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06
– 106화에 계속 –
106화 반포(頒布)
기무처는 어차피 개화파 관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개화파들은 모두 개혁안에 동의를 표했다. 보수파들은 대원군이 ‘급진적 조치’에 제동을 걸어 주리라 생각하고 쳐다보았다.
“하나같이 국가에 시급한 사안이니 어찌 지체할 수가 있겠소? 조속히 시행해야 할 것이오. 반대 의견 있소?”
“…….”
대원군도 개혁안에 동의를 표하자, 더 이상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좋소. 성상께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합시다.”
기무처에서 심의하여 결정한 사항은 절차상 반드시 임금의 승인이 필요했다. 이선은 기무처 당상들과 함께 편전으로 향했다.
지난 2년간 별다른 말 없이 기무처 결의에 늘 도장을 찍어준 임금이지만, 이번 안건은 큰 변화를 주는 개혁안이기에 다른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전하, 기무처 결의에 대하여 전하의 결재를 바라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기무처를 대표해서 김홍집이 먼저 군제 개혁안을 제출했다. 임금은 개혁안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적절한 조치로 여겨진다. 군제의 개편은 가장 시급한 일로, 과인 역시 바라던 바였다. 다만 궁금한 점이 있다.”
“하문하소서.”
“친위대의 편제는 정확히 어찌 되며, 누가 지휘하는가?”
“친군 4군영이 각 1개의 대대가 되어, 친위연대를 구성할 것이옵니다. 지금은 보병뿐이나, 포병과 기병을 보강할 예정입니다. 연대장이 지휘를 맡습니다.”
“그렇다면 군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어찌 보면 가장 본질적인 문제였다.
“조선의 군대는 곧 성상의 군대이니, 전하께서 임명하신 무관이 지휘권을 행사하겠지요.”
군주국인 조선에서 군의 통수권은 당연히 군주의 몫이었다. 군정권(軍政權)도 군주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이선은 친위대장으로 누가 임명되든 상관없었다. 군사고문관 고든에게 참모 역할을 맡겨, 당분간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고문단의 통제하에 둘 생각이었다.
“알겠다. 군의 지휘권은 중요하니, 심사숙고해서 임명해야겠다. 군제 개혁안을 재가한다.”
임금은 군제 개혁안에 대한 지지를 표하고, 옥새를 찍었다.
다음으로 김홍집은 재정 개혁안을 제출했다. 개혁안을 읽던 임금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더니, 한참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기무처에서 모두 동의한 사안인가?”
“그러하옵니다. 만장일치였습니다.”
“대원군께서도?”
“흔쾌히 동의하셨습니다.”
“재정을 호조로 일원화하고 모든 토지를 일괄되게 국가 수세지로 삼는다면, 내수사와 궁방전은 어찌 되는가?”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와 왕실 소속 토지인 궁방전은 오롯이 왕실의 자산이었다. 대원군의 재집권 이후 내수사의 힘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궁방전은 도처에 있었다.
“마땅히 왕실에서 먼저 모범을 보여야지요. 그간 내수사와 궁방전의 폐단이 컸습니다. 완전히 폐지하여 국유재산으로 귀속하고자 합니다.”
이선은 제일 먼저 궁방전을 국유재산으로 돌려 모범을 보인바 있었다.
“그럼 왕실의 재정은 어찌 관리할 생각인가?”
“왕실 예산은 따로 배정받을 것이니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이선의 단호한 답에, 임금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과인은 일국의 군주인데도 호조로부터 돈을 받아 써야 하는군.”
“그렇지 않습니다. 온 나라가 성상의 소유요, 온 백성이 성상의 자식이옵니다. 이 조치로 국가의 부가 크게 증대하고 민생이 안정될 것입니다. 국가의 부가 증대하면 곧 성상의 자산이 될 것이며, 민생이 안정되면 만백성이 성상의 덕을 칭송할 것입니다.”
임금은 다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기득권 가진 자의 반발이 클 터인데, 어찌 해결할 생각인가?”
“나라와 민생을 위한 일이온데, 어찌 반발이 있겠습니까? 백성을 사랑하는 성상의 덕을 만방에 널리 알리는 길입니다.”
임금은 끝내 쓴웃음을 지으며 옥새를 들었다.
“나라와 민생을 위한 일이고, 기무처에서 만장일치로 의결한 사안이니 과인이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경들의 뜻이 곧 과인의 뜻과 같다.”
