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19
– 119화에 계속 –
119화 아시아의 프랑스
계손향의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이선이 손수건을 건네자 그녀는 황송해하며 받았다. 계손향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제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신앙을 유지한 이유는……. 신앙이 없다면 제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이 조선 땅에는, 가족도 없고 미래가 없는 제가 살아갈 어떠한 희망도 없었습니다. 오직 천주님에 대한 믿음만이, 천국에 대한 갈망만이 저를 이 세상에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
이선은 비로소 이제야, 왜 기층 민중과 여성들 사이에서 천주교가 굳건한 믿음을 얻게 되었는지 마음으로서 이해가 되었다.
천한 신분으로 살아가기엔 어떠한 희망도 없는 조선 사회에서, 현실의 가혹함 속에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은 오직 인간의 평등을 약속하는 종교였던 것뿐이었다.
이는 국가의 책임이었다. 국가가, 지금의 조선이 그들에게 절망을 주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자유와 평등을 약속하고 이루어진다면, 무엇 때문에 현실을 고통으로 여기겠는가?’
“하오나 군 대감의 말씀을 듣고 나니, 다시 희망이란 걸 품어 보아도 되겠습니다. 대감께서 제게 살아갈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선은 빙긋 웃었다.
“자유로워지면 무엇을 해 보고 싶소?”
계손향은 생전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에게 자유라는 말은 없었던 개념이었다. 그런데도 계손향에게도 가슴속 소망은 있었다.
“대감의 말씀대로 공부를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로웰과 신부님께 들은 바로는, 미국과 법국에서는 여성도 공부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익혀서, 저처럼 고아가 된 아이들에게도 가르침을 주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이 나라에선 공부하는 것조차도 특권인 세상이다.
“약속하겠소. 이미 조선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을 할 수 있고 자유롭고 신앙을 가질 수 있는 날이 도래했소. 앞으로는 신분에 상관없이, 성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공부해서 그 재능을 꽃필 날이 올 것이오. 반드시, 꼭 그렇게 될 겁니다.”
그것은 꼭 계손향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조선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리될 수 있다면, 천국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상에 있는 것이겠군요.”
계손향은 눈물을 거두고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이름처럼 꽃향기가 은은히 나는 듯했다.
“군 대감!”
“음?”
김옥균이 이선 앞에 절을 하더니 무릎을 꿇었다.
“저는 이미 대감께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하오나 오늘 더욱 충성심이 드높아졌습니다. 대감께서는 가장 고귀한 신분이면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도 굽어살피시고 희망을 주려 하십니다. 제가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계손향과 김옥균 말고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장무영도 감격한 듯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마찬가지요. 고균도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동지로 대하고 있잖소.”
김옥균은 개화당의 대의로 신분제 철폐를 내세웠고, 진심으로 이를 실천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이선도 김옥균 앞에서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다. 대원군은 말할 것도 없고, 개화파 관료 중에서도 평등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건 김옥균뿐이었다.
“저는 대치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불교의 평등사상과 서양의 개화사상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낡은 신분제도에 강력한 회의(懷疑)를 가지게 됐지요.”
천주교가 새로운 종교로 들어와 침투했지만, 본래 조선 민중의 평등사상을 자극하는 건 불교였다. 근래에는 동학이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사상을 내세워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온데 대감께서는 어떻게 왕족의 신분으로 평등사상을 가지게 되셨습니까?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건 내가 21세기 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해 봐서…….’
물론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Les hommes naissent et demeurent libres et égaux en droits.”
이선이 프랑스어를 말한 후, 계손향에게 뜻을 물었다.
“제가 법어를 잘 알지 못해서……. 하오나 어떤 뜻인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이선은 계손향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유’, ‘평등’, ‘권리’란 단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겼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나서 살아간다.”
이선이 말한 건, 「인간과 시민에 관한 권리 선언」 제 1조였다. 프랑스 혁명이 공표한 천부인권의 개념이었다.
“법국, 즉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 1조. 1789년, 그러니까 약 100년 전에 나온 선언이지. 이는 단순히 서양의 개념이 아니오. 100년의 시간이 지나, 동양에서도 이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소.”
