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93
93화
서토 정벌 (1)
새로운 전장이 된 건가퇴 북부 지역에 자리한 흥안성.
태건이 이끄는 조선군 대군이 합수동과 지인동, 양수동을 차례로 지나 계속 서진하고 있다는 정찰병의 보고가 들어오자, 쿠알라 부락의 대추장 뇨후트 울도구는 건가퇴 지방에 주둔 중인 병력마저 모두 흥안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래서 전체 병력이 무려 오천에 달하게 되었는데, 이중 뇨후트 휘하에 있는 병력이 삼천이고, 나머지는 다른 니마차 군소 부락에서 뽑혀 나온 장정들이었다.
동남쪽 용두산성에서 농성 중인 부대는 건가퇴 평원의 동북쪽 구릉지로 이주한 니마차 부락과 지난번 육진 공략전에 참전했던 와르카 부족이 연합해 이뤄진 병력이었다.
뇨후트는 북문 문루에 올라 성의 서쪽을 흐르고 있는 연집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결국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휴! 벌집을 건드린 꼴이군. 젠장!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원…….”
니마차 부족을 대표하는 강력한 세력가 중의 하나인 그였다. 그러나 이제 본거지도 잃고 병력도 많이 잃어, 몰락 직전에 이른 처지가 되었다.
물론 욕심 때문이었다.
아무리 거리가 멀다고 해도 경험상 남쪽으로 파병하여 조선의 육진을 털면 얻는 게 많았다. 재물은 물론이고, 다른 동해 여진 지방에서 구하기 어려운 질 좋은 옷감과 농기구, 식량, 무기류에 노예까지 원정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조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와르카 부락이나, 이웃한 워지 남둘루 부락을 꼬드겨 같이 노략질하곤 했다.
그런 와중에 왜군이 육진을 헤집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데다, 동량개 부락의 이라대가 먼저 같이 조선을 치자고 손을 내밀었다. 뇨후트는 크게 기뻐하며 많은 전력을 이미 건가퇴로 내려보냈고, 약탈에 참여도 했다. 그 결과,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태건이란 자가 문제였어. 제길!”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비상식적인 실력을 보여 준 상대방 탓을 했다.
부하들도 그의 뒤에 서서 우울한 눈빛으로 그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추장 뇨후트가 뒤를 돌아보더니, 부하들에게 물었다.
“이길 수 있으리라 보나?”
부하들은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것 보라고! 우린 오천이나 되는 데다, 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이 없나?”
“자, 자신 있습니다.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부하 하나가 그가 원하는 대답을 했다.
부우우우!
“저, 적이 나타났습니다!”
뿔나팔 소리와 동시에 태건 군 선두가 북쪽 벌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런! 남쪽에도…….”
“뭐? 남문 쪽에도?”
뇨후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정찰병은 뭐하고?”
“적 정찰대에 잡힌 모양입니다.”
“이런…….”
그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아란카는 어떤 상황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냈다. 태건 군이 먼저 기병을 풀어 동쪽으로 우회한 다음, 연락망을 차단한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아란카는 그런 생각을 하다 깜짝 놀라 동편 성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 그곳에도 적이 나타났다는 신호기가 올라와 있었다.
“헉! 도, 동쪽에도 놈들이…….”
“뭐? 이런… 그럼 포위당한 건가?”
성의 서쪽으로 연집강이 흐르고 있으니, 사실상 포위당한 셈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뇨후트의 안색이 급격히 파리해졌다. 비록 태건 군에 비해 다소 적더라도, 오천여 대군이 있어 어떻게든 수성할 자신이 있었다. 포위당하는 상황도 이미 가정해 두었다. 그런데 자신이 인지 못하는 사이에 태건 군이 신출귀몰한 움직임을 보이며 순식간에 성을 둘러싸자 당혹감을 느꼈다.
아란카는 계속 동쪽을 주시했다.
흥안성이 자리한 이 지역은 전체적으로 밋밋한 구릉지라 할 수 있는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연집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흥안성은 강변 둔덕에 세워진 성으로 주로 북쪽에서 오는 적을 상대할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동쪽 지형은 다소 높은 구릉지라, 성벽도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동쪽 성벽 너머, 다른 곳의 지형이 더 높다는 데에 있었다.
