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355
355화
전기의 시대 – 에필로그 (3)
서울별부 동구 화평동에 자리한 국립중앙박물관.
이 박물관은 한옥 형태를 석재로 구현한 대형 석조 건물로, 황후 홍은이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작품이었다.
박물관 현관 앞에서 내외빈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간단한 현판식과 고사 의식이 진행되었다. 행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초대 손님들은 이내 박물관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박물관장은 발해대학교 교수 출신 정온이란 인물이었다. 조선에서 이름난 유학자였던 그는 일찌감치 발해로 건너와 허규의 실학을 받아들인 후 역사학에 정진해 발해 최고의 사학자란 평가를 듣기에 이르렀다. 그는 유물과 유적 연구에도 심취해 벌써 유물의 제작 시기를 유추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미래 시대에 비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록물이 많이 남아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박물관 설립 계획이 수립되자, 그때부터 동분서주하며 가치가 높은 유물들을 모아 왔다.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 유물은 물론이고, 고구려와 발해 시기의 유물을 집중적으로 수집했고, 평양과 개성, 한양, 부여, 경주도 다녀왔다. 그 덕분에 시대별로 다양한 유물과 서적, 금석문 등을 모을 수 있었다. 물론 박물관의 품격을 더하기 위해 가장 품질이 좋은 전통 공예품도 수집해 전시했다.
태건은 정온의 안내에 따라 박물관 내부를 둘러보다가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 유물이 보이자 걸음을 멈췄다.
“이건 어떻게 구했소?”
“가보로 전해 오는 가문에서 내주었습니다.”
“음, 묘의 부장품이 아니었군.”
“그렇습니다.”
태건은 이미 전국에 도굴 금지령을 내리고 도굴꾼에게 중형을 선고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당연한 조치였다. 무덤을 뒤지는 짓만큼 야만적인 행위는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고분 정도는 발굴해야 하지 않겠소? 거기야말로 유물의 보고일 텐데. 더구나 이미 도굴된 곳도 많으니 늦었더라도 살펴봐야지요.”
“휴! 그래야 하는데, 학인은 물론이고 일하는 이들도 꺼림칙하게 여기는지라.”
“나라를 위해 나라에서 하는 일이오. 그러니 성대하게 제를 지내고, 발굴을 끝내면 잘 복원해 두면 괜찮지 않겠소?”
“예, 알겠습니다. 나라를 위한 일이니 행해야지요.”
“재정이 더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탁지부 예산이 없으면 내탕금이라도 내어 드리리다.”
“오! 고맙습니다, 기하.”
“앞으로 서울뿐만이 아니라 나라의 도성이었던 모든 도시에 박물관을 세우시오. 그래서 해당 지역에서 발굴하거나 찾아낸 모든 유물을 그곳에 보관하고 전시하시지요.”
태건의 파격적인 조치에 정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그러자면 정말 많은 학인이 필요하겠군요.”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육성하시오. 유물 발굴과 연구 일에 남녀가 구분이 있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정온은 유학자 출신임에도 여성의 학계 진출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발해는 늘 노동력이 부족한 나라였다. 그래서 꽤 오래전부터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결과 대학도 여성에게 문호를 열었다. 남녀유별 의식만큼은 여전하다 보니 여자대학을 설립하는 추세로 나타났다. 여자대학들은 주로 인문학과 의학, 간호학, 섬유공학, 예술 관련 학과를 개설했는데, 여성의 진출이 활발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태건이 뒤를 돌아보자 외부 의전국장이 재빨리 뛰어왔다.
“외국 손님들을 데려오게.”
“예, 기하.”
태건과 거리를 두고 따르던 외국 손님들은 국장의 얘기를 듣자마자 이때다 싶어 활짝 웃으며 태건에게 다가왔다.
“기하, 박물관이 너무 멋집니다. 전시물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헨리 미들턴이 입바른 말을 했다.
“설명을 잘 들었소?”
“예, 학예사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코리아의 역사가 꽤 깊더군요.”