임금이 재정 개혁안에 옥새를 찍어 돌려주자, 이선과 기무처 당상들이 절을 하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다음 날. 갑신년 7월 28일(1884년 9월 17일).
군제 개혁과 재정 개혁을 알리는 임금의 교지가 반포되었다. 임금의 재위 20년간 내렸던 그 어떤 조치보다 확고한 개혁의 뜻이 담긴 교지였다.
교지를 읽으며, 개화파 관료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문제가 일거에 해결됐군!”
“아아. 이제 조선에 본격적인 경장이 이뤄지려나.”
“드디어 조선도 부국강병의 첫 발길을 떼게 되었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하하,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나. 시작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어.”
“이게 다 완화군 대감 덕일세. 군 대감이 이래저래 손을 많이 쓰셨거든.”
“사실 난 대원군이 반대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완화군께서 판을 다 만들어놨으니, 대원군도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지.”
“어허, 이 사람들. 성상의 덕이라고 해야지. 모두 왕명으로 이뤄지는 것이고, 완화군도 성상의 신하라는 점을 잊지 말게. 군 대감께서도 익히 이르시지 않았나?”
김옥균의 지적에 개화당원들도 급히 임금의 덕을 찬양했다.
“아, 그렇지요. 역시 성상께서는 영명하십니다.”
완화군은 전면에 대원군과 임금을 내세웠기 때문에, 가급적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고 배후에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개화당원들에게도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해둔 터였다.
하지만 모두가 개혁안을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 조정이 들끓었다.
“이리 중요한 사안을, 의정부에서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기무처가 결정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대체 조당(朝堂)이 왜 존재하는 겁니까? 기무처에서 모두 결정할 거면 의정부를 폐지하는 게 낫지!”
“진정들 하시오. 기무처가 결의하여 성상의 재가를 받아 법률을 시행한다는 건, 이미 기무처 절목에서 정해진 바가 아니겠소?”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이 점잖은 어조로 달랬다. 홍순목은 대원군을 지지하는 보수파로 영의정 겸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를 맡아 조정을 총괄했다.
“아니, 영상 대감께서는 화도 나지 않으십니까?”
“하긴 자제분이 기무처에 있으니……. 대감은 대원군의 오른팔이요, 아드님은 완화군의 오른팔이니 아주 든든하시겠습니다그려.”
좌의정 김병국(金炳國)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홍순목의 아들은 바로 홍영식이었다.
“좌상, 무슨 말씀을 그리하는 게요!”
“영상 대감, 나는 개혁에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일찌감치 서양과의 수교를 지지했던 사람입니다. 이번 개혁안도 필요한 조치라고 여겨져요.”
김병국은 안동 김씨 세도가 꺾인 후에도 대원군 정권에서 중용되었던 인물로, 임금의 친정 후에도 정승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 중에서도 개화에 대해 우호적인 대신이라, 일찌감치 서양과의 수교를 지지했다. 그렇기에 신정권에서도 여전히 좌의정 직을 맡게 되었다.
“문제는 절차입니다, 절차. 조선은 엄연히 군주의 나라인데, 대원군과 기무처가 모든 사안을 결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실질적으로 기무처를 움직이는 이는 완화군이란 평이 자자해요. 김홍집이든 어윤중이든 김옥균이든 홍영식이든 죄다 완화군의 뜻을 따른다 이겁니다.”
“으음…….”
“완화군이 아무리 총명하고 성상의 장자라지만 나이가 채 약관도 안 되었습니다. 젊으니까 패기가 넘치는 건 좋은데, 구제도를 파괴하고 나라를 다 뜯어고치려고 해요. 대원군이라도 중심을 잡아주셔야 하는데, 손자 말이라면 다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아니, 국가 대사가 손주 소원 들어주는 자리랍니까?”
“하지만 완화군이 나라에 해가 될 일을 한 적이 없소이다. 그러니 대원군께서도 신뢰하시는 것 아니겠소?”
홍순목은 이선을 옹호했지만, 아들인 홍영식과도 이 문제를 놓고 무척 대립했었다.
“네가 완화군의 사람인 걸 알고 있다. 너뿐만 아니라 금릉위(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도 완화군의 사람이지. 왕족과 신료가 사사로이 파당을 형성하는 건 좋지 못한 일이다.”
“아버님, 파당이 아닙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한데 모인 동지들입니다.”
“진실이 어쨌든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완화군이 성상의 장자라지만 신하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만사에 너무 나서는 것 같아 걱정된다.”
