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25
– 125화에 계속 –
125화 계엄(戒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신 회의.
“주 조선 공사 베베르의 보고에 따르면, 이선 공작과 묄렌도르프는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중립 지지, 독립과 영토 보전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유사시 독립을 보호하기 위하여 함대와 해병을 인천에 파병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외무대신 기르스가 보고에 이어 말했다.
“조선에 소규모의 군대라도 파병하여 조선을 보호하게 되면 러시아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그 전개를 주시하기 위해 인천에 군대를 파병할 수도 있겠습니다.”
“청과 일본의 입장은 어떤가?”
“현재 청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주일본 공사 다비도프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이 당장 조선을 침략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향후 수년 이내로 일본이 조선의 항구를 장악 할 수도 있으며, 이 경우 청과 일본의 전쟁 가능성이 우려된다고 하였습니다.”
“청일 간에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러시아는 최대한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태평양 연안의 방위를 위해서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유사시, 태평양 함대는 한반도 연안을 방어하기 위해 어떤 선박을 보낼 수 있는가?”
황제의 물음에 해군부 차관 셰스타코프가 답했다.
“현재 구축함 1척, 클리퍼함 2척, 의용함대 수송선 1척이 중국 수역에, 클리퍼함 2척이 중국 항구에 정박 중입니다. 필요할 경우 지중해에서 구축함 4척, 흑해함대 소속 수송선 4척을 조선의 항구로 보낼 수 있으며, 대략 45일가량이 소요될 것입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클리퍼함 1척과 포함 3척을 추가로 보낼 수 있습니다.”
“부족하군. 이래서 태평양 함대가 증강될 필요를 느낀다네.”
알렉산드르 2세는 혀를 끌끌 차다가, 외무대신에게 물었다.
“러시아와 조선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뭐라 생각하는가?”
“조선과 러시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조선이 러시아의 태평양 지역과 접경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 이 지역은 군사·경제적으로 발전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국가가 조선에서 지배권을 갖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흐음.”
“다만 청 또는 일본과의 충돌이 일어난다면, 현재 러시아가 조선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더 큰 희생과 더 많은 수고를 치러야만 할 것입니다.”
기르스의 외교관다운 조심성에, 황제의 호출을 받아 페테르부르크로 온 아무르 군정장관 코르프 남작이 발언권을 얻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극동 문제의 전문가로 통했다.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일, 청이 승리한다면 청은 조선을 통해 항구로의 진출로를 확보하고 경제적으로 우수리 지역을 압박해 올 것이고, 만일 일본이 승리한다면 일본은 서구 열강 중 한 나라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에 위험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러시아로선 최악입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한반도에 영향력을 구축하고,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 주는 것이 더 이득입니다.”
이와 같은 판단은 차르의 정세 판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기르스의 말처럼 러시아에 있어 조선은 주변국과 갈등을 빚어가면서까지 후원을 할 가치는 없었지만, 청이나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는 건 극동 영토의 안전을 침해하는 일이었다.
러시아는 지금껏 동아시아 문제를 두고 ‘끈기 있는 인내와 관망’ 정책을 유지했지만, 행동으로 옮겨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영국에게 엄청난 경쟁의식을 가진 차르로서는 이미 청과 일본에서 영국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조선만큼은 러시아에 우호적인 정권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짐의 생각 또한 그렇다. 조선에서 다른 국가가 지배권을 갖는 사태가 벌어지도록 하면 안 된다. 조선은 조선으로 남아 있을 때가 러시아에 가장 유리하다.”
“그러하옵니다.”
“마침 조선의 정권을 주도하는 이선 공작은 러시아와 특별한 관계이다. 공작이 권력을 잡아 계속 조선의 정권을 맡고, 조선이 청과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로 성장한다면 가장 좋은 일이지.”
황제는 만족감을 표했다. 러시아에 쫓기듯 왔던 조선 왕자가 암살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 러시아의 극동 정책까지 도움을 주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이 모든 게 매우 좋다. 거듭 말하지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전력을 다해 노력해서 조선인들을 손에서 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조선에 전폭적인 지지의 뜻을 전하라.”