미들턴은 그간 발해와 코리아를 혼용해서 써 왔는데, 박물관에서 쓸 국호로 코리아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태건은 미들턴의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역시 미들턴은 발해의 역사 유물보다 바깥에 널려 있는 신문물에 관심이 더 컸다.
그러나 화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유물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수천 년 전의 유물에서 품어져 나오는 오묘한 느낌이 이들의 정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도자기와 나전칠기, 노리개, 옥기 등 중앙박물관에 전시될 정도로 명품의 반열에 오른 전통 공예품은 더욱 그랬다.
* * *
태화문 앞에 차려진 야외 만찬장.
외국사절단과 조정 대신들은 이곳에서 서로 어울리며 만찬을 즐겼다. 가볍게 반주도 곁들였다. 또한 국립종합악단이 발해 전통 음악과 서양 음악을 번갈아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웠다.
태건과 이하륜, 홍은은 이들과 별도로 궁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태화문 문루로 올라 만찬장을 살펴보았다.
“와아! 외국 사절단을 데려다 놓고 행사하니 참 보기 좋네요.”
이하륜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이런 날도 오네요. 음악까지 더 해지니 꽤 멋진데요?”
홍은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면 태건의 눈빛은 다소 침잠해 있었다. 하륜은 태건을 보며 설핏 미소를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형님. 저들이 상시로 서울을 드나들게 해 달라는 요청을 수락할 겁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초량항에서 엄격하게 심사해서 중요 사절만 방문 허가를 내줘야지.”
“그게 좋겠어요. 그래야 남해부도 키울 수 있고, 우리 산업 기술의 유출 속도도 늦출 수 있으니까.”
“그래도 서울 방문길을 열어 놓은 게 어디에요? 그것만으로 다들 감지덕지해야죠.”
홍은 역시 서울의 개방을 다소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기술의 유출은 의도한 바다. 다만 우리가 주도권을 쥐어야 하니까 전면적으로 개방하지 못하는 거지.”
“이해합니다. 그게 타당한 조치지요. 세상의 문명 발전 속도를 같이 끌어올리는 게 우리 전략이니까. 석탄과 석유 같은 화석연료의 시대를 빠르게 지나야 후유증이 덜하지. 그거 하려고 우리가 여기로 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대화에서 벗어나 다시 봉황광장을 훑어보던 홍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더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아! 그럼 이제 발해는 탄탄대로겠고……. 오빠들! 기분이 어때? 그동안 잘 산 거 같아?”
“뭐야? 뜬금없이. 닭살 돋게.”
이하륜이 익살맞은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오늘은 그냥 감회가 새롭네. 왠지 과제를 다 끝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근데 오빤 왜 대답 안 해?”
홍은이 태건을 향해 대답을 재촉했다.
“뭐, 그렇지.”
“뭐, 그렇지.”
홍은이 굵은 목소리로 태건의 말투를 흉내 냈다.
“황후님~ 국모로서 부디 체통을.”
“됐네요. 여긴 우리만 있잖아? 오랜만에 편하게 놀아 보고 싶어서. 옛날 생각도 나고. 더 옛날 말이야.”
홍은의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침묵에 빠졌다. 다들 과거의 일을 곱씹고 있었다.
어느덧 봉황광장에 어둠이 깃들었다. 만찬도 거의 끝물에 다다랐다. 그런데 경호원들이나 봉황광장에 포진한 호위 병력 중 누구도 불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들 모두가 이를 의아하게 여기고 불을 밝혀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호호! 드디어 오네요.”
홍은이 손을 들어 광장 남쪽을 가리켰다.
안전을 고려한 광장의 통행금지가 풀리자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던 시민들이 광장으로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기척을 알아챈 외국 사절단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때가 되자 경친왕 태원과 남해부 도독 허균이 태화문 앞으로 나왔다. 먼저 허균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내외빈 여러분! 이제 때가 되었소. 오늘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세상에서 최초로 발해가 전기로 불을 밝히게 되었소.”
말을 마친 허균이 옆에 있던 태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원도 큰 소리로 말을 이어받았다.
