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11
– 111화에 계속 –
111화 천도(天道)
“내가 아라사 황제와 밀약을 맺었다고? 그래, 어떤 밀약을 맺었단 말인가?”
이선의 등장에 유생들이 얼어붙었다.
“그……, 그게…….”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소두가 용기백배하여 말했다.
“군 대감이 나라의 금령을 어기고 멋대로 외국으로 떠나 사사로이 외교를 한 건 사실이 아닙니까! 청의 북양 대신 이홍장과 손을 잡고, 심지어 아라사 황제의 빈객이 되어…….”
“그 덕분에 조선이 서양과 유리한 조약을 맺을 수 있었지. 저들이 청과 일본에서처럼 군함을 몰고 와 대포를 쏜 다음에야 조약을 맺을 건가?”
“청은 오랑캐인 만주족의 나라요, 섬나라 왜인들은 논할 것도 없습니다. 조선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중화의 도를 지키고 있는 나라입니다. 어찌 서양에게 굴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선이 씩 웃으면서 물었다.
“대체 그 중화의 도란 무엇이오? 내가 어리고 견문이 짧아 잘 모르겠구려.”
“천도(天道)를 이릅니다! 인간과 금수를 구분하는 길이기도 하지요. 천도를 공경하고 높여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일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흥한 이유이며, 덕을 없애고 위력을 사용하여 경(敬)을 행할 것이 못 된다고 한 것은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의 망한 이유입니다. 양이들이 하는 일은 바로 걸주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찌 군 대감께서는 양이의 방식을 추종하십니까?”
걸주와 비교하는 건 지도자에 대한 최악의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보통 이런 말이 나오면 분노가 쏟아질 법도 한데, 이선은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탕무와 걸주는 삼천 년 전의 사람들이오. 작금의 정세에 모범으로 삼기에는 너무 옛날 사람들이 아닌가?”
“조선이 천도를 지키는 한, 성현의 가르침은 만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양이와 이를 추종하는 사교의 무리들을 어찌 용인하려 하십니까? 이들은 백성들의 떳떳한 윤리를 파괴하고 우리나라의 풍습과 교화를 어지럽혔으니 천도로 용납할 바가 아니며 왕법으로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왕법을 지켜야 할 조정에서 양이와 결탁하여 사교를 용인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소두가 작정하고 강경 발언을 쏟아내니, 그를 말리던 유생들도 힘을 내서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사교를 용인하면 조선의 윤리와 강상(綱常)이 파괴될 것입니다!”
“사교를 금하시고 양이를 몰아내소서!”
“천도를 따르소서!”
“하하하…….”
이선이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선은 웃음을 멈추고 정색했다.
“그대들이 말하는 천도에 대해 잘 알겠소. 그럼 이제 내가 아는 천도에 관해 말해 볼까.”
좌중의 시선이 이선에게 집중되었다.
“대저 천도란 무엇이냐? 그게 하늘의 도리를 일컫는 것이라면, 내가 아는 천도란 이렇다. 위로는 국가를 부강하게 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이선의 어조가 강경해졌다.
“그런데 너희 유생의 무리들은 수백 년간 대체 무엇을 하였느냐? 조정에 파당을 형성하고 서원에서 공리공담을 일삼을 뿐이었다. 뿐이냐? 위로는 군주의 성명(聖明)을 가려 국가의 자산을 도적질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착취하며 그들의 고통을 더 심화시켰다! 그런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천도를 외치는가?”
이선의 준엄한 비판에 감히 반박하는 자가 없었다.
“국내적으로는 척족의 오랜 실정으로 나라가 혼란스럽고, 민생은 피폐하다. 국외적으로도 서양 열강이 호시탐탐 조선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너희가 진정 유자(儒子)이고 선비라면 국가의 위기와 백성의 고통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지 않는가? 공리공담을 일삼는 게 아니라 백성을 위한 해결책을 가져와야 하지 않는가? 나와 기무처의 대신들은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오직 수천 년 묵은 케케묵은 논리를 숭배하며 헛소리나 지껄여대는구나!”
얼어붙어 반박조차 하지 못하던 유생들을 대신해, 소두가 기껏해야 지엽적인 논박에 나섰다.
“공맹(孔孟)의 가르침더러 수천 년 묵은 케케묵은 논리라니요? 성현의 가르침은 만세에 불변할 진리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성학(聖學)을 바탕으로 세워졌거늘, 어찌하여 대감께서는 왕족이 되어 이를 부인하십니까?”
“진실로 공자와 맹자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나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유생들은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실제로는 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강행하면서 했다는 말이지만, 정식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말이다. 아마 대원군도 공식적으로 그런 말까지 하기는 어려웠겠지.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어……. 어찌 감히 그런 말을…….”
