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05
– 105화에 계속 –
105화 재정 개혁
이선은 군제 개혁안을 기무처에 제출했다.
기존 군제를 서양식으로 뜯어고치겠다는 내용에 놀라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음, 잡다한 군영을 폐지하고, 친위대와 진위대로 군제를 개편한다. 무과를 폐지하고 사관학교를 설치한다. 유망한 청년들을 외국 사관학교에 유학 보내어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익힌다. 지방 군영에서 사용하던 재정을 일원화하여 국방 예산을 중앙에서 집행한다…….”
개화파 관료들은 개혁 필요성에 공감을 표했지만, 보수파의 우려가 터져 나왔다.
“무과를 폐지하고 사관학교를 만든다면, 기존에 무과를 준비하던 이들의 저항이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저항이 적을 무과부터 사관학교로 대체하고, 무과뿐만 아니라 과거제도 자체를 폐지할 거다.’
이선은 본심을 감추고 답했다.
“전쟁 양상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지휘관이 근대식 전술을 익히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볼 것입니다. 반드시 무과는 사관학교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이선의 예상대로, 조정의 문관들은 무과 선발 방식에 대해선 큰 저항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랫동안 내려온 군제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건 저항이 클 것입니다. 임오년의 봉기를 돌이켜보면, 무위영과 장어영에서 배제된 구 훈련도감 병사들의 누적된 분노가 폭발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 말씀은, 곧 군제 개혁을 하면 구식 군대의 반란에 직면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기무처가 무능하고 부패한 척족 정권과 같단 말입니까?”
이선의 반박에 보수파도 움찔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논리를 찾아냈다.
“갑자기 군대의 규모를 크게 늘리면 반드시 심각한 재정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재정 적자가 얼마나 심한지 잘 알지 않으십니까? 지금껏 조선의 방위는 대국에 의존해 왔습니다. 중국의 막강한 군대가 있는데, 조선이 군대를 키워봤자 한들 얼마나…….”
‘미친, 그래서 아예 국방을 포기하자고? 아예 국가의 간판도 내려놓자고 하지 그래?’
이선이 반박하려던 차에, 침묵하고 있던 대원군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조선의 종묘사직과 국토는 오직 조선인만이 지킬 수 있소. 병인년과 신미년의 양요를 지켜낼 수 있었던 건 조선인의 굳건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소. 하지만 시대가 변했기에, 의지만으로는 부족하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지 않으면, 어찌 조선의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겠소?”
대원군이 노기로 눈썹을 치켜세우자, 보수파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실로 그러하옵니다. 그 중국조차도, 법국과의 전쟁에서 참담한 패배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청국의 힘이 그리 약해서가 아니라, 서양의 군대가 워낙 막강한 탓입니다. 청국처럼 서양식으로 군제를 일부 개편하였는데도 그 정도입니다.”
이선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청불 전쟁의 사례를 들어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조선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면, 청국도 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힘으로 군대를 키워야 합니다. 군제를 전면적으로 서양식으로 개혁해야만,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반대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대원군도 재정 문제에 대해선 지적했다.
“막대한 재정은 어찌할 것인가?”
“일단 시생이 미국에서 구해온 차관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차관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걸 경도 잘 알 터.”
“예, 그래서 조선에 필요한 해결책을 강구해 봤습니다. 호조 참판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호조 참판 겸 내무아문 협판 어윤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생은 계미년에, 어명으로 서북 경략사직을 수행하며 변경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883년, 어윤중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관할하는 서북 경략사에 임명되었다. 이선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재정전문가 어윤중은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선은 어윤중에게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전권을 갖고 뜻대로 해보라고 권했다. 어윤중은 민생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고, 상당한 성과를 보였다.
“먼저 백성들이 가장 큰 우환이라 여기는 환곡제도를 폐기하고, 오직 본래의 구휼 목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무명잡세와 부역을 혁파하여 대신 토지세인 결가와 호구세인 호렴전을 부과하여, 토지와 호구에 근거하는 간결한 조세제도를 확립시켰습니다.”
