, 전하. 그리하겠나이다.”
신하들은 여전히 흐느끼고 있지만 정인홍은 한가하게 그런 요식행위에 동참할 여유가 없었다.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큰 책임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정인홍은 이이첨과 기자헌, 류영경과 함께 길을 나서기로 했다.
* * *
경상도 하양현(미래의 경상북도 경상시와 대구시의 일부).
발해 육군 제24사단 제83연대장 백진 정령은 관아 정문 앞마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나리. 오늘 모인 자들은 와촌과 중림 출신 노비들입니다.”
지방 행정에 밝은 향리가 조아리며 백진 연대장에게 고했다. 와촌면과 중림면은 하양현의 읍내 주변에 자리한 지역이었다.
“겨우 두 곳인데 이렇게나 많나?”
“그렇습니다. 병사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데려왔으니 많을 수밖에 없지요.”
향리는 조금이라도 백진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조심스레 대답했다.
각지의 군정 책임자들은 향리의 부패 여부와 상관없이 일단 이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다. 향리들도 그걸 알고 있기에 군정관에게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 고을의 현감은 이미 공주로 달아난 상황이라 더욱 향리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역시… 삼남 지역은 노비가 많다더니. 노비를 내놓지 않겠다며 버틴 자는 없었나?”
“왜 없겠습니까요? 대대로 이곳 하양에서 위세를 떨치던 박씨 가문에서 노비를 숨기려다 발각되어, 하양현을 담당하는 김 대대장이 이들을 체포해 동헌 감옥에 가둬 두었습니다.”
하양현의 군정을 담당하는 대대장은 현재 병력을 이끌고 지역을 조사하고 있었다.
백진 연대장은 호위 병력과 함께 자신의 연대가 담당하는 고을의 상황을 살피던 중, 오늘 이곳에 이르러 노비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분명 사전에 일러 줬겠지?”
“당연합니다. 노비를 감추거나 방면을 방해하면 엄하게 처벌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습죠.”
“그런데도 어긴다고?”
“노비를 내놓으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그럴 겁니다.”
“하여간 욕심은…….”
“저, 그런데 기존 토지 대장을 그대로 인정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죄지은 이도 해당합니까요?”
“그렇네. 발해는 굳이 땅을 빼앗지는 않지. 형벌은 형벌이고 재산은 재산이니까.”
“군정이 마무리되면 우리 향리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그대들도 재평가할 거네. 죄지은 게 있다면 자복하고 되돌려 놓아야 처벌받지 않겠지. 죄가 없다면 나라에서 녹을 받고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될 거네.”
“나라에서 녹을 받는다고요?”
“발해의 행정은 아주 간단해. 나랏일을 하면 모두가 관리이고, 관리는 녹을 받게 되지. 중앙관과 지방관의 차별도 없네. 오로지 직위와 직급에 따라 받는 급여가 다를 뿐.”
“오! 정말 신문에서 본 게 사실이군요.”
“허허! 신문을 벌써 봤다니, 잘 알겠군.”
“연대장님. 다 모였다고 하니 바로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동헌을 지키고 있던 중대장이 백진에게 다가와 인사하며 말했다.
“그러게.”
중대장은 단상에 오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여러분은 오늘 이곳에서 발해 주민으로 등록하게 될 거요. 그게 무슨 의미냐? 바로 노비 신분에서 풀려난다는 겁니다. 아시겠소?”
주민등록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이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풀려난다는 대목에 집중한 자들은 곧바로 환호성을 터트렸다.
“풀려난다고?”
“정말 풀려난다네. 허허허!”
백진은 노비들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바로 눈치챘다.
“뼛속까지 노비인 자도 있고, 본디 노비가 아니었는데 집안이 망해 노비가 된 자도 많지요.”
백진의 표정을 살피던 향리가 바로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자들은 후자겠군.”
“그렇습니다요. 근데 뼛속까지 노비였던 이들 중 상당수는 해방감보다 두려움을 더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
중대장의 말이 계속되었다.
“성이 없는 이들은 오늘 새로운 성을 부여받을 거요. 그러니 차례로 나와 등록하시오.”
중대장의 말이 끝나자 노비들은 앞에 있는 여러 개의 책상 앞에 줄을 섰다.
“근데 성씨는 어떻게 부여합니까?”
향리가 물었다.
“여기가 하양현이나 대부분 하양 하씨가 되겠군.”
“아! 그런 식으로요.”
“그렇네.”
“그럼 저들은 어디로 가게 됩니까?”
향리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어야 앞으로 이 공터에 모인 이들의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답할 수 있기 때문에 연대장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백진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작전과장을 불렀다.
“최 과장. 자네가 자세히 알려주게. 저들에겐 무척 중요한 일이니까.”
“예. 연대장님.”
작전과장 최영훈 참령이 나서서 향리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저들이 배정된 곳은 홍제부와 북해부일세.”
향리는 이 두 지역이 어딘지 몰라 눈만 꿈벅거렸다.
“왜한테 빼앗은 땅이 홍제부인데, 왜의 본주 북부에 있는 땅이네. 왜인은 물론이고 왜인과 다르게 생긴 원주민이 거주하는데 인구가 그리 많지 않지. 더구나 왜란 때 붙잡힌 피로인이 방면되어 거기서 거주하고 있으니 그리 외롭지 않을 거네. 그리고 북해부는 왜의 본주 북쪽에 자리한 큰 섬인데…….”
향리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최 참령의 말에 집중했다.
발해 조정은 타지에 비해 노비 구성비가 엄청나게 높은 삼남 지역에 주목했다. 그래서 이들 지역의 노비들을 이주시킬 땅을 면밀하게 선택해 배정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본토의 북방 영토는 물론이고, 해외 영토 곳곳에 골고루 조선인 주민을 대거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재산이 있는 양인 계층이야 이주는 선택 사항이지만, 생계를 유지할 재산이 전혀 없는 노비는 발해 정부가 땅을 제공해 준 지역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강제 이주가 아닌데도 결과는 강제 이주와 다름이 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놀랍군요. 그런 땅도 있다니.”
“가 보면 알겠지만, 말도 안 되게 넓은 땅이지.”
“그럼 도대체 얼마나 많은 토지가 배정됩니까요?”
“4인 가족 기준으로 이들이 농사지을 수 있는 최대치의 토지에서 두 배라면 알아듣겠나?”
“예에~?”
향리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선에선 가족 구성원의 노동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넓은 농토에서 농사짓는다고 해도, 그 소출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다들 힘겹게 살아야 했다. 그러나 발해는 달랐다.
“그, 그런데 두 배를 줘 봐야 농사지을 수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걸 할 수 있도록 조정에서 도와주고 있지. 마을 단위로 일할 소와 말을 배정해 주고, 어떤 경우는 기계도 빌려주고.”
“기계요?”
“그건 여기서 말로 설명해 봐야 알지 못할 거네. 직접 봐야 알지.”
향리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도 꽤 많은 재산이 있어 굳이 고향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노비 출신자들이 그런 혜택을 받는다고 하니 갑자기 욕심이 생긴 것이다.
“와아아! 정말 그렇습니까요?”
“헉! 그 넓은 땅을 준다고요?”
주민등록에 응하던 노비들 사이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행정을 담당하는 장교와 부사관에게 직접 질문해서 답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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