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09
– 109화에 계속 –
109화 궁정 정치
“성상께서는 이 나라의 군주요, 제 부친이십니다. 신이 전하께 충효를 다해야 하는 건 당연한 도리입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인데도 임금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나는 너의 충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면…….”
“다만 지금은 민심을 하나로 모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대원군은 척화와 개화를 막론하고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 분입니다. 지금 대원군께서 물러나신다면 분명히 여론의 분열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조정이 하나가 되어 개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 때를 기다려야 하옵니다.”
이선이 대원군 퇴진 불가를 외치자, 임금은 실망스러웠지만 표정 관리를 했다.
“나 역시 대원군께서 당장 섭정의 지위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하는 건 아니다.”
“역시 전하께서는 영명하십니다. 대원군께서는 전하와 조선을 위해 충심을 다하고 계시며, 나라가 안정되면 물러나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싶어 하십니다. 다만 지금은 비상시국이니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원군의 춘추가 어느덧 예순넷이시니, 영원히 섭정하시겠습니까? 때가 되면 대원군께서 스스로 물러나실 것입니다.”
“으음…….”
문제는 그 ‘때’가 언제냐는 것이었다. 임금의 생각에 대원군은 절대로 스스로 내려올 사람이 아니었다.
“신은 의회 설립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먼저 상원에 해당되는 중추원을 설립해 사대부의 공의(公議)를 대표할까 합니다.”
“중추원의 권한은 어느 정도인가?”
“영국의 귀족원과 덕국의 연방참사원을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론을 수렴하고 정부의 국정을 자문하는 기관으로, 실질적인 권한은 없습니다. 하오나 대원군께서 중추원 의장이 되면 국가 원로로서 존경을 받으며 섭정에서 물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로 명예로운 은퇴가 아니겠습니까?”
이선은 자신이 계획하는 의회 설립을 대원군의 진퇴 문제와 연결했다.
‘이렇게 되면 왕도 의회 설립을 반대하고 훼방을 놓을 이유가 없지.’
“사대부의 공의를 대표하고, 대원군께서 의장을 맡는다. 좋은 계획이다.”
“예, 신료들과 중추원 관제를 논의하겠습니다. 이르면 내년 중으로 중추원을 개설하고자 합니다.”
“음, 좋다. 추진하도록 하라.”
임금은 중추원이 실질적 권한이 없는 자문기관이라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대원군이 중추원 의장에 만족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신은 조선을 덕국처럼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 말인즉, 프로이센 왕 빌헬름이 카이저, 즉 황제가 되었듯이 전하 또한 대조선의 대군주로서 영광을 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그날이 올 때까지 성심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신을 믿어주소서.”
이선의 말은 이중적이었다. 임금을 제국의 황제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드러냈지만,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처럼 유능한 재상에게 국정을 일임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
“훌륭한 말이다. 그렇게 되면 과인은 더 바라는 바가 없다. 과인은 경의 지모에 대사를 맡기고자 한다.”
아들을 대하는 어투에서 대신을 대하는 어투로 바뀌었다. 임금의 엄숙한 말에 이선은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오늘 독대하여 나눈 이야기는 결코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시옵소서.”
“이르다 뿐인가? 경 역시 그리해 주길 바란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선은 임금에게 절하고 편전에서 물러났다. 이선은 중전에게 인사하고 가라는 임금의 권유대로 대조전(大造殿)으로 향했다. 대조전에는 새 중전의 처소가 있었다.
“중전 마마, 완화군 입시옵니다.”
“어서 안으로 뫼시어라.”
이선은 중전에게 절했다. 중전은 법적인 어머니이니, 이선으로선 자식으로서의 예를 갖추어야했다.
“어마마마, 기체일향후만강 하시옵니까?”
“군이 염려해 준 덕에 평안합니다. 군은 어떻습니까?”
“소자 또한 마마의 염려로 건강합니다.”
“자, 편히 앉으세요. 다과를 가져오라 하지요.”
중전 김씨는 대원군이 공들여서 간택한 여인이었다. 1883년 가을, 이선이 보빙사를 이끌고 미국에 있을 때 국혼이 이루어졌다.
대원군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유교적 여성 교육을 충실히 받아 순종적이며, 권력을 행사하지 않을만한 가문에서 뽑았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여흥 민씨는 일부러 배제했다.