“군 대감은 단연코 이 나라 조선에서 가장 영명한 분이십니다. 국가의 대사를 맡으심이 당연합니다. 오히려 지금도 부족함이 많다고 느껴집니다.”
“어허! 말조심하렷다! 왕족이, 그것도 어린 왕자가 아무리 총명하다 한들 사사로이 정치에 관여하는 건 법도에 없는 일이다!”
“아버님, 지금 그런 명분 놀음을 할 때가 아닙니다. 소자가 세계를 둘러보니, 서양과 조선의 격차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지금이라도 서양의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위태롭습니다. 오직 완화군만이 명확히 나아갈 길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네가 서양에 다녀오더니 아주 머리가 단단히 돌았구나. 지금이야 대원군이 완화군을 보호하지만, 앞으로 어찌 될 줄 아느냐? 부디 자중하거라. 남양 홍씨 가문을 망칠 생각하지 말고!”
“아버님의 고언은 귀담아듣겠으나, 저는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할 뿐입니다.”
“영상 대감, 저는 완화군의 충심이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급진적인 자세가 걱정이라는 겁니다. 개화 좋아하는 애송이들은 전부 완화군을 따르면서 나라를 서양으로 바꿔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번 개혁안이 전국에 공포되면 분명히 저항이 클 겁니다. 지금까지는 대원군이 어떻게든 여론을 무마시켰지만, 이제는 대원군에게도 사대부의 지탄이 쏟아질 겁니다.”
홍순목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좌상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가 되오. 내가 조정을 대표해서 성상과 대원위께 말씀 올리리다.”
그날 밤, 이선은 대원군의 호출을 받아 운현궁으로 향했다.
“할아버님, 찾아계셨사옵니까?”
“음. 앉거라.”
이선이 예를 표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대원군이 대뜸 말했다.
“대체 어디까지 나아갈 생각이냐?”
이선은 대원군이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국정 말이다. 이번 군제 개혁과 재정 개혁에 동의하긴 했지만, 내가 우려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엇을 우려하시옵니까?”
“빤히 알면서도 되묻지 마라! 네가 하려는 일은 조선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500년간 내려온 법도를 바꾸는데, 저항이 없을 것 같으냐?”
대원군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선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예상했던 바이다. 대원군의 입으로 들으니 오히려 다행이군.’
“개혁을 하려면 당연히 기득권의 저항이 있는 법입니다. 20년 전, 할아버님께서 개혁을 추진하실 때도 그랬지요. 하지만 할아버님께선 오랜 적폐를 청산하시고 개혁을 이루셨습니다. 척족의 수중에 있던 비변사를 폐지해 왕권을 세우셨고, 호포제를 실시해 군역의 폐단을 없앴습니다. 적폐의 근원인 전국의 서원도 철폐하셨지요. 백성이 할아버님을 칭송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선은 대원군의 업적을 늘어놓았다.
“저 기득권 가진 자들의 눈치를 보았다면, 단 하나라도 이뤄낼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늘 그랬듯이 논의만 하다 끝났겠지요. 할아버님께서 단호하게 일도양단으로 개혁의 칼날을 내려쳤기에 저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소손은 할아버님의 행적을 좇아, 지금 조선에 꼭 필요한 시무의 일을 처리하려는 것입니다.”
대원군의 업적을 칭송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뜻을 단호하게 내세우는 손자를 보면서, 대원군은 마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했다.
‘역시 나의 대업을 이룰 건 이 녀석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그런가, 너무 급진적이지 않은가. 아직 내 보호가 필요하다.’
“일에는 선후라는 게 필요한 법이다. 나도 서원 철폐만큼은 사대부의 극한 반발을 우려해 오랜 시간을 들인 후에야 진행할 수 있었다. 너는 너무 서두르려고 하지 않느냐?”
“그만큼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서양과 서양을 따르는 일본과 조선의 격차는 너무나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서양과는 족히 100년, 일본과도 족히 30년의 격차는 있습니다. 단기간에 이를 메우지 못하면, 국운이 위태롭습니다.”
“나는 쉬이 동의하기 어렵다. 꼭 일본처럼 서양의 방식을 따라야 하느냐? 조선에는 조선의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 서양의 앞선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 이상까지 나가긴 어렵다.”
대원군은 개혁에는 동의했지만, 결국 조선의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파였다.
“할아버님. 제게는 한 가지 뜻밖에 없습니다. 위로는 왕실을 반석 위에 올리고, 아래로는 민생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부국강병을 달성해 자주독립을 이뤄 내고, 조선을 그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이선은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수단을 쓰느냐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켜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