“그리고, 공자와 맹자는 시대의 문제와 백성의 아픔을 정확히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한 분들이다. 너희같이 썩은 선비 놈들이 그 후예를 자처한다면, 무덤에서 뛰어나와 네놈들 머리통을 갈겨주고 싶을 테지.”
이선이 유생들과 논쟁하는 사이, 친위대 참령 정유진이 1개 소대를 이끌고 광화문으로 달려왔다.
“공자와 맹자를 대신해, 내가 네놈들에게 가르침을 주겠다. 친위대 제군, 저 썩은 선비 놈들에게 도리를 알려주어라!”
“병사들, 매우 쳐라!”
퍽! 퍼억!
정유진의 명에 친위대가 곤봉을 들고 유생들을 흠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친위 1대대는 옛 고려대대 병사들로, 관리와 지주의 횡포를 못 이기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이주한 사람들이니만큼 양반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다.
조선에 돌아온 후로는 조선의 법도를 준수하라는 이선의 엄명에 계급적 적대감을 누르고 있었지만, 명령이 떨어지자 그동안의 분노를 담아 마음껏 내려쳤다.
“간나 새끼들, 아주 배때지가 불렀구만 기래?”
“양반 나으리들, 어디 상놈한테 맞아 보라!”
“사, 상소를 올리는 선비를 폭력으로 대하다니……. 폭군 연산, 광해도 이러지는 않았소!”
얻어터지면서도 입은 움직이는 소두를 향해 이선이 비웃었다.
“걸주 다음은 연산과 광해인가? 이왕 비난하는 김에 다해보는 게 어떤가?”
“그렇다! 대원군과 완화군, 그 일당은 군주를 기망하고 위협하여 정권을 농단하니, 저 삼흉오적은 망탁조의의 무리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
‘삼흉’이 조선의 권신을 비난하는 표현이라면, ‘망탁조의(莽卓操懿)’, 즉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에 대한 비유는 권신에 대한 최악의 비난이었다.
“저놈이 감히……. 입을 찢어주랴?”
어지간한 비난에 익숙한 김옥균도 격분하여 죽일 기세였다. 하지만 이선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죽여선 안 되오. 순교자로 만들어줄 순 없지. 공공연히 망신을 주고 본보기로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오.”
“군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김옥균도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어린 이선이 어떻게 이렇게 냉철한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대부들 지껄이는 수준이 다 그렇지 뭐.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보면서 답답하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렇게라도 푸니까 속 시원하구먼.’
21세기에 이선우였던 시절, 그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종시대사』 편찬에 참여했었다.
이선우가 하는 일은 사료들을 분석해서 필요한 자료들을 선별하는 것이었는데, 일은 쉽지 않았지만, 1차 사료를 정말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때 매일같이 느꼈던 조선 지배층에 대한 분노와 한탄의 마음을 이번 기회에 여과 없이 풀고 있었다.
퍽! 퍼억!
친위대 병사들은 소두를 기절할 정도로 흠씬 두들겨 팼다.
“그, 그만 좀…….”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중화의 정신으로 폭력을 막으면 될 것 아니냐?”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유생들도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됐다. 그만.”
이선의 명에 친위대 병사들이 동작을 멈췄다.
“순검들은 이 쓰레기들을 모두 수거해서 한강 너머로 던져 버리도록.”
“추포하지 않으십니까? 의금부에 가두어 배후를 캐내야지요.”
김옥균의 말에 이선이 고개를 저었다.
“저놈들 꼴을 향촌에서 봐야 본보기가 되지. 조정을 능멸하는 자들이 어떤 꼴을 보는지 똑똑히 알겠지.”
“하긴, 본보기는 확실히 되겠군요.”
“그리고 저놈들은 분명 조종한 무리들과 다시 만날 거요. 사람을 붙여뒀다가 그때 일망타진 해야지.”
“아, 그렇군요. 역시 군 대감은 현명하십니다. 적대세력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곤죽이 되어 순검들에게 끌려 나가는 유생들을 보며 이선은 차갑게 웃었다.
“이번에는 저들이 말로만 했으니 나도 몽둥이로만 돌려줬지만, 저들이 그 이상으로 나간다면 나도 총칼을 쓸 수밖에.”
“옳으신 말씀입니다. 무력을 가진 건 우리니, 여차하면 총칼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지요.”
김옥균은 고개를 끄덕이며 친위대를 쳐다보았다. 비록 지금은 곤봉을 차고 있지만, 최신 무기로 무장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든든했다.
이선이 친위대에게 명해, 광화문에서 시위하던 유생들을 두들겨 팼던 소문이 퍼져나갔다.
“자네들 광화문 앞에서 양반들 터지는 거 봤어?”
