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1
– 11화에 계속 –
11화 탈출
한번 결단을 내린 이상, 행동은 빠르고 철저할수록 좋았다.
이선은 최대한 빠른 시일에, 최소한의 사람에게만 알리고, 즉시 조선을 떠날 예정이었다.
‘조선에서 미적거리다간 언제 다시 암살 시도가 있을지 모른다.’
이선은 즉시 안영흠을 불러들였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완화궁의 재산이 얼마나 되겠소?”
안영흠은 자산 여부를 묻는 이선의 질문에 순간 당황했지만, 즉시 출납전을 들고 와 확인했다.
“연초라 면세전에서 호조를 통해 새로 들어온 쌀과 돈이 있어서 여유가 좀 있군요. 올해 쓰라고 들어온 게 2877냥 5전 2푼입니다. 대략 5천냥 정도 가용 가능합니다.”
“쌀과 패물을 빨리 처분하고, 엽전은 모두 청국 은으로 바꾸시오. 경강상인은 청국 은을 취급하겠지?”
“상평통보를 청국 은으로 바꾸면 가치를 얼마 안 쳐줄 텐데요…….”
대원군의 당백전(當百錢) 발행으로 인해 화폐경제가 박살이 나자, 1867년 급하게 청나라에서 동전을 수입해서 사용했다.
하지만 청전은 상평통보에 비해서도 가치가 떨어지는 화폐였다. 갑작스러운 청전의 대량 유통은 또다시 물가 폭등으로 이어져 국민 생활을 곤경에 빠뜨렸으며, 화폐에 대한 불신 풍조를 더욱 고조시켰다.
임금은 친정을 실시하자마자 청전을 폐지했다. 하지만 청전의 금지는 아무런 대안도 없이 즉각적으로 실시되어 나라 경제에 또다시 혼란을 야기했다. 이 정책은 당시 정부 수입의 3분의 2를 증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겠지. 도성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완화궁방이 어디요?”
“황해도 배천(白川)입니다.”
“연백평야라. 가치는 잘 쳐주겠군. 개성의 송상(松商)에게 팔아서, 홍삼을 삽시다. 청나라에서 조선 홍삼이 그리 인기라지.”
홍삼은 이 무렵 조선의 최대 무역품이었다. 홍삼 판매세, 즉 포삼세(包蔘稅)는 조정의 주된 수입원이었다.
특히 대원군 집권기에 포삼세는 급증하는 지방 군사비로 대거 전용되었다.
친정 이후 포삼세 전용을 지방 군영에서 중앙으로 옮겼는데, 이로 인해 지방 군영이 재정적으로 몰락하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그 결과, 일본 군함 한 척에 해상 방위가 뚫려 버린 것이다.
“대감, 주상께서 내린 궁방전을 팔다니요? 그리고 홍삼은 사역원의 허가 없이 해외로 반출 불가합니다. 밀무역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생각보다 말귀가 어두우시군. 나는 청나라로 갈 생각이오. 청나라에서 조선 홍삼만큼 가치가 큰 게 또 어디 있겠소?”
아편으로 골치를 썩이던 청나라에서, 조선 홍삼은 최고의 특효약으로 여겨졌다. 홍삼 1근이 조선에서는 천은(天銀, 순도 높은 은화) 1냥이지만, 무역을 하면 7냥이 되니 7배나 남는 장사였다.
국가가 이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 계속 세액을 늘리니, 실제 인삼을 쪄서 홍삼으로 가공하는 개성 송상이나 의주 만상(灣商) 입장에서는 분통 터질 일이었다.
밀무역을 엄격히 금지하는 조선 조정의 압박에도, 서해상에서 청나라 선박이나 서양 선박과 은밀히 밀무역을 하는 경우가 워낙 많았다. 상인들뿐만 아니라 홍삼 무역이 돈이 된다고 판단한 양반들이 지방관과 결탁하여 밀무역을 자행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대감, 청국으로 가신다니요. 너무 급작스러운 말씀이시라…….”
“그대가 짐작했듯이, 중궁전이 나를 죽이려 하오. 그러면 내가 조선 땅에서 어찌 살아갈 수 있겠소? 청국으로 가면 기회가 있소. 나를 도와주시오.”
이선은 안영흠을 설득했다. 실무를 처리해 줄 가신이 필요했으므로, 이선은 최소한 안영흠은 대동할 생각이었다.
“나는 외국에서 기반을 얻어, 3년 이내로 조선으로 돌아올 것이오. 이는 나와 운현궁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큰 보탬이 될 터. 그대가 나를 도와주면, 국가의 공로자가 될 것이오.”
