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0
– 10화에 계속 –
10화 결단(決斷)
중전이 천연두 균이 있는 물건을 보내 완화군에게 역병을 옮기려 했다.
현재로선 심증뿐이지만, 이선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찌 보면 독살보다 더 뒷말이 나오지 않을 방법이었다. 세자도 걸릴 만큼 천연두는 위아래가 따로 없는 질병이고, 한번 걸렸다 하면 치사율이 높았다. 완화군이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하면, 이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중전마마, 나 하나 죽이자고 완화궁의 사람들을 다 전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택했습니까? 참 지독하시구려. 그렇다면 더더욱 순순히 죽어 줄 순 없지요.’
참으로 지독한 방법이었다. 전염병인의 특성상 완화군만 죽는 게 아니라, 천연두 항체를 보유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전멸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겉으로는 고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속으로는 참으로 무서운 칼을 품고 있군. 구밀복검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이선은 불과 얼마 전, 중전을 만났던 걸 떠올렸다. 뜻밖에도 중전은 완화군을 환대하여, 그 자신도 의아하게 여겼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시점이지?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다면 진작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 순간 이선은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자가 천연두에서 회복했구나! 세자가 병약하니, 중전은 그동안 차마 나를 해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세자가 잘못되면 왕자는 나와 의화군만 남으니까. 중전도 왕실의 후계를 끊어 놓을 순 없었겠지.’
현재 남아 있는 왕자는 완화군(13세), 세자(7세), 의화군(4세)이다.
이미 4남 1녀 중 세자를 제외하고 모든 자식을 잃은 중전은, 다시 자식을 낳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더 이상의 자식은 없었다.
중전 민씨는 냉철한 여자였다. 만약 세자가 회복되지 못했더라면, 중전은 자신의 완화군의 법적 어머니임을 내세워 운현궁에서 떼어 내 후계자로 육성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세자가 죽을 경우에 대비해 종사를 위해서라도 나를 남겨 놓아야 했지만, 천연두에서 회복된 시점에선 서장자는 그저 걸림돌일 뿐이구나.’
“하하하!”
이선은 깨달음을 얻은 듯,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영흠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이선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완화군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됐다. 실록에서는 그저 병으로 죽었다고 나오고, 야사에서는 중전이 보낸 약을 먹고 독살했다고 나오지. 반은 맞고, 반은 틀렸군. 중전이 의도한 병으로 죽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바뀐 역사의 이선은 미리 종두를 접종했고, 천연두에 걸릴 일이 없었다. 더욱이 궁궐에서 보낸 설빔 따위는 입지도 않았던 것이다. 애먼 노복 하나만 잡은 셈이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네가 옷을 입어 준 덕에 확실히 알게 됐다. 중전이 나를 해치려고 한 사실을 모르고 넘어갔다면, 또 다른 방법으로 시도했겠지. 그땐 정말 당했을지도 모르고.’
이선은 어린 노복이 딱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 선생, 돌쇠를 철저히 격리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잘 돌봐 주시오. 그리고 오늘의 일은, 여기 있는 사람들만 아는 걸로 합시다.”
이선이 생각하는 것은 안영흠도 짐작하는 바였고, 지석영은 궁중 정치의 역학관계를 모르니 그저 노복이 역병에 걸린 것으로만 알 터였다.
“대감, 이건 틀림없이 중궁전에서 대감을 노린 겁니다. 어찌 이토록 흉측한 방법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이선과 둘이 남자, 안영흠이 격분한 표정으로 중전을 규탄했다.
“이는 운현궁에 원한을 갖고 있는 중궁전이 꾸민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운현궁에 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소? 오늘의 일은 여기 있는 사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둘만 알자고.”
“아니, 어째서 말입니까? 운현궁에 고하여 대책을 세워야지요.”
“안 서방, 아니 안 공. 한 가지 확실히 해둡시다. 그대의 주군은 나요, 운현궁이요?”
존칭을 써가며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이선의 말에, 안영흠은 고개를 숙였다.
“완화군 대감이십니다.”
“그렇다면 내 뜻을 따라 주시오. 가뜩이나 중궁전과 운현궁 사이에 불화가 깊은데, 확실하지 않은 일을 고하여 더욱 큰 분란을 일으킬 순 없소.”
“하지만……!”
“작금의 조선은 서양과의 수교라는 중대한 결단을 앞두고 있는데, 왕실에 분란이 있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아시겠소?”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 섣불리 암살 의혹을 제기해 봐야 역효과만 나올 뿐이야. 명목상 중전의 아들인 내가 어미에게 의혹을 제기하면 불효자라는 악명만 얻게 될 터이니…….’
이선은 냉철하게 판단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의 자신으로선 중전에 반격할 어떤 수단도 없었다.
‘아마 유일하게 도와줄 사람은 대원군이겠지. 하지만…….’
완화군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면 대원군은 분노를 참지 못할 것이다. 역사보다 더 빨리 임금과 중전을 끌어내릴 음모를 꾸밀지도 몰랐다.
지금은 수교 반대파인 대원군에게 명분과 힘을 실어서 서양과의 수교를 막게 해선 안 됐다.
‘고종과 민씨들이 하는 짓이 어설프긴 해도, 어찌 됐든 수교와 개화 정책은 해야만 해.’
이선의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안영흠은 크게 감동한 눈치였다.
“대감의 안위보다 국가의 대업을 먼저 생각하시는 판단에 감탄할 뿐입니다. 진정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실천하시니, 대감께서는 종친의 모범이요 진정한 충신이십니다!”
‘허허, 낯뜨겁게.’