“봤지, 봤어. 한가위 선물로 나라에서 좋은 구경거리 줬지.”
“꼴좋다. 나라에서 모처럼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하는 데 그걸 못 참고 짖어대니!
“짖어대는 개는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아주 복날 개 패듯이 시원하게 패드만.”
“맞네, 맞아. 어후, 속 시원하다.”
백성들은 속 시원하다고 환호했지만, 양반들은 분개했다.
“완화군의 무소불위가 아주 끝을 보는구려. 아니, 상소를 올리는 선비를 공공연히 두들겨 패다니, 이런 폭거가 어디 있소?”
“큰일이오. 완화군이 대원군의 나쁜 점만 물려받은 모양이오. 저렇게 무지막지해서야 어디…….”
“아니, 그런데 완화군 면전에서 삼흉오적이니 망탁조의니 그랬다고 하던데. 그걸 듣고 참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래요? 면전에서? 그놈들도 미쳤구먼.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완화군도 막말이 엄청났다던데? 공맹이 살아 돌아오더라도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더군.”
“성현께 어디 그따위 망발이 있나! 역시 완화군은 이단에 물들어 있소.”
“양이와 친교하고 사학을 용인한 걸 보면 모르겠소? 어쩌면 그들과 한패일지도 모르지.”
“완화군이 사교도일 수 있다는 말이오?”
“설마, 왕족이 천주쟁이라는 게 말이 되오?”
“병인년 이전, 대원군의 일족도 사학을 믿는다는 소문이 돌았소. 바로 주상의 생모와 누이지. 운현궁의 영향을 받은 완화군이 믿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소.”
“그건 옛날 말이지. 대원군이 천주쟁이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데…….”
“그러니 한번 시험을 해보자는 겁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잘 되면 완화군을 천주쟁이로 몰고, 대원군과 균열을 일으켜볼 수 있지 않겠소?”
“하긴, 적어도 대원군을 지지하는 유림들을 우리 쪽으로 다시 끌어당길 수 있겠군.”
“그거 묘안이군. 한번 추진해 봅시다.”
“천도를 어지럽히는 이단, 완화군과 그 일당에게 우리의 대의를 보여줍시다.”
어둠 속에서 일단의 무리가 음산하게 웃었다.
조정 관료들은 냉철하던 이선이 폭력을 썼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개화파 관료들도 본래 유학을 익힌 이들이니만큼, 조선의 정치 논리상 유생을 폭력으로 다스렸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보수파 관료들은 더했다. 이들은 대원군에게 이선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대원군은 운현궁으로 이선을 불러들였다.
“너는 언제나 냉철했는데 이번엔 의외로구나. 쓸모없는 선비 놈들을 두들겨 팬 건 속은 시원할지 몰라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왜 그리 공공연히 망신을 주었느냐?”
“천도를 들먹이며 조정을 겁박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본보기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들은 당분간 조정의 시책에 맞서 감히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쯧, 나는 뭐 사대부들이 짖어대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들을 내버려 둔 줄 아느냐? 대낮에 병력을 동원해 공공연히 두들겨 팰 게 아니라, 야밤에 묻어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차라리 내게 알렸으면 천하장안을 시켜 흠씬 두들겨 패줬을 것을.”
대원군은 폭력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시기와 장소를 지적했다.
“이번에는 명분이 충분했습니다. 저들이 할아버님과 백부님, 소손을 지칭해 삼흉이라 일컬으며, 심지어 망탁조의에 비유했습니다.”
“뭣이? 임금의 생부와 형, 장자를 삼흉과 망탁조의 운운해? 감히 면전에서 그따위 말을 지껄여!”
대원군이 분노로 눈썹과 수염을 치켜세웠다.
“너는 그따위 망발을 지껄인 놈들을 때리기만 하고 그냥 풀어 줬단 말이냐? 역적으로 다스렸어야지!”
“풀어줘서 돌려보내야 본보기가 되지요. 저들을 조종한 자들도, 조정을 능멸하는 자들이 어떤 꼴을 보는지 똑똑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선은 김옥균에게 했던 말을 대원군에게도 했다.
“이미 사람을 붙어두었습니다. 그자들은 분명히 조종한 무리들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때 일망타진해야지요.”
대원군이 표정을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네 말이 맞다! 역시 내 손자는 똑똑하구나. 그래, 광화문 앞에 거적 깐 애송이 몇 놈 잡아봤자 분풀이나 할 뿐이지. 적당을 일망타진해야지.”
대원군은 만족스러웠다. 그는 개혁을 이끌 정권의 안정을 위해선 ‘적’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양과 천주교를 적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새로운 적을 찾아 골몰하던 대원군에게, 적당(適當)한 적당(賊當)의 윤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