안영흠은 잠시 생각을 했다. 이미 완화군에게 운명을 걸어 보기로 결심한 터라, 이대로 조선 땅에 남아 있다가 중전에게 죽으면 끝이었다. 이선의 말대로 청국으로 가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도박을 해 볼 만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고맙소. 실무는 완화궁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안 공에게 맡기고 싶소. 완화궁의 가산을 빨리 처분 가능한 것으로 정리해서, 청은과 홍삼으로 바꿉시다. 그리고 청나라로 갈 배편을 수배해 봅시다. 완화궁, 아니 필요하면 운현궁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속히 처리해 주시오.”
“그리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장무영을 불러 주시오. 그 또한 함께 갈 생각이니.”
이선은 이윽고 장무영을 불러들였다. 안영흠으로부터 귀띔을 받은 모양인지, 비장한 표정이었다.
“장 공, 아무래도 난 당분간 조선 땅에서 살기 어려울 듯하오. 그래서 청나라로 갈 생각인데, 함께 따라오겠소?”
장무영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저는 이미 대감께 충성을 맹세한 몸이니, 어디든 따라갈 것입니다.”
“고맙소. 앞으로 내 안전을 그대에게 맡기지.”
“믿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놓으시옵소서. 지체 높으신 군 대감께서 저를 귀히 대해 주시니 오히려 죄를 짓는 기분입니다.”
장무영이 무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선은 장무영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알겠네. 그럼 무영이라고 부르지. 그럼 괜찮은가?”
“예, 그리 불러 주십시오. 훨씬 편합니다.”
“알겠네. 안 공이 채비를 마치는 대로 떠날 생각이니, 그대도 준비하도록 하게.”
이선은 급히 서찰을 작성해서 봉했다.
“우리가 떠나기로 하는 날, 운현궁에 전달해 주게.”
대원군이 알면 말리려고 할 게 뻔했다. 이선은 양주 별장에 있는 대원군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날 생각이었다.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장무영은 고개를 조아렸다.
안영흠과 장무영에게 실무를 맡긴 이선은, 자신의 방에서 외국으로 가져갈 물건들을 챙겼다.
‘대원군의 석파란. 내 신분을 알림과 동시에, 외국 권력자에게 선물하기로는 딱이군.’
석파란(石坡蘭).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호인 석파를 딴 난초 그림들을 말한다. 젊을 적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였던 이하응은 난초를 잘 치는 화가로도 유명했다.
대원군은 맏손자를 특별히 아껴, 관례를 올린 이후론 매년 생일 선물로 석파란을 선물했다. 손자에게 보내는 글과 석파의 낙관이 찍혀 있는 석파란은, 이선이 대원군의 손자임을 증명하고 외국 귀빈에게 선물하기로 적절했다.
‘나를 완화군으로 책봉한다는 책문(策文). 흠, 이것도 챙겨 두자.’
여차하면 신분을 증명할 용도로 필요했다.
‘어차피 돈은 가산을 정리하면 나오니까. 꼭 필요한 것들만 가져가자.’
완화군으로서의 신분을 증명하거나, 추억을 가질만한 서한과 패물만 챙기는 걸로 준비를 끝냈다.
안영흠은 완화궁의 가산을 정리하느라 바쁘게 시일을 보냈다.
이선의 기대 이상으로, 안영흠의 실무 능력은 탁월했다. 이선이 나설 것도 없이 송상과 모든 거래를 처리한 것이다.
“송상들은 대원위 집정기에 많은 혜택을 받았지요. 지금이야 대부분은 중궁전과 민씨에게 선을 대고 있다지만, 여전히 대원위께 은혜를 입었다고 여기는 이들도 많습니다. 적어도 그때는 부정부패가 덜했고, 상인들에게 긁어가는 돈도 적었으니까요.”
“수고하셨소. 믿을 만한 이들이겠지?”
“신뢰할 만한 자들입니다. 운현궁에서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니 흔쾌히 나서더군요. 이들을 통해서 가치를 제대로 받고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운현궁의 이름을 판 효과가 있었다. 과연 대원군이 아끼는 손자라는 건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럼 홍삼은 얼마나 대줄 수 있겠다고 합디까?”
“비밀리에 1천 근까지는 대줄 수 있겠다는군요. 단, 그들도 목숨을 내놓고 협력하는 것이니만큼, 이문의 절반을 얻길 원합니다.”
‘홍삼 1천 근이면 단순 계산해도 천은 7천 냥이군. 그리고 그중 이문의 절반을 달라…….’
“은이 아니라, 현물로 주겠다고 전하시오. 홍삼을 판매한 후 서양목으로 주겠다고 하면 그들도 받아들일 것이오. 가능하면 일회성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말이지.”
상인들이 홍삼을 판매하고 주로 받아오는 물건은 서양목, 즉 곱게 짜인 하얀 무명천을 말한다. 공식적으로 조선에서 서양 물건은 판매 금지이지만, 서양 면직품은 암암리에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강화도 조약 이후 서양 면직품을 사들여 조선에 파니 공식화되었다. 비록 개항장인 부산에서만 거래가 이뤄진다지만, 강화도 조약의 무관세 혜택을 빙자하여 일본 상인들이 남기는 이문이 엄청났다. 하지만 조선 상인들은 여전히 서양과의 무역이 금지되어 있으니, 더욱 배가 아플 노릇이었다.
