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00
– 100화에 계속 –
100화 개혁의 방향
“고하도록 하라.”
“신등(臣等)이 서양 각국을 시찰하니, 서양과 동양의 격차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서양의 부강함은 시찰을 함께한 모든 이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선의 말에 사절단원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정세가 점점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서양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고, 상업적 이익만을 취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서양은 세계를 분할하여 열강의 식민지로 삼으려 합니다. 이른바 제국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1870년대의 불황 이후, 서양 열강은 기존의 상업 제국주의에서 ‘신제국주의’라고 불리게 될 영토 제국주의로 나아갔다. 1880년대의 아프리카 분할은 ‘제국의 시대’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총구는 아시아로도 향할 예정이었다.
“이미 인도를 지배하는 영국은 버마(미얀마)까지 취하려 합니다. 아라사는 중앙아세아를 정복하고 영국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불란서는 안남(베트남)을 취하려고 청국과 전쟁을 도발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유구(오키나와)를 병탄하고 대륙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동양의 운명은 실로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습니다.”
이선의 직설적인 경고에 임금과 신료들이 놀라워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원군도 눈을 번뜩였다.
“그렇다면 경은 조선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임금의 물음에 이선이 답했다.
“경장(更張)의 필요성이 이보다 시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대경장의 시기입니다.”
“이미 기무처의 주도하에 경장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가?”
“지금까지 기무처가 많은 일을 해왔지만, 이는 그동안의 적폐를 바로잡는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적폐청산을 넘어, 전면적인 대경장, 대개혁에 나서야 합니다.”
“전면적인 대개혁이라고 하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양의 사례를 참고하여, 국가를 전면적으로 변혁하는 것이옵니다! 제도와 법을 일신(一新)하여, 조세제도를 바꾸고 농업과 상공업을 진흥시켜 재정을 튼튼히 하며,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여 국권을 지켜내야 합니다.”
이선의 단호한 선언에 모두가 놀랐다.
개화파 신료들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동조의 뜻을 보였지만, 보수파 신료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원군은 눈썹을 치켜세웠고, 임금은 미묘한 표정이었다.
대원군은 완화군에게 반박하려다가, 그랬다가는 임금과 조정 신료 앞에서 정치적 균열을 드러낼 것 같아 참았다. 그는 노회한 정치가였다.
“완화군, 사행을 복명하는 자리에서 경장을 논하는 건 너무 이른 듯싶소. 이는 국가의 중대한 일이니, 차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합시다.”
대원군이 점잖은, 그러나 강한 무게감이 있는 어조로 말했다. 이선도 대원군의 뜻을 짐작해 답했다.
“황공하옵니다. 신등이 보빙사의 사행록을 정리하여 시무의 대책을 아뢰겠사오니, 전하께옵서 살펴주시옵소서.”
“그리 하도록 하라.”
임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이 임금과 대원군, 조정 신료들 앞에서 개혁의 방향을 선언한 건, 그만큼 초조함의 발로이자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초조함의 발로는 그만큼 개혁이 시급함을 의미했고, 자신감은 이선이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힘을 보유함을 의미했다.
이선이 조속히 개혁의 방향성을 공표한 데에는, 정치적 역학관계에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선과 사절단 일행이 제물포로 들어올 때, 김옥균이 직접 인천으로 마중을 나왔다. 김옥균은 조선에서 그 누구보다 이선의 귀국을 목이 빠지라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군 대감, 어서 오시옵소서! 군 대감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입니다.”
“나도 정말 반갑구려. 환영 고맙소, 고균.”
“그대들이 서양을 둘러보고 조선으로 돌아오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세.”
“하하, 고균을 보니 조선에 돌아온 게 실감이 나는군.”
김옥균은 절친한 벗이자 개화당 동지인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변수 등과도 재회를 기뻐했다.
인천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동안, 이선은 김옥균과 밀담을 나누었다.
“내가 정확히 1년 만에 돌아왔는데, 그동안의 조선 정세는 어떠하오? 아라사에서 고균이 보낸 전문은 받았소이다만, 직접 들어보고 싶구려.”
“대원위 합하를 중심으로 기무처가 정치를 이끌고 있지요. 과연 대원위는 단호하고 결단력이 있으시니, 폐정개혁에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군. 그 외에 별다른 일은 없소?”
김옥균이 목소리를 낮췄다.