1885년 새해가 밝았다. 태음력을 사용하는 조선은 여전히 갑신년 11월이었지만, 태양력을 사용하는 서양 각국은 크리스마스와 새해로 이어지는 연말연시를 맞아 잠시 업무를 중단하고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미국 공사와 독일 영사는 중국으로, 영국 영사는 일본으로 휴가를 떠났으나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여전히 한성 정동의 공사관을 지키고 있었다.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는 러시아는 그레고리력보다 12일이 늦어 아직 12월 중순에 불과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 여유롭게 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중국을 경유하여 한양에 도착한 전신은 다시 극비로 봉해져 있었다. 평문으로 보냈다가는 우려가 있어 암호문으로 보내졌다.
공사관에 도착한 암호 전문을 베베르는 떨리는 마음으로 외교관용 암호문과 대조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서울. 주 조선 공사 베베르에게
러시아 제국은 조선 국왕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1. 러시아 제국은 조선 왕국의 자주독립과 중립국 선언, 영토 보전을 약속한다.
2. 러시아 제국은 유사시 조선의 독립과 국왕의 안전을 보전하기 위해 고려인으로 구성된 부대와 태평양 함대의 일부를 파견한다.
3. 청이나 일본, 혹은 영국이 조선 문제에 개입 시, 독일, 프랑스 및 미국과 협조하여 청일 양군의 철수와 조선 중립 안을 관철시킨다.
4. 러시아 제국은 조선의 개혁을 지지한다. 향후 조선이 원한다면, 조선군의 신식 편제를 도울 장교와 하사관으로 구성된 군사고문단을 파견한다.
5. 이 모든 일이 계획대로 이행될 경우, 러시아 제국은 조선 왕국과 육로통상조약을 획정한다. 만약 가능하다면, 러시아 해군이 동절기에 사용할 포트 라자레프(함경도 영흥만) 또는 포트 운콥스키(경상도 영일만)의 상용 임대를 제안한다.
이상의 일은 아무르 군정장관 코르프 남작과 주 조선 전권공사 베베르의 판단과 재량에 맡긴다.
알렉산드르 2세
*
공사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베베르는 자신도 모르게 전율에 떨었다.
“극동에서의 세력 균형과 러시아의 국익을 위하여 전면에 나게 되었구나.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베베르는 즉시 이선과 묄렌도르프를 찾아가 황제의 뜻을 전했다.
“좋은 소식에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와 귀국의 호의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그만큼 조선과 이선 공작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어찌 잊겠습니까?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이 부국강병을 달성해 자주독립으로 나아가면 곧 러시아의 국익과 일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근대 외교사 전공자인 이선은 러시아가 왜 ‘주변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주독립 국가 조선’을 선호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점에서 조선은 러시아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이선이 외유대상으로 청에 이어 두 번째로 러시아를 택한 이유였다.
러시아는 말뿐인 중립 지지가 아니라, 유사시 실질적인 군사력 지원도 가능하다는 걸 알려주었다.
연해주의 고려대대는 1중대가 조선군에 편입되었지만, 3년 계획으로 예정된 대대의 편제가 완료되어 4개 보병 중대 480명의 병력을 편성했다. 황제는 남은 고려대대의 병력도 조선군에 편입시키고, 태평양 함대를 조선 해역으로 보낼 뜻을 보였다.
1885년 1월 4일, 베트남 북부 랑선에서 청군과 프랑스군이 접전을 벌였다. 청군은 1만 2000명으로 프랑스군의 6배나 되었는데도, 또다시 프랑스군에게 참패하고 퇴각했다. 청군의 전사자는 600여, 부상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승리에 고무된 프랑스군이 베트남 북부에서 청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대공세를 준비하자, 청 조정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광서와 광동군 2만 명을 추가로 파병한다. 결코, 안남에서 물러나지 마라!”
이젠 정말 중화제국으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이선이 이홍장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처럼, 청 조정은 베트남의 상실과 굴복이 열강에 선례를 줄까 봐 우려했다. 베트남의 운명과 조선의 운명이 하나로 연동되는 셈이었다.
청군의 참패와 추가 파병 소식이 전신을 통해 조선으로 전해졌다. 청인들은 거듭된 참패에 충격을 받았고, 관리와 군인들조차 동요할 정도였다. 원세개는 이홍장의 호출을 받아 급히 천진으로 향했다.
일본은 ‘을 안’을 택한 정부의 방침에 따라 예전과 달리 잠잠해졌지만, 이선과 개화당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청일 간에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계속 퍼트리게. 민심이 동요되어도 상관없으니.”