이선은 김옥균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균은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 되려 하니,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고 싶다 하였소. 나 역시 그러하오. 단순히 지리적 이유가 아니라, 진심으로.”
“예, 그리 말하였습니다.”
“조선이 개화로 나아간다 한들 중국보다 영토가 넓을 수는 없고, 일본보다 군사력이 강하긴 어렵소. 하지만 조선은 다른 힘을 갖고 있소. 민중이 갖고 있는 폭발적인 힘. 외적에 맞서 의병이 일어나고, 권력에 맞서 봉기가 일어나오. 심지어 군대와 백성이 봉기를 일으켜 궁궐을 점령하고 정권이 교체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지.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일이오.”
‘앞으로 1890년대에는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 운동이 더욱 대중적이고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지. 그 폭발력을 실제 역사처럼 국가가 억누르는 게 아니라, 순환할 수 있게 해야 해.’
“민중의 폭발적인 힘을 개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하오. 지배층의 관점에서 민중을 우매한 교화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면 개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소. 인민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민중을 우리의 지지 기반으로 만들어야 하오.”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개화파는 사회를 변혁하고 신분제를 철폐하려 하였지만, 민중의 외면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들의 높은 이상과 달리, 민중을 우매한 대상으로 바라보아 소수의 음모자로 남았기 때문이다. 민중의 압도적인 근왕 의식과 반일 감정을 외면하고 정변을 추구했으니 실패할 수밖에.’
그렇기에 이선은 조심스러웠다. 임금이 거추장스러우면서도 군주의 권위를 존중했다. 사대부는 물론이고, 백성들도 근왕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급진적인 서구화를 추구하고 싶으면서도, 아직은 백성의 의식이 뒤따르지 않았기에 속도를 조절했다.
“오늘 고균이 날 여기로 잘 데려왔소. 초심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거든.”
이선은 좌중을 바라보았다.
“남자든 여자든, 귀하든 천한 신분이든 상관없소. 가장 낮은 위치에 있더라도 나의 백성이오. 아니지, 앞으로는 같은 조선 국민이 되어야 하지. 우리 모두 같은 국민이 될 것이오.”
왕족 출신 이선, 명문가 출신 관료 김옥균, 평민 출신 무사 장무영, 기생 계손향.
앞으로 모두 같은 ‘조선 국민’이 되어야 했다.
이선은 계손향에게 말했다.
“곧 일어날 터이니 그대는 물러가 쉬시오. 고균을 통해 가끔 연락하지. 주위는 의식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시오. 곧 여자에게도 공식적인 배움의 기회가 올 테니까.”
새로운 세대가 동일한 조선 국민이 되려면, 국민교육이 필요했다. 이선은 교육에 신분과 성별의 제약 같은 걸 둘 생각이 없었다.
“단, 오늘 나눈 이야기는 기억 속에만 남겨두시오. 누구에게 말하면 그대가 곤란해질 수 있소.”
“물론입니다. 저만의 기억으로 봉해두겠습니다. 군 대감의 건승을 천주님께 언제나 기도드리겠습니다.”
계손향은 꿈에서 깨어난 듯, 이선을 향해 정중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계손향이 방에서 물러나자, 이선은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의 숙청으로 대내 정세는 당분간 안정될 것이고, 대외 정세도 여건이 무르익고 있소. 아라사와 덕국을 비롯한 서양 각국이 조선의 개혁을 지지할 것이오.”
“미국 공사 푸트도 개혁을 지지할 의사를 보였습니다. 영국 영사 애스턴은 불확실하나, 개인적으로는 우호적입니다.”
일본 공사가 은근히 개화당을 지원할 것처럼 말했으나, 김옥균은 여전히 다케조에보다 푸트나 애스턴을 더 신뢰했다.
특히 푸트와는 인간적으로도 매우 밀접한 사이인지라, 김옥균은 대개혁을 추진 중이라고 벌써 몇 번이나 푸트에게 언질을 준 바 있었고 푸트 또한 공감의 뜻을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 부임한 베베르 또한 이선과 개화당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김옥균은 더욱 더 자신감을 얻었다.