“태왕 기하와 황후님, 의정대신. 그리고 여러 전기 장인이 선물한 빛이오! 자! 불을 밝히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건흥궁과 태화문, 봉황광장 전체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 * *
“오오오!”
“헉! 이, 이건 뭔가?”
봉황광장에 깔린 어둠을 순식간에 걷어 내는 밝은 빛의 향연에 모두가 경악했다. 수천 개의 전구가 발하는 빛은 너무나 밝고 황홀한 느낌을 선사했다. 호롱불과 촛불에 의지해 살던 이에게 전등의 불빛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밝고 영롱했다.
큰 충격을 받고 웅성거리던 군중들은 이내 태화문 문루에 서 있는 태건과 홍은, 이하륜을 발견했다.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밝았기에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수많은 전등이 발산하는 빛다발은 세 사람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와아아! 태왕 기하, 만세!”
“태왕 기하, 만세!”
“대발해 만세!”
“만세!”
발해 백성은 언젠가부터 ‘대발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커가자 저절로 ‘대’자를 붙이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태건과 홍은, 이하륜은 손을 흔들더니 고개까지 살짝 숙여 답례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연이어 광장 한쪽에서 풍물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북청사자놀음처럼 발해 사회에서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연희패들도 등장해 흥을 돋웠다. 그러자 시민들도 장단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깜짝 야간 축제가 시작된 셈이었다.
“허허허! 정말 장관이오.”
“아, 소름이 돋네요. 이런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다니, 전 정말로 행운을 타고났나 봅니다.”
“꿈만 같소. 발해라는 나라는 사람을 끝없이 놀라게 하네요.”
남포르모사 총독 헨리 미들턴과 필리핀 도독 후안 데 실바, 포르투갈 대표 도밍고스 몬테로 등은 눈앞에 보이는 장면에 흥분해서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 댔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자 미들턴과 실바 총독은 급히 허균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 등불은 왜 이리 밝지요? 어떻게 사람이 불을 켜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불이 들어오는 겁니까?”
미들턴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 냈다.
“저게 전기라고 들었소. 발전소는 국화동에 있고요.”
“전기요? 그게 뭡니까?”
“번개 같은 거라던데..”
“번개? 어떻게 사람이 번개를 쓴단 말이오?”
실바 총독도 질문 공세에 가세했다.
“나도 정확히 모르오. 하지만 우리 발해는 꽤 오래전부터 전기를 만들어 사용해 왔소. 다만 전구, 그러니까 전등을 만들지 못해 불을 밝히지 못했을 뿐이지.”
“예? 벌써 써 왔다고요?”
“여러분이 사가는 제품 중에 전기의 도움을 받은 것도 있어요.”
“그래요? 그럼 그 발전소란 곳을 보여줄 수 있소?”
“글쎄요. 그건 기하의 허락을 받아야…….”
미들턴이 다시 물었다.
“이 전기는 누가 개발한 겁니까?”
“아까 경친왕 전하께서 얘기했잖아요? 저 세 분이라고. 발해에서 가장 높은 분이자 가장 뛰어난 천재분들이죠. 백성들은 또 하늘이 낸 분들이라고 칭송한다오. 허허허!”
허균은 태건을 올려다보며 호탕하게 웃어 댔다.
“이해할 수가 없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전기라니…….”
실바 도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앞으로 발해가 세상의 중심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우리가 배워 가야 할 것투성이요.”
미들턴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남해대학교는 외국인에 문호가 개방되어 있소. 그러니 유학생을 보내시지요.”
허균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서양인 화가들은 아직도 입을 떡 벌린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예민한 시각을 가진 이들답게 다른 이에 비해 더 큰 시각적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낮에 봐도 봉황광장은 시야를 압도할 만한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영롱하게 빛나는 가로등은 광장을 신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런데 여기에 흥겨운 음악과 백성들의 집단적인 춤사위까지 더해지자 충격이 배가된 것이다. 빛과 소리의 거대한 향연이었고 화가들은 이 낯설면서도 황홀한 느낌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렇게 세계 역사상 최초의 전등 점등식과 함께 발해의 심장부, 봉황광장의 밤은 깊어 갔다.
[완결>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