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08
– 108화에 계속 –
108화 독대(獨對)
임금은 김옥균에 이어 사관과 내관도 밖으로 내보냈다. 말 그대로 독대였다.
편전에 단둘이 남자, 임금이 입을 열었다.
“그간 부자간에 너무 격조했다. 내 너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았느니라.”
“신의 불충 불효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선이 사죄를 청하자, 임금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너를 꾸짖고자 함이 아니다. 너는 나의 장자요, 이 나라의 대신이다. 진작 너와 대화를 하고 싶었느니라.”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군.’
“황공하옵니다.”
“네 나이가 열일곱이지?”
“그러하옵니다.”
“네가 태어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구나. 네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나라의 동량이 되니 기쁠 따름이다.”
“모두 성상의 은혜 덕입니다.”
비록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멀리하긴 했어도,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네 나이도 열일곱이니 이제 슬슬 혼례를 고려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뜬금없이 이야기가 결혼으로 흘렀다. 대원군도 혼례를 치르라고 권유를 한 지가 여러 번이라, 이선으로선 매번 답하기가 곤란했다.
“신은 아직 어려 혼례를 치르기가 이르다고 생각하옵니다. 하물며 국가의 대사가 많사온데, 어찌 사사로이 혼례를 생각하겠습니까?”
임금이 껄껄 웃었다.
“하하, 열일곱이면 사내 구실 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너를 얻었을 때가 열일곱이었느니라.”
임금과 완화군의 나이 차이는 불과 16살에 불과해서, 부자간이라기보다는 나이 터울 많은 형제 같았다.
“네가 국가의 대사를 맡고 있으니 혼례가 더욱 필요하지. 지아비가 되면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 될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신도 때가 되면 혼례를 치르고 싶으나, 당분간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미뤄 두려고 합니다. 지금은 오직 나라와 성상께 충성하고 싶습니다.”
“대단한 충정이로고. 혹여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더냐?”
임금의 말에 이선이 순간 긴장했다.
“다른 뜻이라니요?”
“내가 홍영식과 민영익에게 들으니, 네가 서양 여인들에게서 무척 흠모를 받았다고 하더구나. 혹여 서양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느냐?”
‘뭐야, 그런 의미였냐. 난 또…….’
이선은 정말로 ‘다른 뜻’을 품고 있으니, 지레 놀랐던 것이었다.
“서양은 동양과 법도가 많이 달라, 여인과의 사교를 중시합니다. 귀족이나 관료의 부녀와 사교를 하는 건 곧 그 부친과 지아비를 존중하는 의미지요.”
“허허, 동양에서는 큰일 날 소리로구나. 동양에서는 그랬다간 가문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외교 활동의 목적으로 사교를 한 것인데, 어찌 딴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래? 네 나이에는 여인에 대한 마음이 있어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다만 조선의 법도 상, 왕자가 서양 여인에게 마음을 두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서양인을 벗으로 왕실에 데려올 수는 있겠으나, 가족으로 삼을 수 없지는 않겠느냐? 아니라고 하니 되었다.”
“심려를 끼쳐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임금은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려고 이선과 독대하려는 게 아니었다. 임금은 웃음을 거두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혼례 이야기는 이쯤 하고. 네가 서양을 직접 보았으니, 그 정체(政體)에 대해서도 잘 알 것이다. 행록 중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도 그쪽이었다.”
“예, 나라 별로 조금씩 다르옵니다.”
“미국과 법국은 민주국이라 하니 조선이 직접 참고할 사례는 아니다. 그렇다면 영국과 덕국, 아라사가 있다. 내 너에게 묻고자 한다.”
“하문하시옵소서.”
“이 세 나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국이라지. 이 들의 차이는 무엇이냐? 각각 군주의 역할은 무엇이며, 조선은 어디를 모범으로 삼는 게 좋겠는가?”
‘과연, 이게 본심이로군.’
그래도 군주가 직접 서양을 모범으로 삼겠다고 하니, 이선은 차분히 설명했다.
“영국은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열강이나, 군주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습니다. 대의제(代議制)로 선출된 의회에서 국가를 다스릴 수상을 뽑습니다. 군주는 이를 추인하지요. 국가를 다스리는 건 수상과 그 각료들입니다.”
“그건 영국의 군주가 여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냐? 어찌 여인이 군주가 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근 50년째 재위 중이었다.