“다만 청국과 일본이 변수요.”
지금 시급한 것은 조선에서 각축장을 벌이려는 청과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외세의 간섭 없이 내정개혁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열강의 지지를 받는 중립화에 매진하고 있었다.
‘청과 일본은 조선의 말은 안 듣지만, 서양의 말을 잘 듣겠지.’
“청국은 법국과 전쟁 중이니 간섭을 시도하지 못할 겁니다. 일본이 조선의 개화와 자주독립을 명분으로 내건 상황에서 개혁을 방해하지는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일본이 청을 계속 자극하고 있으니 걱정이오. 조선이 진정한 자주독립국이 되려면 언젠가는 결별해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청과 관계가 틀어지면 곤란하오. 적어도 10년의 세월은 필요하오.”
이선은 10년간 충실히 국력을 신장시킨 후, 조선이 본격적인 세계무대로 뛰어오르길 희망했다. 그전까지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정말로 청일 개전까지 이어지진 않을 겁니다.”
“나는 그건 걱정 안 하오. 내가 걱정하는 건, 일본이 계속 청을 자극해서, 이러다간 청이 조선을 잃게 되겠다고 우려하게 되는 거요. 북경에서 조선은 너무 가깝거든. 청이 군대를 파견하거나 내정간섭을 시도하면 곤란하오.”
실제 역사와 달리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은 없었지만, 언제든 그럴 가능성은 있었다.
“절대 안 될 일이지요.”
“내가 이홍장과 교류하며 그를 안심시키겠소. 결국, 청의 외교 결정권자는 북양대신 이홍장이니까.”
이선은 계속 이홍장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충성표시를 했다.
‘조선은 걱정하지 말고 법국과의 전쟁에 매진하시라. 반드시 대청이 안남에서 승리를 거두길 바란다. 조선은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이선은 청이 프랑스와 함께 최대한 오래 베트남의 수렁에 빠지길 희망했다. 만약 청이 또다시 전쟁에 져서 베트남을 잃으면, 그 위신을 회복하겠다고 조선에서 강경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저는 일본과 계속 접촉을 취하며, 그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막겠습니다.”
“조선이 틈을 주지 않는다면, 일본도 감히 나서진 못할 거요. 유구나 대만 문제로 갈등을 빚는다면 모를까, 조선이 청일전쟁의 명분이 되어선 안 되오.”
“명심하겠습니다.”
역사대로라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과 일본의 갈등은 심화하고, 끝내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본과 손을 잡고 조선에서 반청 정변을 일으킬 주체가 없으니, 일본도 섣불리 일을 꾸미진 못할 것이다. 청나라도 걱정할 일은 없고.’
“자, 그러면 외부적 요인을 빨리 제거하고, 우리가 꿈꾸던 대경장, 대개혁을 추진합시다.”
“예, 저와 동지들은 수없이 꿈꾸고 있습니다. 조바심을 내고 싶진 않지만, 그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정세가 좀 더 무르익을 때까지, 라고 하지만 나는 갑신년을 넘길 생각이 없소. 하루라도 빨리 대개혁을 실시해야지.”
“오오, 정말로 얼마 안 남았군요.”
이미 갑신년 가을, 양력 11월이었다.
“앞으로 두세 달 안에 승부를 볼 생각이오. 그때가 오면, 정말로 아시아의 프랑스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지.”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저와 동지들은 신명을 다해 군 대감을 보좌하겠습니다.”
“신분제를 완전히 철폐하고 제도를 개혁하여, 모든 이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조선. 토지개혁과 식산 흥업을 이뤄내어, 모든 이들이 굶주리지 않는 조선.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을 이뤄내어, 어떤 외세도 넘볼 수 없는 조선.”
이선의 미래상에, 김옥균은 물론이요 장무영까지 흥분하는 표정이었다.
“모든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새 시대의 기초를 만들어 나갑시다. 새 시대는 갑신년 겨울, 1885년 초에 시작될 것이오.”
이선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다짐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