“다만 대원군과 기무처 간에 갈등이 좀 있습니다.”
“갈등이라고 하면, 어떤?”
“첫째로는, 명분론적인 이유입니다. 사대부들의 충성대상은 결국 군주입니다. 우리 당 동지들은 크게 개의치 않아 하지만, 명분론을 중시하는 사대부 입장에선 군주에 대한 충성을 신앙으로 여기지요.”
개화당은 이미 이선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므로 논외였다.
“이들은 성상께서 뒷전으로 밀려나고, 대원군이 집정하는 데 불만이 많습니다. 물론 왕명을 집행하는 기무처 총재로서 정령(政令)을 행사하는 거지만, 조정이 사인(私人)에게 지배되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지요.”
“명분론의 문제라. 하지만 대원군을 지지하는 보수파들이 문제 삼을 것 같지 않고. 그런 걸 물고 늘어질 사람들은 척사파들인데, 이들은 우리가 신경 쓸 대상이 아니지 않소?”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명분론보다는 다른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둘째, 실질적인 문제, 즉 개혁의 방향을 놓고서이지요. 이 문제로 인해 기무처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겁니다.”
김옥균은 이선 쪽으로 더욱 밀착해서 말했다.
“저와 금릉위(박영효) 같은 우리 당 동지들은 차치하더라도.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기무처 당상들도 대원군의,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완고함에 지쳐가고 있습니다.”
김옥균은 대원군의 손자인 이선을 배려해 에둘러 완고함이라 지칭했다.
“명확히 말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대원군께서는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지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우리 개화파들에게 개화는 목표이지요. 하지만 대원군께는 수단일 뿐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개혁에 접근하려고 하면 대원군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선으로는 짐작이 갔다. 반(反) 외척으로 뭉친 세 정파가 개혁을 내걸고 억지로 한 배를 탔으나, 결국 개혁의 방향성을 놓고 갈등을 빚는 건 당연했다.
“대원군께서 모범으로 생각하는 청국의 공친왕처럼 보수파들을 무마시키고, 개혁을 이끌어나가면 좋으련만.”
“대원군의 지지기반은 결국 종친들과 소론 및 남인계 유림 아닙니까?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지요. 근데 대감도 알다시피 이들이 좀 보수적입니까? 경화 사족들보다 지방 유림들이 개화에 적대적인 건 모르는 이가 없지요.”
개화파 주류가 노론 명문가 출신들로 채워져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오랫동안 권력에서 배제된 종친과 남인계 지방 유림들은 훨씬 유교적 원칙에 충실한 보수파였다. 이들이 바로 대원군의 최대 지지기반이었다.
“맞는 말이오. 결국, 대원군도 이해관계에 완전히 초탈할 수 없지.”
“대원군께서 종친과 보수파들을 대거 조정에 불러들이셨습니다. 이들이 요직을 맡은 건 아니니 기무처의 개혁을 뒤엎는 조치는 없지만, 그 숫자가 늘어나니 자연히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이러니 우리 당이든, 시무를 이끄는 기무처 당상들이든, 군 대감의 귀국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조치가 있어야겠군. 일단 내일 보빙사 복명하는 자리에서 개혁의 방향을 선언해야겠소. 그럼 조정에 명확히 전선이 갈려지겠지. 그 후에 정계 개편을 고민해 봅시다.”
“묘안이십니다. 기무처 당상들은 물론이요, 성상께서도 대원군의 독주를 막고 싶어 하실 겁니다.”
이선이 복명을 마친 바로 그날 밤. 대원군은 이선을 운현궁으로 불러들였다.
“할아버님,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시온지요?”
“음. 완화군이 걱정해 준 덕에 건강하다. 너야말로 지난 1년간 노고가 많았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 노고라고 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할아버님께옵서 폐정 개혁에 힘쓰고 계시니, 저는 해외에서 이를 돕고자 하였습니다.”
“하하. 그래, 어디 네 이야기 들어보자꾸나.”
조손(祖孫) 간에 사랑과 존경이 담겨 있는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간 후, 바로 주제는 정치로 옮겨갔다.
“미국에서 차관을 구했다는 말을 들었다마는. 보고하지 못할 밀약들도 있었겠지. 어떤 성과들이 있었느냐?”
