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01
– 101화에 계속 –
101화 수단과 목적
대원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이선의 말은 기존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겠단 말이었다.
보수적 개혁론자인 대원군은 부국강병에는 뜻을 같이 하나, 근본적인 체제 변혁은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군민 공치라니? 조선은 500년 군주의 나라, 바로 전주 이씨의 나라다. 사대부도 아니고 인민과 함께 다스려?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군민 공치란 문자 그대로 인민과 함께 다스린다는 의미보단, 인민의 지지 위에서…….”
“그게 바로 서양의 방식이렸다. 네가 서양에 심취한 건 진작 알았다마는,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박정양이 미국을 그리 찬양하더군. 하지만 그 박정양조차도 미국은 민주국이라 그대로 따라할 수 없다 하였다. 너는 500년 조선의 법도를 한순간에 무너트리려는 것이냐?”
“꼭 그렇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제 조세개혁과 국민개병이라는 중요한 개혁을 앞두고 있는 만큼, 저항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의회를 자문기관으로 적당한 발언권을 부여해서, 개혁을 추인해나가는 겁니다.”
대원군은 탁자를 내리쳤다.
“조선에서 인민이란 군주가 선정을 베푸는 시혜의 대상이지 나라를 함께 다스리는 대상이 아니다! 나라에서 세금을 내라고 하면 내는 거고, 군대를 가라고 하면 가는 거다. 대체 무슨 발언권이 필요하단 말이냐?”
“바로 그겁니다!”
공손히 있던 이선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니, 대원군은 놀랐다.
“덕국의 재상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가라 할 수 있는 비스마르크란 이가 있습니다. 부국강병을 이끌어 오지리(오스트리아)와 불란서를 무찌르고, 오랫동안 나뉘어져 있던 덕국을 통일시켰습니다. 지금은 태서 정세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지요. 저는 덕국 수도 백림(베를린)에서 비스마르크를 만나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요.”
이선은 비스마르크와의 회담을 상기했다.
“할아버님께서 지금 비스마르크의 통치 스타일을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군대를 가라, 세금을 내라, 그리고 닥쳐라!’ 그게 바로 부국강병의 핵심입니다.”
“군대와 세금이 부국강병의 핵심이란 건 알겠다. 그러니 그 비스마르크란 자도 반대하는 세력들을 닥치게 한다는 거 아니냐?”
“하지만 비스마르크도 인민에게 적당한 양보를 하고 있지요. 헌법을 제정하고, 25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참정권을 주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민주적이지요. 하지만 의회에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떠들 수 있는 자유만 있지요. 정부 정책에 전혀 관여하지 못합니다. 재상 비스마르크가 황제를 대신해서 모든 걸 결정합니다. 황제는 비스마르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요.”
“호오. 그럼 네 말인즉…….”
대원군은 이선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이해했다.
“할아버님의 권한을 법적으로 제도화하자는 겁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할아버님이 성상의 생부라고는 하지만 군주를 대리하여 섭정하는 건 법적 뒷받침이 없습니다. 청나라를 보십시오. 공친왕이 총리아문을 이끈다지만, 황제, 아니 서태후의 한 마디에 날아갈 수 있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지지요. 모든 건 군주의 정령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그건 누구보다 대원군이 통감했다. 자신의 10년 권세도, 군주가 통치해야 한다는 유교적 명분론 앞에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장차 기무처를 내각으로 바꾸고, 할아버님께서 비스마르크처럼 재상이 되는 겁니다. 위로는 왕명을 통해 군주의, 아래로는 의회를 통해 사대부와 인민의 추인을 받는다면, 감히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일본의 정치가들이 의회를 개설하려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들은 결코 서양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노회한 대원군은 의회 제도를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만족했다. 대원군에게 모든 건 권력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이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바이다. 나도 그 의회 제도란 걸 한 번 연구해 봐야겠구나.”
“소손은 그저 나라와 할아버님을 위해 최선의 방법을 강구할 뿐이옵니다. 가끔 조선 실정에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오해 마시옵소서.”
“하하, 내가 어찌 너의 충심을 모르겠느냐? 장차 이 할아비의 대업을 이을 사람이 너다. 나의 대업이 곧 너의 대업이 될 것인즉.”
만족스럽게 웃는 대원군을 보며 이선은 고개를 조아렸다.
