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56
56화. 변방에 드리운 암운 (2)
묵직해 보이는 월도로 아군 병사의 목을 추풍낙엽처럼 베며 다가오는 장수의 모습이 가토의 눈에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장수는 왜병의 머리를 편곤으로 짓이겨 가며 전진하고 있었다.
맨 앞에서 조선군 기병대를 이끌고 있다 보니, 태건과 송찬황의 무위는 더욱 돋보였다. 후위에 자리한 왜병들은 이들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보고 더욱 두려움에 휩싸여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갔다.
“큭!”
가토는 어깨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위쪽을 바라보았다.
젊은 조선 무장 하나가 활을 든 채 그를 보며 이빨을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그를 화살로 적중시킨 장수는 부령 출신 토관인 신첨이다.
“어휴! 아깝네.”
신첨은 편전으로 가토를 노렸다. 그 덕분에 가토의 갑옷을 뚫는 데 성공했지만, 치명적인 부위를 맞추지 못한 점을 너무나 아쉬워했다.
가토는 이미 방패에 둘러싸인 채,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전방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도 적의 측면을 추격하며 공격한다!”
“예, 대대장!”
하위 무관들이 병사들을 지휘해 나갔다. 그 역시 다시 애깃살을 통아에 매기고 다음 목표물을 찾았다.
며칠 전, 태건이 자신을 불러 북쪽에서 내려온 회령 병력 600명의 지휘를 맡겼을 때, 그는 뛸 듯이 기뻤다. 그간 원희 휘하 우군에 소속되어 제대로 활약하지 못해 답답해하던 차였다. 첫날 화살을 열심히 쏴서 왜병 몇 명을 죽인 게 전공의 전부였다.
‘지금부터 자넨 중군 소속이다. 우리 경흥부 군은 500여 명을 이끄는 장수를 대대장이라 하지. 그러니 그대가 임시 대대장이 되어 이들을 이끌어 주게.’
아울러 태건은 그에게 곧바로 임무를 하달했다. 김성이 이끈 별동군 제7대대와 함께 생기령 계곡으로 은밀히 이동, 적당한 지점을 골라 매복해 있다가 가토 군이 나타나면 기습하란 지시였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왜군과 검을 맞대지 말고, 울창한 숲에 의지해 끈질기게 괴롭히란 지시도 받았다.
‘북쪽에서 증원군이 도착하길 기다리느라, 지금까지 공격하는 척하며 시간을 끈 거였네.’
태건은 신첨이 맡은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해서 얘기했다. 성내 왜병의 수와 조선군의 수가 비슷하다 보니, 본대에서 병력을 빼서 매복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령을 보내 전지로와 김성을 호출한 것이다. 하지만 전지로의 제6대대가 회령에 남았기에, 그들을 대신해서 온 회령 병력을 그간 눈여겨보아 둔 신첨에게 맡긴 것이다.
신첨의 부대는 숲속을 누비며 계속 왜군에게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약속된 지점에 이르자 신첨은 효시를 발사했다.
휘이이이!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계곡을 울리자, 더 앞서 나가 있던 병력이 언덕에서 바위와 통나무 같은 육중한 장애물을 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커헉!”
운 나쁘게 선두에 섰던 왜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통나무와 바위에 무참히 깔려 죽었다. 그러자 왜병들은 부관들의 지시에 따라 서둘러 장애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사이 신첨과 김성이 이끄는 매복군 병력은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왜군을 괴롭혔다.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한 왜군 선두 대열이 겨우 장애물을 통과했을 무렵, 태건이 이끄는 조선군 기마대가 왜군의 중간 열을 덮쳤다. 후미는 이미 조선군에 의해 전멸된 상태였다.
이제 태건의 중군 소속 기마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수들도 나섰다. 후속하던 부대의 지휘를 부장들에게 맡기고 이들은 빠르게 태건의 뒤를 쫓았다.
그간 도망 다니기 바빴던 변장들도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부사와 첨사, 만호들은 활과 검으로 왜병을 차근차근 척살해 나갔다.
“후후! 끝났군.”
신첨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승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자! 우리도 가자!”
어차피 화살이 떨어졌기에 이제 태건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언덕을 달려 내려가 왜군의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왜군 진영을 관통해 온 태건이 신첨의 시야에 들어왔다. 태건은 얼마나 많은 왜병을 처치했는지 온몸에 피 칠갑한 상태였다. 그의 말 또한 피를 뒤집어써 온몸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신첨은 태건의 모습을 보고 무인으로서 온몸에 전율이 이는 걸 느꼈다. 그에게 태건은 전신이었다. 태건은 여전히 월도를 휘두르며 왜병을 척살해 나갔는데, 그 기세가 너무나 흉흉해 그마저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태건은 문득 행동을 멈추더니 일본어로 크게 고함쳤다. 항복하라는 짧은 문장이었다. 그러자 왜병들은 즉시 무기를 내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 * *
조선군은 전장을 수습하고, 생기령 계곡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정찰대는 쉴 새 없이 가토 기요마사의 군을 추적하며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완벽한 승리입니다. 아군의 경우 부상자만 몇 명 나왔을 뿐이고, 살아서 계곡 반대편 주을온보로 빠져나간 왜병의 수는 천오백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아울러 포로로 구백여 명을 잡았고, 군마도 약 오십 필을 노획했습니다. 적 사상자는 순왜 조선군까지 합쳐 이천오백 정도로 추정됩니다.”
참모장 이하륜이 중간 집계된 전과 보고를 하자, 휘하 장수들과 변장들은 크게 환호성을 터트렸다.
“허허! 정말 통쾌한 승리였소. 내 평생토록 오늘 이 전장에서 있던 일을 잊지 못할 것이오.”