청일 간에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한양 민심이 동요했다.
“청국이 법국에게 연전연패하고 있다더라.”
“일본이 법국과 손을 잡고 청을 치려 한다던데.”
“일본이 조선 땅에 있는 청군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보낸다는 말도 있네.”
“아니, 그럼 한성이 전쟁터가 될 거 아닌가? 피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도망부터 갈 궁리를 하면 어떡하나? 조정에서 대책을 세우겠지.”
“하긴, 대원군이라면 외국군의 침범을 그냥 지켜보실 분이 아니시지.”
“완화군은 청은 물론이요, 서양 각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잖나. 분명히 대책이 있을 것이네.”
“그러게.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터인데…….”
백성들뿐만 아니라 관리들 사이에서도 청과 일본이 곧 전쟁에 돌입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다케조에가 외아문을 찾아와 그럴 일은 없다고 해명했지만, 한양 민심의 동요는 눈에 보일 정도였다.
청군조차 퍼져가는 소문에 의심을 품고 전군에 경계령을 내릴 정도였다.
모든 대내외적 장치가 마련되자, 이선은 방아쇠를 당겼다.
“ 갑신년 11월 그믐 저녁을 기해 도성과 경기도 일대에 계엄을 선포한다. 각 영에서는 준비를 마치도록 하라.”
실질적으로 친위대를 통수(統帥)하고 있는 이선의 명에 장교들이 절대복종의 뜻을 밝혔다.
갑신년 11월 그믐(1885년 1월 15일).
숭례문 밖에서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던 친위대 참령관 정유진은, 시곗바늘이 저녁 8시를 가리키자 명을 내렸다.
“친위대 1중대! 창덕궁으로 행군한다.”
“옛!”
1중대는 고려대대 출신 병사들로, 친위대에서도 중핵에 해당하는 병사들이었다.
음력으로 매월 그믐날은 궁궐과 도성을 지키는 부대의 교대가 있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군대가 대거 도성을 활보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이의 이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병대의 행군이 아니라, 딱 봐도 거대한 야포와 기관총까지 운반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규모의 행군에 야밤에 길을 지나던 백성들은 깜작 놀랐으나 병사들은 사전에 지시받은 대로 답했다.
“왕명을 받아 야간훈련 중이오. 개의치 마시오.”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는데 군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백성들은 더 이상 호들갑을 떨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창덕궁 돈화문 앞에 친위대 병력이 집결하고, 엄중한 경계상태에 놓였다.
이미 관리들은 대부분 퇴궐한 상황이었지만, 이선과 개화당 관료들은 야간에 입궐했다.
“전하! 청국과 법국의 전쟁이 연일 심화하고 있고, 일본이 청국과 전쟁을 도발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대비해야 하옵니다.”
“이런 때에는 계엄을 명하셔야 하옵니다.”
“도성의 군영들에 대해서는 기무처에서 비밀 계(啓)를 가지고 군사를 동원시키며, 지방의 군영들에 대해서는 병부(兵符)를 발송하겠습니다.”
“특히 도성의 계엄을 더욱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친위대 외에도 광주(廣州)의 남한산성 병력을 도성 방어로 돌려야 합니다.”
“인천은 양선이 정박해 있는 곳에서 직통 길이므로 여기에 군사를 더 늘여 방어하고 계엄 상태도 한층 더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양 북한산성의 병력을 인천으로 보내야 하옵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임금은 놀랐지만, 이선과 김옥균이 공언했던 ‘대경장’의 시기가 왔음을 짐작했다.
“경들의 청을 윤허한다.”
다음 날 아침, 백성들이 돈화문 앞에 주둔 중인 친위대 병사들을 보며 웅성거렸다. 계엄에 대한 소문이 도처에 퍼졌다.
이 소식을 접하고 놀란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창덕궁으로 달려와 임금에게 알현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청군 측에서는 실질적으로 군대를 이끌던 원세개가 청국으로 돌아간 상황이라 이렇다 할 대처를 하지 못했다. 외교관인 진수당은 그저 당황해하며 추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한성의 외교가는 발칵 뒤집혔으나,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친위대가 엄중히 창덕궁을 수비하고 있는 가운데, 이선과 개화당이 주도하는 경장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임금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