이선은 미국과 유럽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요약하여 보고했다. 미국 차관을 들이고 기술을 받기로 한 일, 영국 장군을 군사 고문관으로 데려오기로 한 일, 프랑스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수교 조약을 맺기로 한 일, 독일과 중립국화에 대해 논의한 일, 러시아의 지지를 받기로 한 일 등이었다.
대원군은 이선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듣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일본이나 서양의 침략을 막을 버팀목을 세웠다는 뜻이 아닌가?”
“바로 보셨습니다. 제가 중점을 둔 사안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잘했다. 역시 너를 믿고 서양에 보내길 잘했구나.”
“황공하옵니다.”
대원군의 정치적 입장에서는 거슬릴 만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도, 의외로 대원군은 선선히 이선을 칭찬했다.
‘역시 대원군이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는 건, 본심이 아니라 지지층을 배려해서인가? 그렇다면 이야기가 편할 터인데.’
이선이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대원군이 질문했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내 너에게 묻고자 한다.”
“하문하시옵소서.”
“조선에는 조선의 법도라는 게 있다. 서양을 모범으로 삼는다고 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부국강병이옵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전국 시대를 능가하는 난세이옵니다. 서쪽의 변방에 있던 진(秦)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건, 변법 개혁을 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한 덕분입니다. 필요하다면, 어찌 서양의 방식을 배우는 걸 두려워하겠습니까?”
이선은 대원군이 알아듣기 편하도록 중국의 사례를 댔다. 유학을 배운 사대부의 모든 전거(典據)는 중국의 옛 역사였다.
“부국강병, 좋지. 나도 부국강병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진이 폭정으로 천하 통일 15년 만에 패망한 걸 모르는가?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서양을 모범으로 개혁을 추진했다간 사대부와 백성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터.”
“제도를 개혁하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면, 저항은 지지로 바뀔 것입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특히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건 어떤 의미이냐? 사대부들이 천주쟁이들을 사학(邪學)으로 여기는 건 너도 잘 알 터.”
역시나 병인박해의 장본인인 대원군에게, 기독교의 공인은 심각한 문제였다.
“하오나, 조선이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으려면, 종교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와 사상의 자유는 학문을 진흥시킬 것입니다.”
“그건 이상이지. 너는 내가 병인년에 천주쟁이들을 박해한 이유를 모르느냐? 나라고 좋아서 그들을 죽였겠느냐? 네 고모, 즉 주상의 누이가 바로 천주교도였다. 하지만 유림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사대부와 척을 지고 조선의 통치가 가능하다고 믿느냐?”
대원군은 ‘공자가 살아있더라도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단호히 처벌할’ 위인이었지만, 그 자신도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물론 개혁에는 반발이 따를 터입니다. 하오나 서양의 사례를 참고하여 동양의 도(道)를 진취하면 됩니다. 사대부의 공의(公議)를 존중하고 인민의 권리를 신장시키면, 어찌 반발만이 있겠습니까?”
“사대부의 공의를 존중하고 인민의 권리를 신장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
“먼저 제도를 개혁하여 낡은 신분제를 폐기하고, 만민평등의 시대를 이뤄내야 합니다. 장차 의회를 개설하여 사대부의 언로를 트고, 인민에게 정치의 권리를 주는 것입니다.”
‘결국 개혁의 방향은 양반의 기득권을 철폐하는 것이니, 정치적으로 부스러기라도 내줘야지.’
이선의 복안은 그동안 정치 무대에서 밀려 불만을 가득한 지방의 사대부들에게, 의회의 형태로 공론의 장을 열어주자는 것이었다.
“의회라고? 그건 동양에 전례가 없는 것이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미 일본에서 의회 개설을 준비 중입니다.”
일본에서 의회개설 운동을 이끄는 세력이 기득권을 빼앗긴 사족, 즉 옛 무사 계급인 점을 고려하면, 이선의 구상은 선제적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신분제 의회는, 장기적으로 국민주권이 실천되는 진정한 대의기관으로 변모해나갈 것이고.’
“작금의 일본이 어찌 동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서양의 앞잡이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이 그러는 건 세계의 대세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대체 그 세계의 대세가 무엇이더냐?”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을 이뤄내려면 인민에게 다양한 의무를 부여해야 합니다. 인민에게 다양한 의무를 부여하려면, 마땅히 권리도 주어야지요. 세계의 대세는 인민 권리의 향상이오, 군민 공치(君民共治)의 이상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인민의 지지 위에서, 국가와 왕실은 반석 위에 오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