이선이 객관적이고 냉철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미래에서 빙의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대원군과의 관계, 중전과 관계, 완화군이 죽은 해 등을 미리 알고 있는 이로서 생각할 때, 객관적이고 냉철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그저 완화군 이선이라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겠지. 오히려 이 모든 걸 명쾌하게 만들어 준 중전의 시도에 감사할 정도인걸.’
이선은 역설적으로 상쾌한 기분이었다.
‘중전과 여흥 민씨와는 한 하늘을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라는 게 확실해졌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민씨의 감시하에 놓일 것이고, 내가 조선에서 살아 있는 한 계속 내 목숨을 위협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대감, 그래도 대책은 세우셔야 합니다. 언제 이런 불측한 시도가 또 있을지 모르니…….”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소. 일단 오늘 하루는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안영흠은 이선의 판단을 존중해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물러 나왔다.
‘대단하다. 단순히 대원위의 손자이자, 주상의 아들로만 여겼는데. 어떻게 저 어린 나이에 저토록 명석하고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왕재로서 손색이 없고, 진정 주군으로 모실 만하다.’
안영흠은 거듭 감탄했다. 그는 완화군에게 답한 것처럼, 주군으로 섬기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자, 이제 어찌한다…….’
밤이 깊어졌지만, 이선은 방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처지와 조선이 놓인 정세에 대해서.
1880년 현재 조선은 일본과 수교 중이나, 아직 서양에 대해선 태도를 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아는 이선은, 조선이 곧 서양 각국과 수교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문제는, 서양이나 근대 외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당장 모든 걸 청나라에 의존하는 처지이니 어찌하겠는가. 서양 언어 할 줄 아는 사람도 없고. 결국 내가 나서야 하는데…….’
하지만 왕족, 그것도 중전의 경계를 받는 어린 왕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 당장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민씨가 눈에 불을 켜고 쳐다볼 텐데, 내가 세력을 형성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대원군의 보호를 받는 것? 그러면 결국 대원군의 꼭두각시가 될 뿐이겠지. 반 민씨, 양이(攘夷)파의 꼭두각시. 결국, 내가 주체적으로 활동하려면…….’
결론은 하나였다.
‘조선을 떠야 한다.’
이선이 가진 능력을 볼 때,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보다 세계 무대로 나아가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았다.
‘열강이 조선에 개입할 여지를 막아 놓고, 해외에서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
곧 동양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 내정에 개입하려 들 것이고, 더 나아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는 영국과 러시아도 힘겨루기를 할 것이다.
‘청, 일본, 영국, 러시아. 조선 주변의 4강을 잘 활용해서 생존의 기회를 확보해야 한다. 나 자신과 조선의 생존을.’
서로 대립하는 4개국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겠지만, 역사를 알고 있는 이선은 최대한 조선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생각이었다.
‘청은 지금 이홍장의 주도로 양무운동, 해방(海防)정책이 활발하다. 북양군을 기반으로 삼는 이홍장에게 조선은 가장 중요한 이웃이지. 근데 이대로 가다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군대를 파견해 대원군을 납치하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안 돼. 그건 막아야 한다.’
임오군란은 자국 군대의 반란에 궁궐이 점령당하고, 이를 진압하지 못해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한 초유의 사태였다. 이로 인해 수도에 청과 일본이라는 두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되고, 외세의 상시적인 간섭에 놓이게 되었다. 참으로 망국의 근원이었다.
‘일본은 현재 내치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지. 정한론자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현시점에서 감히 청나라에 맞설 생각은 없고. 당장은 조선에게 해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 일본에서는 메이지 7년의 정변으로 조선 정벌을 부르짖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 정한론파가 실각했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중심의 내치파는 언젠가 대륙을 치려 한다는 점에서 정한론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대외전쟁을 벌이려면 20년 이상의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1877년, 대규모 내전인 세이난(西南)전쟁이 터졌다. 반란을 일으킨 사이고가 죽고, 반란을 진압하고 근대화 정책을 밀어붙이던 오쿠보가 이듬해 암살당했다.
오쿠보의 뒤를 이어 정국을 주도하게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는 내치 우선주의 정책을 계승했다.
1879년에 류큐(오키나와) 합병을 단행했다고는 하나, 현시점에서의 일본은 청나라와 열강의 눈치를 보느라 조선을 위협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영국은 청나라와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중국 시장 독점으로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니, 별다른 모험은 하지 않을 거고. 러시아……. 지금은 러시아가 문제군.’
1880년, 러시아와 청나라는 국경 분쟁으로 날을 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에 없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청나라와 물러서지 않는 러시아였다.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곧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선에서도 러시아 위협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뭐 어차피 협상이 타결돼서 전쟁은 안 일어날 거니까. 근데 위기는 기회인 법이지. 이 기회를 잘 이용해 보면, 조선과 내게도 뭔가 이문이 떨어질 것 같은데…….’
조선을 잠시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개항장인 원산을 통해서 일본이나 러시아로 가는 방법도 있겠으나, 지금은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 이홍장을 만나는 것이 더 유용해 보였다.
마침내 이선은 결단을 내렸다.
“일단 청국으로 가서, 이홍장을 만나자. 현재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외국 지도자는 단연 이홍장이니, 먼저 이자부터 설득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북경에 가면 외국과 접촉할 기회가 많을 터였다. 북경에는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이 있었고, 이들과 교섭해 볼 수도 있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움직여 보자.’
이선의 전문 분야라면 단연 외교였다.
약소국의 왕자라고 해서 열강의 외교 무대에서 반드시 무시당하란 법은 없었다.
이 시대의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고 있고, 열강의 방식을 잘 알고 있는 이선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럼 떠날 준비를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