백성의 수탈용으로 사용되던 환곡과 부역, 무명잡세를 폐지하고, 세금을 토지의 유무와 인구에 비례하여 걷는 결호전 제도를 시행했다. 백성들이 환영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향리의 불법적 수탈을 방지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군현의 기구를 정비했습니다. 향리직을 사고파는 관행을 철폐하고, 향리에게 봉급을 지급하여 농민의 수탈을 억제하고자 했습니다.”
수령은 교체라도 되지, 향리의 아전은 지방에 영구히 군림하면서 백성을 괴롭혔다. 어윤중은 무보수직으로 되어있어 백성의 수탈을 제도화한 향리에게 봉급을 내리는 대신, 관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지방에서 부당한 권한을 행사하는 향청의 우두머리인 풍현을 혁파하고, 향리가 백성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임의로 나가는 것을 억제했습니다. 마을 전체에서 면임을 천거하여 선출하되, 수고료를 지급하여 오직 직무에만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향촌의 양반과 아전들이 주도하는 사적 지배를 폐기하고, 백성의 참여를 제한적이나마 보장하여 지방 기득권 세력의 힘을 빼놓는 조치였다.
“서북은 군사적 요충지이니만큼, 군사력의 확충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세종대왕 이래 변경 방위의 중심은 진(鎭)과 보(堡)였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진보는 재물만 축낼 뿐 실효가 없습니다. 진보 운영자금을 대느라 변경 백성들의 허리가 휠 지경입니다. 잦은 월경이 발생하는 이유입니다. 쓸모없는 진보를 통폐합하고, 군제의 개편을 도모했습니다.”
어윤중은 군제 개혁과 재정 개혁이 같이 갈 필요가 있음을 입증했다.
“평양과 함흥에 병사들을 모집하여 훈련하고, 과거 합격 여부를 떠나 해마다 시험을 봐 우등을 한 사람을 뽑아 승진할 수 있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신분제도가 아닌 능력에 따른 출세를 보장하여, 신식 군대의 표본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선이 평양의 서영과 함흥의 북영을 높이 평가한 이유였다.
“원산에 신교육을 익힐 학교를 설립하여, 이름을 원산학사라고 하였습니다. 원산학사는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나누어, 경전과 병서를 가르치되, 산수나 기기, 농잠, 광업과 같은 시무에 긴요한 내용을 가르칩니다.”
어윤중은 유학 일변도의 교육을 비판하고,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학문을 가르치도록 권했다.
“또한, 개항장인 원산과 두만강에 세관을 설치하여 상세를 걷어 잠상배(潛商輩)들이 탈세를 못 하도록 하였습니다. 인천, 부산, 원산을 비롯한 개항장과 국경을 통해 들어오는 관세는 향후 조선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윤중은 1년간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광범위한 개혁을 시행했고, 이는 조선의 개혁을 위한 시범 조치였다. 어윤중의 개혁, 이른바 ‘계미사례’는 백성들의 광범위한 칭송을 받았다.
– 어윤중이 북방에 있을 때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숨을 죽이고 탐오한 자는 두려워하였습니다. 백성의 고락은 예와 지금이 아주 다릅니다. 성상께서 사람을 알아보고 벼슬 시킨 덕이 변방의 가난한 집에까지 두루 미친 것입니다.
당연히 지방 기득권 세력은 어윤중의 개혁에 반발했다. 이들은 어윤중에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했지만, 어윤중이 호조 참판으로 임명되어 한양으로 돌아가자마자 수령과 결탁하여 개혁을 뒤로 돌리려 했다.
“이자들이 조정의 권위를 어찌 보고 이따위 망동을 부리는가? 사사로이 결탁하여 조정의 방침에 저항하는 자들은 엄하게 다스려라! 각 관아의 수령이 부화뇌동한다면 그 죄를 더 엄하게 물을 것이다!”
대원군은 서북 백성들의 상소를 받은 후 강경하게 나섰고, ‘산천초목도 떠는 호랑이와 같은 위세’의 대원군이 보낸 위협에 납작 엎드려야 했다.
‘계미사례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건, 유능하고 뚝심 있는 관료인 어윤중의 능력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건, 서북은 기득권 세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일부러 시범사례로 선정한 곳이었다. 서북은 오랫동안 차별을 받았고, 농업이 주산업도 아니니 양반이나 지주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각 지방의 수령과 향리들을 통제하면 단기간에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와 삼남 지방은 확연히 달랐다. 양반 지주의 지배질서가 견고한 지역에서 개혁은 상당한 저항에 부딪힐 터였다.