종성 부사 정현룡이 활짝 웃으며 반응했다.
“어쩜, 나까지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소? 아무도 모르게 이 숲속에 복병을 배치하다니요. 뭐, 사실 나도 뭔 수가 있겠거니 하고 은근히 기대하긴 했지.”
원희은 태건의 전략에 몹시 탄복했다.
“이 두 장수의 힘이 컸습니다.”
태건은 김성과 신첨을 불러 수뇌부 인사들 앞에 세웠다.
“경흥과 부령의 무관입니다. 이들이 임무를 잘 수행해 준 덕분에 이길 수 있었지요. 이들의 전공을 잘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급 무관인 김성과 신첨은 졸지에 많은 병력을 지휘하고 큰 전공까지 세운 터라,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암요. 내 이들의 전공을 살펴 빠짐없이 기록해 두겠소.”
북평사 정문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현재 조선군 진영에 있는 유일한 고위급 문관이라, 정문부가 태건을 대신해 그간 군영에서 있던 일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자, 그럼 바로 출발합시다. 가등에게 틈을 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최대한 가까이 따라붙을수록 더 많은 고을을 탈환할 수 있어요.”
“그럽시다. 그럼 우군 중 일부를 이곳에 남겨 전장 정리를 마저 끝내게 하고, 보급로 유지도 맡기겠소. 그런데 왜병 포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끌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생각해 둔 바도 있고.”
태건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이곳이 있는 이들 대부분이 변장들이라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추수철이 된 데다, 가토가 여진족을 자극해, 변방 전체가 위험한 상태였다.
“왜병을 회유해 활용할 생각이군요.”
“그렇습니다. 성공한 전례도 있으니 또 시도해 봐야지요. 얼마 전 그들이 회령에서 큰 전공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음, 그럼 가면서 저들 상태를 좀 봅시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조선군은 다시 남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 * *
함경도 길주 읍성.
왜군이 경성에서 태건 군에게 패하지 않았다면 본거지로 삼았을 곳이다. 하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군이 바짝 따라붙은 데다 구원군도 아직 먼 곳에 있어, 명천에 이어 길주마저 포기해야 했다. 그로 인해 명천을 지키던 순왜 정말수와 그의 추종자들도 가토를 따라 남쪽으로 도주했다.
가토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경성을 다스리던 국세필 역시 생기령 전투에서 살아남아 향도 역할을 자임하며 동행 중이었다. 하지만 순왜 토병들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흩어져 이들 곁엔 측근 몇 명만 남아 있었다.
“와아아! 온다! 우리 육진군이다!”
길주 백성들은 태건 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성 밖으로 나와 있다가, 이들의 모습이 보이자 환호성을 터트렸다. 특이하게도 백성들은 태건이 이끄는 병력을 조선군이 아닌 육진군이라 특정해 부르고 있었다.
“아, 저분이 태건 장군? 정말 젊구나.”
“세상에··· 정말 훤칠하니, 인물은 인물이네.”
“풍채를 보게. 북방의 호랑이라더니 헛소문이 아니었어.”
“아, 그런데 갑옷이······.”
“다들 그렇군. 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조선군은 변변한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왜군을 바짝 추격하느라, 몰골이 형편없었다. 태건도 그랬다. 갑옷과 말안장은 여전히 피로 얼룩져 있고,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백성들은 이 모습을 보고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이들의 눈길은 태건에서 떠날 줄 몰랐다.
국왕이 파견한 순찰사 윤영도 수행원들과 함께 백성들 틈에서 육진군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간 적진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중앙에서 파견 나온 관리만 보면 함경도 백성들이 붙잡아 왜군에 바친다는 얘길 들었기에 변복한 상태였다.
“허! 백성들이 태건을 마치······.”
그는 불경스러운 생각이 들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 보이는 대로 붙잡아 적에게 넘기고, 누군 저렇게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고. 참으로 씁쓸한 일이로다.”
“이제 저들을 대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행원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행원은 명령이 떨어지자 태건 앞으로 나가 행렬을 막아섰다. 그로 인해 일시에 조선군 행렬이 멈췄고, 말들도 놀라 투레질했다. 이에 당사자인 태건은 물론, 길주 백성들도 깜짝 놀라 그 수행원을 주시했다.
“주상 전하께서 순찰사를 보내셨소. 다들 예를 갖추시오.”
“뭐? 주상 전하?”
“순찰사는 뭐 하는 작자야?”
“아무튼 조정에서 사자를 보냈다는 거잖아?”
“에고! 또 우리 태건 장군께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나.”
“아니, 그렇다고 왜적을 쫓아 행군 중인 군을 막아? 저 잡놈들을 그냥!”
주민 중에 성격 급한 자는 팔을 걷어붙이고 수행원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이들이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는 가토군이 불과 반나절 전 처참한 몰골을 한 채, 길주를 지나는 장면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 장면만으로도 이들은 태건이 이끄는 육진 군이 왜적에게 대승했고, 조선군이 이들을 추적 중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태건이 순순히 말에서 내리자, 이들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태건은 순찰사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의주 행재소를 다녀온 군관 장호가 그곳 분위기를 자세하게 전달해 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자를 구출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는 사실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또 태건은 순찰사 윤영이 누군지도 이미 파악했다. 군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는 백성 무리 속에서 유난히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자가 있어 아까부터 눈길이 갔더랬다.
태건이 그에게 다가가 군례를 올렸다.
“경흥부 도호 부사 태건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수행원이 나섰을 때, 순찰사 윤영은 그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함경도 민심의 실체를 비로소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길주 백성의 적대적인 반응에, 그는 두려움에 잠식되어 앞으로 나서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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