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68
68화
하륜방적기 (1)
선조 26년, 서기 1593년 음력 1월, 북청 읍성.
어느덧 해가 바뀌어, 이제 왜란 2년째였다.
신임 경흥부 부사 정강빈이 무려 삼천여 병력을 이끌고 북문 앞에 도착하자, 상갓집 같던 북청 분위기가 크게 달아올랐다. 관찰사 윤영과 남병사 원희도 오랜만에 웃음을 되찾았다.
하지만 맞아 주는 이들의 반응과 다르게, 육진군 장졸들의 태도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북청 주민과 남부군 지휘관들을 휘둘러보며 묵묵히 걸어 들어왔다.
행색도 말이 아니었다. 강추위에 시달리고, 폭설로 막힌 길을 뚫으며 행군해 온 터라, 심신이 몹시 지쳐 보였다. 다들 동상은 물론,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어 얼핏 보면 패잔병을 보는 듯했다.
태건은 육진군의 몰골을 보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강빈은 윤영과 원희와 잠깐 얘길 나눈 다음, 태건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수고 많았네.”
“병사들이 정말 고생했습니다. 그나마 화포를 끌고 오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근데 남부군 병력이 매우 적어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태건 군은 이미 화포를 보유하고 있어, 후발대까지 굳이 화포를 끌고 올 필요는 없었다.
“천 정도만 남았지. 나머지는 다 떠났고.”
“역시…….”
“알고 있었나?”
“예. 오면서 들은 소문이 꽤 험악했습니다.”
“무슨 소문?”
“조정이 함경도 백성을 혐오해서 엄동설한에 방한복도 주지 않고 전장에 내보냈다. 그 결과 왜적과 싸워 보지도 못하고 얼어 죽은 의병이 태반이다. 그래서 다들 살려고 군문을 떠났다. 뭐,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도는 것 같습니다. 탈영한 의병들이 대거 소문을 퍼뜨린 것 같습니다.”
“후후! 절반은 맞는 말이군. 의도야 어떠하든 사실이니까. 더구나 관병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나선 의병들을 그렇게 대했으니, 그런 소문이 돌아도 할 말 없지.”
“어명이 내려왔군요.”
“그렇네.”
태건은 그간 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북청으로 철수한 다음, 윤영이 장계를 올리자 조정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기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국왕의 성격상, 자신의 졸속 명령으로 인해 의병들이 흩어지고 동사했다는 보고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거듭 출전하라는 명령을 내려, 남부군과 태건의 육진군은 출전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두 차례 나갔다 돌아오고 보니 남부군에서 남은 병력은 관군 천여 명뿐이었다. 의병의 대부분이 흩어진 것이다. 그러나 태건의 육진군은 사기가 높아, 그런 사달에도 끄덕하지 않고 잘 버텨 냈다.
“정말 너무하네요.”
신중한 성격의 정강빈도 결국 국왕을 원망하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정강빈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병력을 차출해 남쪽으로 내려오라는 지시를 받자마자, 그는 이미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행군 중에 겪은 그간의 악전고투가 고스란히 왕에 대한 분노로 변했다. 그만 그런 게 아니었다. 육진군 장졸 모두가 왕명으로 인해 생고생하고 있단 사실을 알고, 다들 이를 갈며 내려왔다.
“한 달만, 아니 보름만 늦췄어도 덜 고생했을 것을…….”
이제 겨울의 막바지에 이른 시기라, 조금만 출진 시기를 조정했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으리라. 결국 국왕의 불합리한 명령 때문에 육진군과 남부군 모두 한겨울에 쉬지도 못한 채, 병력만 손실한 셈이었다. 제대로 싸운 적이 없으니, 왜군 진영은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
“이번에 선을 많이 넘었어. 함경도 민심이 원래 폭발 직전의 화약고와 같았는데, 거기에 불을 지핀 셈이니.”