펑! 퍼펑! 펑!
아란카의 불안감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태건 군, 제1연대와 제2연대 소속 화포 부대가 동쪽 구릉지에 화포를 방열하더니 곧바로 포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 이런…….”
포격 소리에 놀란 뇨후트도 동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포탄이 성벽에 작렬하는, ‘퍽퍽’거리는 소리가 폭음과 함께 들려왔다.
펑! 퍼펑!
하지만 곧이어 성안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의 비명도 폭음에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격진천뢰 때문이었다.
* * *
함경도 안변부의 학성 산성.
안변부 관아로 들어가지 못해, 남부군은 여전히 산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안변부 주민 상당수가 북방으로 이주차 떠나는 바람에, 치안은 좋아졌으나 관찰사 윤영에 대한 악평이 더욱 널리 퍼진 게 문제였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윤영이 계속 산성에 머물기를 고집했던 것.
“으헉!”
윤영은 악몽을 꾸다가 깜짝 놀라 깨어났다. 간밤에도 악몽으로 잠을 설치는 바람에, 잠깐 낮잠을 잤는데 또 꿈을 꾼 것이다. 요즘 들어 하루도 빠짐없이 눈만 감으면 악몽이 엄습해왔다.
“휴! 오늘도… 변함이 없군.”
그를 괴롭히는 악몽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했다.
어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며 국왕이 보낸 선전관에게 사약을 받거나 목이 잘리는 꿈을 비롯해, 태건이 시퍼런 안광을 쏘아 대며 칼을 든 채 다가오는 꿈도 꿨다. 그런데 특이하게 태건이 나오는 꿈에서 그에게 칼을 맞은 적은 없었다. 다만 그 공포감의 강도가 너무나 크다는 게 문제였다.
가장 끔찍한 악몽은 죽은 병사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지난겨울에 얼어 죽은 병사들이 소름 끼치도록 징그러운 몰골로 나타나 몸을 난도질하곤 했다. 또 비참하게 죽은 북병사 오천태처럼, 잠을 자던 방에 불이 나서 불에 타죽는 꿈을 꾸기도 했다.
“대감. 접니다.”
“드시게.”
그의 기분과 다르게 원희가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왔다.
“대감, 드디어 한양을 되찾았답니다.”
“오오! 그래요? 허허허! 참으로 다행이군. 누가 탈환했지?”
“흠, 그게… 왜군이 그냥 물러났답니다. 왜장 소서행장과 명의 심유경이 합의했지요. 철수하는 왜군을 공격하지 않는 조건으로..”
“어허! 놈들을 그냥 보내 줬단 말인가?”
“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할까 봐, 명군이 아예 왜적을 보호했답니다. 게다가 포로가 된 임해군은 물론, 명의 심유경이 왜군 진영에 있는 바람에 공격할 수 없었다네요.”
음력 4월 19일, 한양에 집결한 5만여 왜군은 협상을 담당한 명의 심유경이 자원해서 볼모가 되어 준 덕분에 전력을 보존한 채 물러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권율 군이 한양에 입성했다.
왜군이 철수를 결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인해 더 이상 해로를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없게 된 점이 무엇보다 컸다. 여기에 더해 왜군 병력이 10만이나 줄어든 점, 행주대첩의 패배, 양주의 수락산과 불암산 부근 노원평에서 고언백과 사명당이 이끄는 병력에게 패배한 점 등도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황진 장군의 활약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간 계속 전공을 세워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지위에 오른 황진은 안성전투에서 대승, 왜군이 주둔했던 죽주산성을 점령한 데 이어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해 대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퇴로가 완전하게 봉쇄될 위험에 처한 데다, 그나마 남아 있는 남쪽의 육지 보급로마저 위태로워지자 결국 왜군은 퇴각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도성을 탈환해 다행이오. 이제 병력 운용에 여유가 생길 수도 있겠군. 그럼 이곳으로 증원군을 보내 주지 않겠소?”
“그럴 수도 있겠지요.”