“황공하옵니다.”
이선은 운현궁을 나오면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대원군과 한동안 뜻을 함께 했지만, 결국 넘을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가 있었다.
이선에게 근대화는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대원군에게는 권력을 위한 수단이었다.
대원군의 정치적 상상력은 전근대적 왕조국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은 군주와 전주 이씨의 나라’라는 것이 대원군의 확고부동한 사상이었다. 사대부들은 이보다 조금 확장해서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고 여길 터였다.
이선은 ‘조선은 국민의 나라’, 즉 국민국가를 원했다. 국민국가를 단기간에 만들 수는 없겠지만, 장기적 방향성은 그쪽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대원군을 달래서 근대화의 방향성을 맞추고 있지만, 앞으로 계속 함께 간다는 건 무리겠구만.’
이선이 대원군에게 의회 제도를 제안한 건, 정치적 연착륙의 필요성을 느껴서였다.
근대화의 모든 걸 부정하는 수구(守舊) 척사파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대원군을 지지하는 보수적 사대부의 저항을 최소화하려 했다.
그래서 먼저 중추원(상원)을 개설해 사대부들에게 약간의 정치적 권리를 주고, 대원군에게 중추원 의장직을 맡겨 보수파들을 대표하게 할 구상이었다.
장차 이선이 정부를 이끌며 개혁을 도맡는다면, 대원군은 명망 높은 국가 원로로서 최고의 명예직을 수행하며 배후에서 후원하는 역할을 맡기려 했다.
‘가장 좋은 건 대원군이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중추원 의장을 맡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까 절대 쉽게 내려올 양반이 아니야. 올해부터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대원군을 정부 수반으로 두고 집행할 수 있을까? 대책을 논의해봐야겠군.’
“대원군의 권위는 필요합니다. 조선 땅에 그만한 명성을 가진 정치가가 없지요. 민심은 여전히 대원군을 지지합니다. 개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한다는 전제하에, 조정을 대표하는 이로 남아주면 좋지요.”
개화당 비밀 회합에서 김옥균이 말했다.
“조선도 암흑에서 벗어나 서구 선진국처럼 하루 빨리 변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급진적이고 신속한 개혁정책이 시급합니다.”
개화당 내 온건파였던 홍영식도 목소리를 높였다. 급진개화파는 구미 순방 이후 더더욱 조급함을 느꼈다. 그들은 무언가 혁명적이고 결정적인 조치의 필요성을 갈망했다.
“조선은 서양은 물론이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개화에 착수한 청국이나 일본에도 크게 뒤처져 있습니다. 이를 만회하려면 단기간의 급진적인 경장이 필요합니다.”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오. 경장을 완수하려면, 지배층의 뼈를 깎는 자기혁신이 필요합니다. 덕국이나 일본처럼 위로부터의 개혁이더라도 마찬가지요. 지배층의 자기혁신 없이 개혁은 없소.”
이선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사대부들은 개화의 필요성 자체는 느끼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 개혁을 이뤄내려면 그러한 기득권들은 가차 없이 박탈되고 축소되어야 하오. 소위 문벌(門閥)은 영원히 해체될 것이고, 인민 평등의 시대가 열려야 하오. 동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소?”
이선의 물음에, 개화당 지도부의 얼굴에 순간 긴장이 어렸다. 그들 또한 노론 명문가 출신이고, 기득권 세력의 일부였다.
하지만 변화에 대한 갈망이 더 강했다.
“군 대감께서는 성상의 장자이시면서도 모든 기득권을 내버리고 험난한 길을 걸으려 하십니다. 저희들이 어찌 작은 기득권에 연연하겠습니까? 인민 평등은 우리 당이 결성될 때부터 내세운 목표였습니다. 마땅히 따를 것입니다.”
김옥균을 필두로, 개화당원들이 일제히 이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군 대감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좋소. 그렇다면 경장에 앞서 현재의 정치적 구도에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건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시오? 동지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 싶소.”
“우리에게는 믿을만한 군대가 있습니다. 조선에 고려대대를 능가할 군대가 어디 있습니까? 고려대대는 군 대감에게 충성하니, 보수파들을 제압하고 개화당을 권좌에 올릴 수 있습니다.”