태건도 한동안 몹시 답답해했다. 원래 겨울 동안 육진에 머물며 내정에 힘쓰고, 또 그간 미뤄 뒀던 신기술 개발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국왕의 고집으로 인해 아무런 성과 없이 겨울을 통째로 북청에서 보내야 했다.
태건이 앞서 데려온 육진군 병력도 고통을 겪긴 마찬가지였다. 동상에 걸린 이도 많았고, 감기와 몸살이 심해져 병사한 이도 몇몇 있었다. 그때마다 태건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삭여야 했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심상치가 않습니다.”
“함경도 백성이 의병에 대거 참여한 건, 조정과 화해하기 위함이었지. 왜란이 일어나며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손길을 조정이 스스로 거부한 모양새가 되었어.”
“그렇군요. 오히려 따귀를 때린 셈이군요.”
정강빈도 그가 막연히 심각하다고 느낀, 민심의 실상에 대해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선전관이군.”
선전관이 헐레벌떡 태건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예? 선전관이 와 있습니까?”
“한참 전에 도착했는데, 우리 북병영 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을 피우더군. 홍원을 향해 출진하는 모습까지 보고 갈 생각인 모양이야.”
“세상에 그런 명을…….”
정강빈은 국왕의 처사에 혀를 내둘렀다.
* * *
선전관의 닦달에 결국 육진군과 남부군은 서둘러 홍원을 향해 출진했다. 충분히 쉬지 못한 육진군은 물론이고 이제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은 남부군의 사기가 바닥을 쳤으나, 왕명이 떨어진 마당이라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뒤숭숭한 여정이었다. 날이 전에 비해 많이 풀렸다 해도 여전히 산길은 엄동설한이나 마찬가지로 꽁꽁 얼어있었다. 장수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려 자주 휴식을 주고, 불도 계속 피울 수 있게 했다. 그래서인지 이제 병사들도 더 이상 애꿎은 상관에게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틈만 나면 모닥불 앞에 모여 왕을 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문령에 이르자, 태건과 원희는 다시 병력을 멈춰 세웠다.
“여기만 벌써 네 번째군.”
원희는 눈 덮인 대문령 풍경을 휘둘러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어명을 받드는 시늉을 하려면 최소 대문령까지는 와야 했다.
두 사람을 향해 관찰사 윤영이 다가왔다.
“왜 멈췄소?”
“정찰병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요? 음, 이번엔… 어떻게 괜찮겠소?”
그가 태건에게 물었다.
“우리 병력도 이제 육천에 이르렀으니 맞서 싸우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라, 더욱 신중하게 계책을 마련해 싸워야지요.”
“그렇지. 사기가 좀 떨어지긴 했지.”
윤영 역시 보는 눈이 있어 병사들의 상태가 안 좋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잠시 후, 정찰병들이 돌아와 보고하자 태건을 비롯한 장수들은 지도를 놓고 한참을 고심했다. 왜군은 홍원 읍성 동쪽에 있는 송현 고개에 주력을 배치해 둔 상태였다. 그곳이 읍성으로 통하는 외길이기 때문이다.
“북쪽 학산에 오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태건은 결심을 굳히고 자기의 생각을 밝혔다.
“험한 데 괜찮겠소?”
“내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오르겠습니다. 화포병을 포함해서.”
“화포병까지?”
원희는 적잖이 놀랐다. 길도 없는 눈 덮인 산을 화포까지 운반해 오르겠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학산에 오르기만 하면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으니 효과가 좋을 것 같긴 한데.”
“희생을 줄이자면 그 수밖에 없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렸다시피 방어진이 단단히 구축된 송현 능선을 향해 돌격하는 건 그냥 장졸들의 목숨을 적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지요. 더구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병사들이 돌격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음. 그건 맞는 말이오.”