“아니옵니다. 의회와 수상이 영국을 다스린 지 오래되었으니, 지금의 군주가 여왕이라서가 아닙니다. 영국은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이상이 이뤄지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영국의 의회제도라는 건, 조선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을 성싶다.”
조선 사람에게 입헌군주제는 아직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었다. 군주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영국과 세계의 패권을 놓고 대립한다는 아라사는 어떠한가?”
“아라사는 전제군주국입니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리는 차르, 즉 황제가 모든 권력을 갖고 있지요.”
“호오, 동양과 비슷하구나.”
“하오나 서양에서는 흔치 않은 일입니다. 서양에서는 점차 인민의 정치적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황제께옵서는 현명하신 분으로, 낙후한 아라사에 대개혁을 이뤄낸 현명한 군주이시옵니다. 그렇기에 헌법과 대의제를 도입하려는 어심이 있으십니다.”
“아라사 황제가 바로 네가 공을 세워 은혜를 입은 분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감히 황제를 시해하려고 한 역신을 네가 제압했다지. 그 덕으로 조선과 아라사의 관계가 두터워졌으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네 공이 크다.”
‘정말로 득을 크게 봤지.’
임금의 치하에 이선이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신도 이로 인해 국가에 이바지하게 되었으니 기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아라사를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현명한 군주가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게 동양의 정체와 비슷하지 않은가?”
‘…… 전제군주가 하고 싶으시다, 그런 말인가?’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라사는 엄청난 대국이고 그 인민이 1억이 넘습니다. 그렇기에 대의제가 쉽지 않고, 지금까지 전제정이 나름의 효율성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느꼈기에 지금의 황제께서도 개혁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조선은 아라사와 환경이 많이 다른 만큼, 모범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덕국입니다.”
이선은 독일을 예로 들었다.
“덕국의 정체는 영국과 아라사의 중간에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영국처럼 의회가 있고, 재상이 정치를 맡습니다. 하지만 의회의 다수파가 선출하는 게 아니라, 카이저라 불리는 황제가 재상을 임명합니다. 재상은 오직 황제에게만 책임을 지고, 황제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 재상이 국가를 다스립니다. 그 재상이 바로 작금에 가장 뛰어난 정치가, 비스마르크라는 이입니다.”
이선은 비스마르크의 업적을 말하고, 자신이 비스마르크와 회견하여 조선 중립국을 추진했던 일을 상기시켰다.
“덕국은 바야흐로 세계에서 떠오르는 강국인즉, 일본 또한 덕국을 모범으로 국가를 개혁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군제, 법제, 행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덕국의 방식이지요. 덕국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성공시킨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선도 덕국을 모범으로 삼아 개혁을 이끌어나가야 합니다.”
이선은 19세기 초 프로이센 개혁에 관해 설명했다. 군주 이하 지배층이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대패한 이후, 멸망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위로부터의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는지.
“그 결과 분열되었던 덕국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만들었으며, 세계에 떠오르는 강국이 되었습니다. 국가는 부유하고, 군대는 막강합니다. 인민의 권리가 신장하였으되, 그렇다고 하여 군주와 귀족의 권리가 깎여나간 것이 아닙니다. 보로사(프로이센) 왕은 전 독일의 황제가 되었으며, 융커라 불리는 전통적 귀족들도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조선의 왕과 양반들도 프로이센의 왕과 융커처럼 혁신의 길을 따라갔으면 좋겠군.’
물론 독일도 보수적 융커와 부유한 시민계급, 새로 성장하는 노동계급 사이에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지만, 비스마르크의 탁월한 정치력으로 조율을 이뤄내고 있었다.
“네 말을 듣고 나니 덕국이 실로 부국강병의 모범이라는 걸 알겠다.”
“황공하옵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덕국을 본받아, 군주가 현명하고 유능한 이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정치를 맡기란 뜻인가?”
임금의 어조가 전보다 날카로워졌다.
‘그래 주면 오죽 좋겠냐마는…….’
이선은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덕국에서도 군주의 군권(君權)은 신성합니다. 재상의 권력은 황제로부터 위임받은 것입니다. 재상은 황제를 보좌하여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역할이지요. 덕국은 영국과 아라사 중간의 정치 체제라, 이른바 ‘프로이센식 군주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조선의 재상은 누구인가?”
“현명하고 유능하며, 결단력이 강해 개혁의 추진력이 있으며, 민심의 지지를 얻는 인물이어야지요.”
