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51
51화. 경성 전투 (1) (지도 첨부)
시원한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자, 가을 향내가 코끝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태건은 문득 그간 잊고 지내 온 기억의 한 자락을 잡으려 손바닥을 슬며시 펴 보았다. 확실히 비슷한 느낌이다. 울긋불긋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가을 단풍이 든 그 계곡,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친구들과 캠핑을 떠났을 때의 그 느낌이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이 신선한 바람의 감각도, 숲에서 새어 나오는 상큼한 가을 내음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시대가 달라졌고, 장소도 함경도 부령의 수성천 계곡으로 바뀌었다. 당면한 상황은 더욱 달랐다. 하지만 계절이 불러일으키는 감각과 감정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거라도 남아 있으니 다행이었다.
이하륜이 다가와 물었다.
“뭐 해요?”
“그냥 멍때리고 있다. 날씨가 더없이 좋잖아?”
태건은 날씨 탓을 했다.
“왜? 옛날 생각나셔?”
“뭐, 대충. 부령은 어떻대?”
“여전히 순왜 토관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대요.”
“그래?”
태건은 걸터앉은 바위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와 조선군 병력은 곧 부령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지금 수성천 계곡은 병사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회령에서 부령까지 거리가 대략 50㎞에 달하다 보니, 태건이 이끄는 병력은 장사진을 이루어 이 비좁은 산길을 행군해 왔다. 그러다 부령에서 불과 한두 시간 거리인, 집결지로 지정된 이곳에서 하룻밤 야영하며 부령 쪽 사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 계곡에 다 모여 있으니 병력이 많아 보이긴 하네요.”
이하륜은 계곡을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전망이 좋은 곳이라 병사들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태건은 성이례와 민유문에게 여진족의 침략에 단단히 대비하라 이르고, 절반에 해당하는 2천여 병력을 회령에 남기고 떠나왔다. 그렇게 회령부 병력 2천 명이 더해져 총병력 수는 무려 4천 5백에 이르렀다.
현재 회령부 병력의 지휘는 이하륜이 맡고 있었다. 다른 부사들이 나섰지만 회령부 군관들이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이하륜에게 지휘권이 넘어왔다. 그 정도로 중앙에서 파견된 변장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했다. 현지 토병과 토관들은 오로지 경흥부 지휘관들만 신뢰했다.
“아직 가토군이 부령에 오지 못한 모양인데, 그럼 경성에 군을 집결시킬 생각일까?”
“아마 그러지 않겠어요?”
“평지성이라 다소 불리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성벽이 높고 튼튼하니, 경성 읍성을 포기하진 않겠지.”
이하륜의 답변에 태건은 어느 정도 수긍했다. 경성 읍성은 미래의 청진과 경성읍 사이, 승암이란 평야 지대에 세워져 있었다.
“대장! 출진 준비를 마쳤습니다.”
정강빈이 언덕으로 올라와 태건에게 보고했다.
“정찰은 충분히 했고?”
“예. 부령까지 깨끗하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출진하세.”
“예. 대장.”
정강빈이 계곡으로 내려가자마자 출진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계곡을 뒤흔들었다.
* * *
태건이 이끄는 토벌군이 부령 읍성에 이르자마자, 성문이 열리더니 성을 지키던 토관들이 갑옷을 벗고 나와 무릎을 꿇었다.
“ 부사 나리. 부령부의 부여정 신첨입니다. 앞으로 목숨을 바쳐 왜적과 싸우겠사오니, 부디 저간의 허물을 용서해 주십시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굳이 해명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회령과 경원의 예를 따라 처분해 주시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는 부령의 장졸들과 부민의 염원입니다.”
비교적 지위가 낮은 토관직인 종7품 부여정이 부령의 책임을 맡고 있다는 점이 이례적이라, 태건이 그 연유를 물었다.
“상관들은?”
“모두 도주했습니다.”
“그럼 그대들은 왜 남았지?”
“아직 피난을 떠나지 못한, 성안에 남아 있는 백성들이 많은데, 다들 역도로 몰릴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라도 남아 백성의 무고함을 고하고자······.”
태건은 신첨이란 자의 용모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덩치에 걸맞게 목소리도 우렁찼다. 마치 또 한 명의 송찬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울러 말을 빙빙 돌리는 일 없이 직설적인데다, 눈이 맑아 보였다.
‘인재다.’
태건은 본능적으로 신첨이 인재라 느꼈다.
“알았네. 회령과 경원부의 예에 따라 처결하겠네.”
“고맙습니다. 나리.”
“모두 일어나라.”
신첨을 비롯한 무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들의 항복으로 이제 부령 또한 태건 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태건은 병력을 이끌고 부령 읍성으로 입성해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아울러 정찰병을 대거 남쪽으로 내려보내 왜군의 동향을 철저히 파악하도록 했다.
태건 병력이 휴식을 마치고 다시 출진 준비를 서두르는 와중에 부령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곳곳에서 수많은 의병과 관병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무산진 소속 관병 200여 명이 합류했습니다.”
현재 무산 지방은 조선인이 거의 살지 않고 있어 실질적으로 여진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두만강 변이 아닌 부령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폐무산진에 관청이 있고, 만호가 임명되어 그 지역을 다스렸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근 마을에서 장정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경성을 비롯한 남쪽 고을에서도 오고 있습니다.”
정강빈이 몹시 고무된 표정으로 보고했다.
“가등청정의 왜군을 파하고, 회령의 반란군을 진압하니 드디어 민심이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송찬황이 반색하며 말했다. 태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원희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원 부사님이 몰려오는 의병을 수습하고 이들의 지휘를 맡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허! 불감청 고소원이올시다. 내가 어찌 마다하겠소.”