개중에서 가장 젊은 축인 21세의 서재필이 거리낌 없이 군사정변을 제안했다. 일본의 도야마 군사학교에서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은 서재필은 사관학교와 신식 군대 창설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고, 군사적 해결방안을 선호했다.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급적 최대한 평화롭게 정권을 인수하고 싶소. 작금의 조선은 더 이상의 정치적 내분을 허용할 수 없는 처지요. 임오군란과 같은 일이 또 발생한다면, 조선의 재앙이오.”
이선은 내란과 같은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막부와 삿쵸동맹의 내전을 거치고도 외세의 개입을 피한 일본은 억세게 운 좋은 나라였다. 1860년대가 서양의 간섭이 덜한 시대이기도 했지만, 일본 지배층이 내전의 조속한 종결에 합의한 것도 컸다.
‘1880년대는 달라. 중립국을 선포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지. 조선에 심각한 내부 균열이 발생하면 청이든 일본이든 러시아든 영국이든 반드시 개입한다.’
“군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군대를 동원하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더욱이 장차 새로 편성할 신식 군대도 영국인 장군이 이끈다고 하였지요. 영국 장군을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군 대감뿐입니다. 이미 군대가 대감의 손안에 있거늘, 굳이 정변의 방법을 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박영효와 홍영식이 정변 불가론에 힘을 실었다.
“동지들의 말씀을 듣고 나니 제가 경솔했습니다.”
서재필이 머쓱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하하, 서 군이 젊어서 혈기가 넘치는 탓이지. 일본 말고 미국에서 공부해보는 게 좋겠소. 일본인들이야 정변과 같은 방법을 선호하지만, 미국은 제도와 타협을 중시하거든.”
“저도 동지들에게 미국 이야기를 듣고 꼭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길준 군이 미국 유학생으로 가있지. 올해부터 30세 미만의 유능한 젊은이들을 관립유학생을 뽑아서, 서양으로 보내 분야 별로 공부시킬 생각이오. 앞으로 이들이 조선을 이끌어나가게 되겠지.”
이선의 말에 청년들의 눈이 빛났다. 특히 서재필이나 변수 같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는 서양 유학의 꿈을 품고 있었다.
“요 근래, 성상께서 개화에 상당히 우호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보빙사 행록도 크게 감탄하며 읽으셨습니다. 서양에 대한 관심도 높으시지요. 성상의 지지를 구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김옥균은 근래 부쩍 임금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 뒷방으로 물러난 임금은, 1860년대 대원군 섭정기 때처럼 군주로서의 의례를 다하고 경연(經筵)과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다만 10대 시절과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유학 경서를 읽는데 집중했다면 지금은 ‘개화 서적’을 탐독했다.
조정 내 개화파를 대표하고, 화술이 탁월한 김옥균은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임금과 김옥균이 함께 있는 시간은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성상은 총명하셔도 우유부단하고 의견이 자주 바뀌시는데,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서재필의 비판에 개화당 지도부가 일제히 눈을 부라렸다. 조선에서 군주에 대한 비난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을 삼가게! 뉘 안전이라고 감히…….”
사실 그동안 임금에 대한 비판도 거리낌 없이 하던 개화당이지만, 지금은 임금의 장자인 완화군이 앞에 앉아있는 상황이었다.
서재필도 아차 싶어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어리고 무지하여 실언을 하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군 대감.”
“뭐, 없는 곳에선 임금님 욕도 한다고 하지 않소. 하지만 말조심하는 게 좋지. 여긴 조선인데, 군주의 권위는 존숭해야하지 않겠소? 앞으로 조심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임금이자 부친을 비판하는 발언에도 이선이 관대히 넘기자, 서재필이 감사를 표했다.
‘솔직히 말인즉슨 틀린 말은 아니지. 내 아버지라지만 고종은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진심으로 개화를 지지하는 건지, 권력을 되찾고 싶어서 개화를 지지하는 건지.’
이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옥균은 말을 이었다.
“군 대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조선에서 군주의 권위는 존숭되지요. 조선이 군주제 국가인 이상, 성상의 지지는 꼭 필요한 요인입니다. 우리 모두 성상의 신하 된 자이니, 왕명을 받들 의무가 있지요.”
하지만 신하로서 군주에 대한 충심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다. 김옥균은 권력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단, 핵심 요직을 맡아 국가를 이끄는 건 개화당이어야 합니다. 군 대감과,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이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