“그런 조건이라면 그들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선이 송상에게 중국과 밀무역 할 길을 터주면, 그들은 이선을 동아줄처럼 여길 게 분명했다.
“정말로 놀랍습니다, 대감. 완화궁에만 계시던 분이 어찌 상인의 일까지 알고 계시는지……?”
안영흠은 진정 놀랐다. 어떻게 왕자가 상인의 일까지 알고 있을지 놀랄 따름이었다.
“운현궁에서 내게 교육을 잘 시킨 덕분이지. 내 조부님이신 국태공께서는 조선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모르시는 게 없으시오.”
이선은 편리하게, 또 할아버지 핑계를 댔다. 대원군이 조선 팔도의 정보를 쥐고 있다는 건 안영흠도 잘 아는 이야기고, 더욱이 어릴 적부터 특별히 완화군을 아껴서 양육까지 맡았으니 그럴 법한 이야기였다.
“과연 그렇군요. 국태공의 혜안과 군 대감의 총명함에 또다시 놀랍니다.”
‘뭐, 그런 건 전혀 가르쳐 준 적이 없지만……. 아무튼 납득하니 편하군.’
이선은 앞으로도 계속 대원군을 써먹을 생각이었다.
이선의 명을 받은 안영흠이 재차 거래를 성사시켰다. 송상은 완화궁이 중국과의 홍삼 무역을 계속 주선해 준다는 조건으로, 홍삼 1천 근을 투자하기로 했다. 홍삼 밀무역으로 나오는 이문 중 일부는 서양목으로 교환하여 조선으로 보내기로 했다.
송상은 운현궁이 완화궁을 내세워 밀무역에 나서는 것이라고 어림짐작하고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송상과 나는 계속 이문을 얻을 수 있겠지.’
“청나라로 가는 밀무역선도 송상이 제공해 주겠다고 합니다.”
“아주 좋소. 그럼 언제 떠난답니까?”
“정월 그믐날에 예성강에서 배를 띄운다고 합니다.”
“그럼 그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 두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이선은, 영보당에게 작별을 고하러 찾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머니에게만은 작별을 알려야 했다.
“어머님, 선이옵니다. 문안 인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들어오시오.”
이선은 내당으로 들어가자마자, 영보당에게 큰절을 했다.
“어머님, 소자가 꼭 말씀드리고픈 바가 있습니다. 진작 말씀을 올렸어야 했는데…….”
“미루어 짐작해 알고 있소.”
영보당은 뜻밖에도 담담하게 말했다.
“안 서방이 완화궁의 가산을 급박히 정리하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 뜻을 어찌 모르겠소? 한양을 떠나려는 것이겠지.”
아무리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려고 해도, 완화궁의 안주인 영보당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영보당은 안영흠을 불러서 결국 이실직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선의 뜻이 확고함을 깨달은 영보당은 상황을 눈치챘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어머님의 헤아림이 옳으십니다.”
“이 어미가 어찌 군의 큰 뜻을 막으려 하겠소? 그래서 나도 준비를 하였소.”
영보당은 이선에게 궤짝을 전달했다. 이선이 열어 보니, 뜻밖에도 은자가 들어 있었다.
“아니, 이건…….”
“은자 5백 냥이오. 주상께서 완화궁을 짓고 가산으로 쓰라고 2천 냥을 내리셨을 때, 남은 돈을 여태 보관하고 있었지. 나는 필요가 없으니, 그대가 쓰도록 하시오.”
“어머님의 크나큰 은혜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선은 진심으로 감격하여 머리를 숙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집을, 아니 나라를 떠나겠다는데 말리지 않고 흔쾌히 돕는 어머니였다.
“어디로 갈 생각이오?”
“일단 청나라로 갑니다. 그곳에서 활동하여, 조선으로 돌아올 기반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청나라……. 내 생각보다 더 멀리 가는구려. 아니, 온갖 핍박을 받을지도 모르는 이 조선보다 대국에서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겠지.”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3년은 넘기지 않을 것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이선은 앞으로 2년 반, 1882년 7월 임오군란 이전까지 조선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반드시 돌아오리라 믿겠소. 넓은 세상에서 뜻을 이루고 금의환향하길 바라오.”
“예, 그때까지 어머님께서도 만수무강하옵소서.”
담담히 헤어지려고 했던 모자였지만, 작별을 앞두고 감정이 북받쳐 옴은 어쩔 수 없었다.
“선아, 건강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이 어미는 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영보당이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하고 이선을 끌어안으니, 이선 역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래도 이 조선 땅에서 나를 순수하게,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구나.’
임금에게 버림받고 오직 아들만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이선은 반드시 금의환향을 이룰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