새 중전은 헌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낙선재 경빈(慶嬪) 김씨의 일족이었다. 유학자로 이름 높은 노론 명문가인 광산 김씨이나 국구(國舅)가 될 부친은 이미 서거했고, 친인척 중에도 고위직은 없었다.
노론과 사대부를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척족으로 세력화할 수 없는 가문에서 뽑은 것이다.
“완화군이 이렇게 와 주니 좋군요. 군은 내게도 맏아들이지 않습니까.”
“황공하옵니다.”
모자(母子)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중전의 나이 올해 열여덟, 이선과는 겨우 한 살 차이였다.
더욱이 중전은 동안(童顔)에 미모도 뛰어나서, 모자라기보단 남매가 더 어울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부로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앞으로 종종 대조전과 동궁전에도 와 주길 바라요. 세자에게도 믿음직한 형님이 되지 않습니까.”
“예, 그리하겠습니다.”
중전 김씨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원군이 상당히 공을 들여 뽑은 여인답게, 전혀 투기심이 없었다. 폐비의 자식인 세자를 친자식처럼 대했고, 완화군도 장자이자 조정 대신으로 대했다.
“완화군, 온 김에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옵소서.”
“주제넘게 들릴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근래 전하께서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완화군은 전하의 장자가 아닙니까? 군이 전하께 힘이 되어 주십시오.”
이선은 중전의 말뜻을 생각했다.
‘정치적 의미인가, 가족으로서의 의미인가?’
“내가 지어미로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지 못하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전하께 아무런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선은 중전의 표정을 보고, 곧 정치적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라고 여겼다.
중전 김씨는 착하고 순종적이나, 정치적 동반자였던 민씨와 비교하면 임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임금은 중전을 대원군이 뽑아 보낸 사람으로 여겼고, 국혼을 치른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부부관계는 여전히 서먹서먹했다. 임금은 궐내에서도 고립감을 느꼈다.
‘정치적으로 보면 중전은 대원군이나 내게 해가 되지 않을 사람이지. 하지만 한 사람 인생 망쳤군.’
이선은 임금보다 중전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전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자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이도 어리고, 복잡한 궐내 정치를 모르는 여인이었다. 임금이 중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그녀의 문제가 아니라 대원군에 대한 오랜 불신과 경계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도 성상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저는 성상의 신하이자 장자이니, 마땅히 충효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완화군은 충신이자 효자의 자질을 타고나셨습니다.”
중전의 치하에 이선이 물었다.
“하오면 곤전(坤殿)께서는 어떠신지요?”
“무엇이 어떠냐는 물음입니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곤전께서도 심히 적적하실 듯합니다. 사가(私家)에 계시다 궁으로 들어오셨으니…….”
이선은 중전의 외로움을 짐작했다. 궐내에서 진짜 고립된 건 중전이었다.
여흥 민씨들로 궁을 가득 채웠던 폐비와 달리, 중전은 친인척 중에 조정에 있는 이가 없었다.
대원군이 외척에 대한 강한 경계를 보인 탓도 있지만, 중전 스스로도 폐비를 경계로 삼아 처신을 극도로 조심히 하고 있었다.
“그게 여인의 운명이지요. 하물며 나는 과분하게도 국모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전은 의젓하게 답했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소자라도 괜찮으시다면, 앞으로 종종 찾아뵙고 말벗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마마의 말씀대로 저는 맏아들 아니겠습니까.”
중전은 기쁘게 웃었다.
“그래 준다면 나야 고맙지요. 하지만 군은 국가 대사로 매우 바쁘니…….”
“그래도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를 뵐 시간이 없겠습니까.”
“고맙군요. 그럼 보빙사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 역시 서양에 대해 궁금한 게 많습니다.”
“예,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사온데…….”
이선은 중전과 한동안 환담을 나누고, 환송을 받으며 대조전을 떠났다.
“군이 와줘서 오늘은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 다음에도 꼭 대조전에 들려주세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밝게 웃으며 자신을 환송하는 중전을 보고, 이선은 기분이 편안해졌다.
중전은 이선이 정치적 계산을 하지 않고 만나도 될 유일한 왕실 사람이었다.