태건은 원희가 동의하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는 경흥부 별동군 병력 2천을 이끌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중턱에 이르자, 태건은 송찬황에게 지휘를 맡기고 자신은 진태종, 정강빈과 몸놀림이 날랜 갑사 몇 명을 뽑아 앞서 나아갔다. 왜군 정찰병이나 경계병을 먼저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태건은 능선에 설치되어 있는 왜군 정찰 초소들을 차례로 처리한 다음, 정상에 올라 홍원 읍성 주변을 살펴보았다. 읍성은 이곳 학산과 남쪽의 남산 사이에 자리했는데, 읍성 내에 남아 있는 왜병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자 송찬황이 이끄는 별동군 병력이 능선에 도착했다. 눈 덮인 산을 오르느라 다들 고생한 티가 역력했다. 특히 화포병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태건은 이들을 이끌고 남쪽 능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왜군 주력이 포진되어 있는 송현과 홍원 읍성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기 위함이었다.
목표 지점으로 생각한 곳에 다다르자, 태건은 즉시 화포와 편전을 준비시켰다.
“쏴라!”
태건의 신호에 따라, 화포들이 일제히 송현을 향해 불을 뿜었다. 아울러 사수들도 편전을 쏘기 시작했다.
* * *
의주에 또다시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국왕도 몹시 기뻐할 만한 소식이었다. 바로 조명 연합군이 악전고투 끝에, 고니시 유키나가 군과 싸워 결국 평양성을 탈환한 것이다.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명군 43,000여 명이 지난달 음력 12월 원군으로 왔고, 이에 조명 연합군을 결성해 드디어 평양성을 공격한 것이다.
조선 측은 평안도 도제찰사 류성룡과 도원수 김명원, 경상도 순변사 이일이 지휘하는 관군 8천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병 3천이 가세했다.
국왕은 오랜만에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경들의 수고는 물론이거니와 대명국 황제의 은혜가 끝이 없으니 뭐라 할 말이 없도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평양을 수복했으니 바로 신들이 어가를 받들어 정주로 진주함이 마땅치 않습니까? 민심이 이와 같으니 헤아려 주소서.”
성격 급한 신하가 일단 정주로 옮기자고 간했다.
“패주한 적군이 어디 있는지 보고, 천천히 의논해서 처리하는 것이 타당할 듯한데?”
국왕은 자신의 안전과 연관된 일이라면 항상 신중했다. 하지만 다른 일은 그렇지 못했다.
“평양을 비록 수복했다 하더라도 북방의 적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될 터. 그러니 반드시 명군이 넘어가 협공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명군이 왜적을 토벌한다 해도, 사로잡힌 왕자들을 구해 낼 계책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나?”
북방의 적이란 함경도의 가토 기요마사 군을 말함이다. 평양성을 되찾자마자 국왕은 아들들이 생각난 것이다.
“북병사와 남병사에게 북도의 왜적을 치란 어명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왜장 가등도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양쪽으로 협공받을까 두려워 군을 물릴 겁니다.”
이원익이 답하자 국왕의 표정이 다시 구겨졌다.
“참으로 무능한 자들 아닌가? 과인이 여러 번 독촉했는데도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가등 군을 아직도 몰아내지 못하다니. 더구나 왕자들을 구하라 몇 번이나 말했는가? 이제 대국의 후은을 입어 평양성을 되찾았으니, 북도 병력이 가등 군을 물리친다 해도 명군의 덕을 봐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국왕은 아예 함경도 관군이 승리한다 해도 인정하지 않을 태세였다.
“전하! 지금쯤 가등 군과 한창 싸우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좋은 소식이 오길 기다리소서.”
이항복은 시간 순서를 왜곡해 미리 태건의 공을 감하려는 국왕의 의도에 슬쩍 일침을 놓았다. 그는 육진 병력이 합류한 이상,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예측했다. 또 국왕 역시 그걸 알기에 명나라의 덕을 본 것이라며 사실을 미리 왜곡해 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