도성 탈환을 두고, 윤영이 기뻐한 이유는 바로 증원군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언제 가능할지 알 수는 없었다.
이제 윤영의 적은 더 이상 태건이 아니었다. 바로 여민단이었다.
단천 주둔군을 통해 군량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자, 여민단 측은 과감히 병력을 늘려 그 수가 무려 이천에 달하게 되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이당과 이붕, 강경우는 아예 군을 이끌고 남하해 홍원과 함흥을 차례로 장악하더니, 태건처럼 ‘함남 여민자치부’를 선포했다. 함경도 백성과 함께하는 자치 정부란 뜻이었다.
여민단 산하에 들어간 고을은 이성과 북청, 홍원, 함흥으로 벌써 네 곳에 이르렀다. 이들 중 남병영이 자리한 북청과 함경도 감영이 자리한 함흥, 이 두 개의 큰 고을이 포함되어 있으니, 벌써 세력화에 성공한 셈이었다.
윤영은 여민단을 토벌할 병력을 보내 달라고 장계를 올린 바 있다. 물론 조정은 보낼 병력이 없어,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다.
“산성에 몇 달째 웅크리고 있는 우리 군에 대해 조정에선 어떻게 생각하겠소? 난 정말 후환이 걱정되네. 군량만 축내고 있으니.”
원희는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윤영을 바라보았다. 산성에 틀어박혀 있자고 고집부린 이가 할 말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관아로 내려가시지요. 가서 징병이든 모병이든, 뭐든 해야 나중에 조정에 할 말이라도 있을 겁니다. 도성까지 탈환했으니 이제 우릴 바라보는 눈도 많아질 겁니다. 우리 남병영 군이 백성들 해코지가 무서워 산성으로 도피했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 과연 주상께서 대감이나 저를 가만 놔두겠습니까?”
평소에 원희가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도성 탈환이란 큰 사건까지 겹치고 보니, 윤영의 귀가 솔깃해졌다.
“휴! 알았소. 이제 내려갑시다.”
“잘 생각하셨소. 그럼 바로 채비하겠습니다.”
원희는 윤영의 생각이 바뀔까 무서워 재빨리 방을 나가더니 부하들에게 하산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틀 후, 선발대가 먼저 내려가 관아에 자리를 잡았다는 연락이 들어오자, 윤영과 원희도 호위 병력을 이끌고 산성을 나섰다.
“날씨가 참 좋군. 지금이 늦봄인가, 초여름인가?”
“모호한 시기죠.”
오랜만에 성을 나온 덕분에 윤영의 기분이 몹시 가벼워졌다.
“숲도 참 싱그럽군. 가서 오늘 저녁엔 술이나 한잔… 컥!”
쉭쉭!
“큭! 커헉!”
갑자기 숲속에서 편전이 날아왔다. 첫발은 윤영의 가슴을 꿰뚫었고, 두 번째 화살도 그의 복부에 적중했다. 그리고 마지막 화살은 정확히 윤영의 미간에 박혔다.
놀라운 솜씨였다.
“누구냐!”
갑작스런 변고에 모두가 몸을 바짝 엎드렸다.
“이쪽으로 모여! 대감을 보호하라!”
원희는 고함을 쳐서 병사들을 모으려고 했다.
“도, 도망간 듯합니다.”
군관 하나가 재빨리 주위를 휘둘러보고, 즉시 보고했다. 그의 말대로 숲속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원희는 황급히 윤영의 상태를 살폈다.
“대감!”
볼 필요도 없었다. 이마에 꽂힌 편전과 두 눈을 부릅뜬 채 굳은 얼굴을 보니 그대로 절명했음이 분명했다.
원희는 윤영의 시신을 놓아둔 채 벌떡 일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범인은 최소 셋이고, 솜씨가 뛰어난 자다! 빨리 찾아라!”
군관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원희의 명령을 전달하자, 병사들이 건성으로 답했다.
“예, 예. 그럽죠.”
“그려, 범인분이나 찾으러 가세.”
“뉘신지 모르지만, 솜씨가 참 실하구먼그래.”
숲으로 들어가는 병사들의 입꼬리가 하나같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