‘중전과 좋은 관계를 맺어서 나쁠 건 하나도 없지. 중궁전이 전처럼 나와 적대 관계가 아니라, 우호 관계인 것만으로 궁정 정치에서 얼마나 유용한가.’
결국, 저도 모르게 정치적 계산으로 귀결되는 자신을 보며,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왕족이란 어쩔 수 없는 정치적 동물이군.’
대원군을 그저 할아버지로, 임금을 그저 아버지로, 중전을 그저 어머니로, 세자를 그저 동생으로 여길 수 없는 운명이었다.
자신과 조선의 이익을 위해서, 이들은 모두 이용대상이었다.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궁정 정치는 중대한 요소였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군.’
이선이 퇴궐하는데, 김옥균이 돈화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상과 말씀이 길어졌나 보군요.”
“성상뿐만 아니라 중궁전, 대비전, 동궁전까지 모두 인사 올리고 나오는 길이라서.”
김옥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선에게 밀착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성상과 어떤 말씀을 나누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성상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는 고균도 잘 알고 싶지 않을까 싶은데?”
“그 무슨 말씀입니까?”
“애초에 성상을 부추긴 게 고균이 아니오? 조선에서 개화를 이룩하려면 군주의 힘이 필요하다고.”
김옥균이 손을 내저었다.
“결코, 아닙니다. 소생은 물론 성상의 신하이지만, 개화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미 군 대감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럼 아무런 사전 교감도 없었다고? 내가 보기에 성상께선 단단히 준비하신 것 같은데.”
이선이 추궁하니, 김옥균이 솔직히 실토했다. 애초에 그는 거짓말을 할 성격이 못 되었다.
“성상께서 군 대감과 개화당을 지지해주면, 단숨에 개화를 성사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군 대감과 개화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계속 올렸습니다.”
이선은 김옥균을 흘겨봤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어쩌니저쩌니해도, 성상께서는 이 나라의 군주이십니다. 대원군이든 기무처든 사대부든 왕명에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이선은 냉철했지만, 김옥균은 열을 올렸다.
“더 이상 권력을 분점할 이유가 없지요. 지금은 비상한 수법으로 대경장을 이뤄야 합니다. 대감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겨우 이 정도 경장 가지고도 보수파들은 반대하는데, 더욱 근본적인 대경장을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개화를 앞당기려면, 보수파들을 조정에서 밀어내야 합니다.”
“그러니 성상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처럼 해야 합니다. 저들의 천황처럼 대군주를 신성한 국가의 상징으로 높이 받들고, 실질적인 권력은 대감과 개화당이 독점하는 겁니다. 그리고 유신을 이끌어나가는 것이지요.”
이선은 한숨을 쉬었다. 김옥균이 메이지 유신에 심취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자는 건 천진한 발상이었다.
‘김옥균이 역사처럼 갑신정변을 일으키진 않아도, 왕의 지지를 받는 궁정 쿠데타로 정권을 잡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군.’
김옥균과 개화당 지도부는 메이지유신처럼 단숨에 정권을 잡는다는데 생각이 사로잡혀, 갑신정변과 같은 무리수를 두었다. 이선의 등장으로 정변과 같은 비정상적 방법은 이뤄지지 않겠지만, 여전히 급진적인 해결책에 골몰했다.
“일본의 왕정복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모양인데. 일본과 조선은 엄연히 처지가 다르오. 저들의 존황은 막부로부터 권력을 천황에게 되찾아오는 것이었지. 실질적으로는 천황을 조종하는 유신 세력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렇습니다. 조선이라고 왜 그러지 못하겠습니까?”
“일본의 군주와 조선의 군주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오! 저들의 천황은 유신 이후 신처럼 숭배되지만, 700년간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소. 그러니 지금과도 같은 상징의 위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거요.”
이선은 결코 임금이 동갑내기 무쓰히토(睦仁, 메이지)처럼 상징적 군주의 위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임금은 이선에게 상당한 신뢰를 보였지만, 이선은 임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족관계를 떠나 역사를 통해 가늠할 수 있었다.
‘역사적 행보를 보면, 유감스럽게도 고종은 신뢰가 가는 인물이 아니다. 역사와 다른 전개로 인해 생각이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이선이 임금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면전에서는 좋은 말만 했지만, 결코 그에게 권력을 몰아줄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