“종성과 경흥으로 사람을 보내 무기를 가져오라 전하게.”
태건이 정강빈에게 지시했다. 태건 군은 왜군뿐만이 아니라, 콜칸과 남둘루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꽤 많은 무기를 노획했기 때문에 의병들을 충분히 무장시킬 수 있었다.
“그럼 바로 길을 떠납시다.”
이제 더 이상 출정을 늦출 수 없어, 태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음력 8월, 의주 행궁.
현재 의주 분위기는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승전보가 연이어 들어와 잔칫집을 방불케 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한산도대첩이란 어마어마한 승전보를 선물했다. 당항포, 율포, 안골포 해전과 같은 작은 승리 소식 또한 양념처럼 따라왔다.
육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 현감 황진의 활약으로 이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이치 전투는 곡창 지대인 호남을 지켜 내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사실 한산도대첩에 비할 정도로 큰 의미가 있었다. 대장 권율이 문관이기에, 이치 전투의 승리에 무관인 황진의 지분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도 계속 소소한 승전보를 전해 왔다.
하지만 평양이 문제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은 여전히 평양성에 웅거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바다를 통한 보급이 여의치 못하자,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한 채, 평양성에서 계속 머물렀다.
그 때문에 국왕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승전보보다 턱밑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평양의 동향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명나라에서 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요동병 3천을 보내 줬다. 이에 크게 고무된 조선 조정은 조명 연합군을 결성, 곧바로 평양을 공격했다. 하지만 전멸에 이를 정도로 큰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드디어 함경도에서 소식이 들어왔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함경도 백성과 토관, 토민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왜군 편에 붙는 바람에 대부분의 고을이 가토 기요마사 군에 넘어갔고, 연이어 두 왕자와 여러 신하까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들어온 것이다. 꽤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길이 막혀 장계가 늦게 들어온 것이다.
“이런 쳐 죽일 놈들! 함경도는 정녕 역적놈들의 땅이란 말인가! 어찌 제 나라 왕자들을 묶어 적에게 넘긴단 말인가!”
국왕은 너무나 분노해 군주란 체통도 잊고 욕설까지 내뱉었다. 함경도 대부분의 고을이 왜군 손아귀에 떨어진 것보다, 왕자가 포로가 된 점이 더 참기 힘들었다.
국왕이 서슬 퍼렇게 화를 내자, 경원 부사 원희가 파견한 무관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왕의 분노를 뒤로 하고, 평안감사 이원익이 장계를 가져온 군관에게 물었다.
“정녕 우리 관군은 전멸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해정창에서 크게 패한 뒤,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에 경원 부사는 남은 군사라도 모으려 경원으로 귀임하던 중, 회령의 변고 소식을 듣고 서둘러 장계를 작성해 제게 맡겼습니다.”
“그럼 북병사 오천태는 어디에 있는가?”
“회령으로 피신했다가 같이 붙잡혔다고 들었습니다.”
“어허! 이런······.”
“함경도 전체가 왜적의 수중에 넘어갔다니, 이를 어쩌나?”
신하들은 나직이 탄성을 터트렸다.
“경흥 부사 태건은 뭐 하고 있나?”
정신을 수습한 국왕은 다시 군관에게 물었다.
“변방을 지키는데 진력하라는 북병사의 명에 따라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뭐라!”
국왕은 또다시 화를 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거늘, 제 처소나 지키고 있다고?”
“북병사가 그렇게 명했답니다.”
이원익이 슬며시 오천태의 명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자, 국왕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북병사는 어찌하여 그런 명령을 내렸느냐?”
“그, 그러니까 오, 오랑캐······.”
자신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나오자, 군관은 당황해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전하! 또 다른 장계이옵니다.”
갑자기 도승지 류근이 급히 들어와 국왕에게 새로운 장계를 올렸다. 갑자기 끼어든 도승지의 행동에 국왕이 눈살을 찌푸리자 도승지가 빠르게 해명했다.
“경흥 부사 태건의 장계입니다.”
“뭐라?”
깜짝 놀란 국왕은 재빨리 장계를 펼쳐 빠르게 읽다가, 멍한 표정으로 도승지를 바라보았다. 도승지는 국왕의 예상과 다른 반응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승지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국왕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장계를 재빨리 도승지에게 넘겼다.
도승지가 태건의 장계를 대신 읽어 내려가자, 신하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국왕과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태건은 승전에 대한 상세한 설명뿐만이 아니라 해정창 전투 이후의 모든 상황, 즉 북병사 오천태와 남병사 이영 등 가토 기요마사에게 포로가 된 이들의 명단까지 장계에 상세히 적었다.
신하들은 크게 기뻐하며 국왕에게 간하기 시작했다. 먼저 병조판서 이항복이 나섰다.
“전하!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왜군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가등청정의 대군을 격파한데다, 역적 국경인 무리를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육진 대부분을 회복하고 부령만 남았다고 하니, 곧 부령은 물론 경성까지 능히 탈환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의 공을 치하하고, 태건을 공석인 북병사 직에 제수하소서.”
“소신도 같은 생각입니다. 기세가 오른 경흥 부사 태건에게 힘을 실어 줘, 하루라도 빨리 북도 전역을 탈환해야 합니다. 왜적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역적까지 치죄하였으니, 이 소식이 함경도에 널리 퍼진다면 조정에 등을 돌린 백성과 토병들도 저간의 죄를 뉘우치고 태건을 따라 왜적과 싸울 것이옵니다.”
평안감사 이원익도 이항복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모두의 생각이 같은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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