임금이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대원군이라는 건가?”
임금의 지적에 이선은 한 발짝 물러났다.
“신이 감히 논할 사항이 아니옵니다.”
“대원군께서 과인을 대리해 섭정한 게 10년이다. 그때는 과인이 어려서 그랬지. 임오년 이후에도 2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군란은 과인의 실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과인 역시 책임을 통감하고 정치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과인이 군주로서 하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기무처의 결의를 결재하고, 책을 읽는 게 과인의 일이다.”
“…….”
임금의 한탄에 이선은 입을 다물었다. 뭐라 답하기가 어려운 문제였다.
“완화군, 네가 나보다 대원군을 더 따르는 걸 이해한다. 나는 네게 애정을 주지 않았지만 대원군은 주셨으니까. 네가 나에게 섭섭한 점이 많았으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다.”
임금의 갑작스러운 반성에 이선이 고개를 숙였다.
“신이 어찌 전하께 섭섭한 감정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신의 군주이며 부친이십니다.”
“아니, 아니다. 내가 아비로서 미안한 점이 많다. 이숙원에게도 미안할 따름이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는 내 본의가 아니었다. 세상에 어느 아비가 자기 자식을 미워하겠느냐? 폐비가 너희 모자를 하도 견제하니 어쩔 수 없이 그 뜻을 따라준 것이다. 세자가 태어난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지.”
모든 책임을 민씨에게 전가하는 임금을 보고, 이선은 딱하단 생각이 들었다.
‘무능한 가장의 전형적인 변명이로군.’
“선아, 너는 내 아들이다. 그것도 맏이지. 네가 나를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너를 특별히 생각한다. 이 아비가 해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너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덕인지 나라의 대들보로 성장했다. 내가 너의 능력에 감탄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과찬이십니다. 핏줄이 타고나니 그런 것이겠지요.”
임금의 찬사에 이선은 그 공을 돌렸다. 임금도 표정을 풀고 웃었다.
“하하, 그런 건가. 그렇다면 과연 내가 아들은 잘 두었군.”
“황공하옵니다.”
“나는 네가 하려는 일에 공감한다. 이 나라 조선에는 개화가 시급하다. 서양은 조선, 아니 중화보다 훨씬 발전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저들을 따라잡지 않으면, 나라의 존속이 위태로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하께서는 과연 영명하십니다. 언제부터 그리 생각하게 되셨는지요?”
“뒤로 물러나니 생각할 기회가 많아지더군.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네가 친군 전영, 아니 이제 친위대 1대대군. 그들이 기관포 시범을 보일 때였다. 서양에는 저런 군대와 무기가 셀 수 없이 많은 것 아니냐?”
“실로 그러하옵니다. 신이 군비 확충을 노력하고 있지만, 서양에 비하면 한 줌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둘러 강력한 군대를 편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개혁이 뒷받침되어야 하지요.”
“그래, 이제 네가 하려는 일이 이해가 된다. 서양처럼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개혁을 해야지.”
임금은 거듭 이선에게 지지의 뜻을 표했다.
“전하께서 그리 생각하시니 실로 나라의 복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나라의 군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지 않겠는가?”
임금은 마침내 속내를 밝혔다.
“지금처럼 뒷방에 물러앉아 옥새나 찍는 것보다, 마땅한 군주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나와 너는 부자이자 같은 뜻을 품은 동지로서 국가를 이끌어나갈 수 있다. 나의 뜻이 곧 너의 뜻이고, 너의 뜻이 곧 나의 뜻이 될 것이다.”
임금의 말 속에는 다양한 뜻이 있었다.
‘부왕이 나와 개화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표한다는 건, 결국 내가 가진 군사력과 자금력, 외국과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한 것이다. 아버지인 대원군보다 아들인 내 쪽이 훨씬 대하기도 편할 것이고. 요컨대 대원군을 대신해서 자신과 손을 잡자는 말이로군.’
이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생각을 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없지. 임금이 개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내게 실권을 주겠으니, 대원군과 보수파를 권력에서 몰아내자는 것이겠지? 고종이 대원군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건 맞다. 하지만, 정치적 동맹자로서 신뢰가 가는 인물인가?’
결국, 척화냐 개화냐는 다음 가는 문제고, 중요한 건 정치가로서의 신뢰 문제였다.
임금은 초조하게 아들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선은 마침내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