‘하지만 결코 물러설 수 없다. 군제 개혁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중단 없는 개혁을 시행한다.’
“작금 재정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혁으로 인해 과다해진 지출에 있지 않습니다. 수령과 이서배(아전)의 부패와 체납으로 인한 조세 상납의 부족이 심각합니다. 가장 먼저 지방 제도를 개편하여, 수령과 이서배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정 개혁을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어윤중은 서북 경략사 활동을 토대로, 구상했던 재정 개혁안을 제출했다.
첫째, 재정기관의 통일. 각 아문 별로 잡다하게 받는 조세수납을 호조로 일원화한다.
둘째, 조세의 금납화. 금납화가 이루어지면 수취에 따른 잡다한 명목의 잡세가 철폐되고 현물 수송의 폐단을 해소할 수 있다.
셋째, 잡다한 무명잡세의 폐기. 토지세와 호구세로 조세제도를 단순화하여 안정적인 조세 수입과 백성의 조세 부담을 낮추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발휘한다.
넷째, 지조 개정에 필요한 양전 사업의 실시. 조선은 농업 국가이니만큼, 부의 대부분은 토지에서 비롯된다. 조세 수입을 증가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토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전국 팔도에 관원을 파견하여 양전하고, 모든 토지를 일관되게 국가 수세지로 편입시킨다.
다섯째, 호적법 제정. 호적을 정확히 파악한다. 호적상의 인구는 600만이나, 실제 인구는 그 두 배가 넘으리라 추정된다. 각 관아는 민호의 총수를 정확히 계산하여 사실대로 호적에 올린다.
여섯째, 환곡제도의 영구한 폐기. 환곡은 오로지 본래 목적인 구휼을 위해 활용되며, 지방관이 간섭하지 못한다.
일곱째, 중앙은행의 설립. 장기적으로 금은 본위제를 기반으로 한 화폐제도의 확립을 준비한다.
여덟째, 지방 행정의 대대적인 개편. 군현을 통폐합한다. 중앙에서 관헌을 파견하고, 향리에게 적절한 봉급을 지급한다. 국세와 지방세를 분리하여, 국세는 모두 호조로 수송한다.
아홉째, 상업과 광업의 진흥.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데 통상만 한 게 없다. 통상을 확대하여 관세를 확보하고, 광산을 개발하여 광물을 수출한다. 국부를 축적하여 식산흥업의 기초로 삼는다.
열째, 도량형의 통일과 교통 제도의 개혁. 전국에서 단일한 단위를 쓰도록 한다. 도로를 확대하고 철도를 부설하여, 기존의 조운선과 역참을 대체한다.
어윤중과 실무에 밝은 시무 관료들, 서양을 시찰하며 근대화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이선과 개화파들이 함께 논의하며 확립한 재정 개혁안이었다.
조선의 가장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조차도 보수파에는 상당한 충격인 듯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조치는 분명히 폐단을 낳을 것입니다.”
“오백 년간 내려온 제도를 한순간에 뒤엎으면, 뒷감당은 어찌하시렵니까?”
“특히 양전을 통해 모든 토지를 국가 수세지로 편입시킨다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건 불 보듯 뻔합니다.”
이선은 단호하게 답했다.
“국가의 조세 수입을 늘리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일에 어찌 저항감을 느낀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조선의 국민이 될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진짜 급진적 조치는 시작도 안 했다.’
이선이 추진하려는 국민교육과 국민개병, 더 나아가 신분제 폐지와 토지개혁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시무 관료들의 조언으로 미루었다.
‘신분제 폐지와 토지개혁은 정말 양반 지주들과 끝장을 보자는 거지. 먼저 문벌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고 출세시켜 신분제를 희석한다.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이 이뤄지면 신분제는 점차 의식 속에서도 사라지겠지.’
사회적 기득권을 개혁하는 일보다 경제적 기득권을 개혁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토지개혁은 훨씬 근본적인 문제. 향후 수년간 양전으로 토지부터 정확히 파악하고, 소작제를 완화한다. 궁극적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해 자영농을 육성하고, 지주를 자본가로 전환한다.’
이선의 구상은 장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갑신년의 재정 개혁안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