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27
– 127화에 계속 –
127화 홍범 20조
20개조 정강을 작성한 개화당은, 정강 내용에 따라 개혁을 진행하기 위해 제일 먼저 관제 개편에 돌입했다.
의정부(議政府)는 백관(百官)을 통솔하여 모든 정무를 처리하고 나라를 운영한다.
내무부(內務部)에서는 지방 백성들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사무를 맡아 관할한다.
외무부(外務部)에서는 교섭, 통상 사무와 공사, 영사 등의 관리들을 감독하는 일을 맡아 본다.
탁지부(度支部)에서는 전국의 재정 예산과 출납, 조세, 국채(國債)와 화폐 등 일체 사항을 총 관할하며 각 지방의 재정 사무를 감독한다.
법무부(法務部)에서는 사법, 행정, 경찰, 사면에 관한 일을 관리하며 겸하여 고등법원 이하 각 지방의 재판을 감독한다.
학무부(學務部)에서는 국내 교육, 해외 유학, 학무 등에 관한 행정을 맡아 본다.
군무부(軍務部)에서는 전국의 육군과 해군에 관한 정사를 도맡아 관할하며 군인, 군속을 감독하고 관하 각 부대를 감독 통솔한다.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는 농업, 상무, 예술, 어업, 축산, 광산, 지질, 영업 회사, 국내의 일체 토목공사 및 영선(營繕) 등에 관한 사무를 관리한다.
궁내부(宮內府)에서는 궁내 각사(各司)를 관장하여 관리들을 통솔하며, 왕실 사무를 총괄한다.
관제 개편에 따라 불필요한 관청은 모두 폐지되고, 의정부와 8부로 통일되었다. 전근대적 조정에서 근대적 정부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단계였다.
이어서 새로운 관제에 따른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개화당이 개혁 정강의 발표만큼이나 공을 들인 것이 신정부의 면면을 채울 인사였다.
‘인사는 만사지. 필요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임명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고 인사는 만사란 말이 있듯, 경장을 추진하려면 마땅히 인사 개편이 필요로 했다.
영의정, 의정부 총재 이재원
좌의정, 의정부 부총재 김홍집
우의정, 의정부 부총재 이재면
판중추부사 심순택 · 조경하
독판내무부사 홍영식
독판외무부사 겸 친·근위대장 이선
독판탁지부사 김옥균
독판법무부사 김윤식
독판학무부사 박정양
독판군무부사 윤웅렬
독판농상공부사 어윤중
독판궁내부사 이재완
도승지 박영교
경무사(警務使) 겸 친위대 부장 박영효
한성부 판윤 민영익
협판내무부사 신기선
협판외무부사 목인덕(묄렌도르프)
협판탁지부사 서광범
협판법무부사 서상우
협판학무부사 이건창
협판군무부사 과등(고든)
협판농상공부사 오익영
협판궁내부사 홍순형
……
면면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원군 계열 왕족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영의정 겸 의정부 총재로는 임금의 종형인 이재원이 맡아 신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이외에도 왕대비 조씨의 친족과 대비(헌종비) 홍씨의 일족도 명예직으로 배려했다.
급진과 온건을 막론하고 개화파 인사들로 주요한 관직이 채워지고, 가장 실질적인 자리는 개화당 인사들의 몫이었다.
내정·외교·재정·군사·경찰은 개화당이 확고히 통제했다. 친위대를 이끄는 영관급 장교까지 모두 이선의 사람들로 꾸려졌다.
이선이 이끄는 연립 정권의 형태로 확고하게 개화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임금은 개화당이 제출한 새 조정의 면면을 보고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경들이 말한 일대 개혁이란 것이 이걸 말하는 것이었나?”
“작금의 비상한 시국을 타개하기 위한 최적의 인선으로 생각하옵니다.”
임금 또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터였으나, 제멋대로 인사까지 정하는 행태에 적잖이 불만을 느꼈다.
무엇보다 이 내각은 범개화 연립 정부로, 임금이 거북하게 여기는 대원군 계열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던 탓이다.
새 조정에서 대원군은 아무런 직함을 맡지 않았지만, 이재원과 이재면을 내세워 막후조종을 이어나가려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너희가 어떻게…….’
임금은 자신이 총애해 마지않았던 김옥균과 개화파 인사들에게 적잖은 배신감을 느꼈다.
애초에 대원군 세력과 민씨 척족이라는 양대 세력에서 벗어나, 국왕의 친위 세력으로 육성하기 위해 발탁하여 힘을 실어준 것이 바로 젊은 개화당 인사들이었다. 김옥균과 홍영식, 박영효 등이 젊은 나이에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 이유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전권을 주다시피 하며 경장을 지지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자신의 수족으로서 왕권 강화와 경장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막상 일을 추진하고 보니 이들은 수족이 아니라 머리 노릇을 하면서, 임금인 자신을 허수아비 취급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새 조정은 완전히 완화군의 조정이로구나. 결국, 이들은 군주인 내가 아니라 완화군을 택했다는 건가!’
경장을 선포하면 대원군이 은퇴하고, 군주인 자신에게 왕권이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권위는 높아져도 권력은 제한되었고, 조정은 완화군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김옥균과 개화파들도 임금이 아니라 완화군에게 더 충실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임금은 군주의 권위를 내세워 주도권을 되찾고 싶었으나, 창덕궁 밖에 있는 병사들, 즉 친위대는 이선의 수중 안에 있고, 이선의 배후에는 강대국 러시아가 있다는 것에 위축되었다.
허탈감을 느꼈다. 대원군과의 부자 갈등이 종식될 기미가 보이자, 이제는 아들이 권좌에 부상한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지는 이선은 더 이상 아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 경들의 뜻대로 하라.”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전하.”
임금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지금 당장은 전쟁을 피하고, 외세의 간섭을 몰아내어 자주독립을 확립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기 위해서 전권을 부여했던 것이었던 만큼,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이들을 끝까지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제 부자간의 관계 회복은 틀렸군.’
이선은 자신을 쳐다보는 부왕의 눈빛에 불안과 불만이 교차한다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지. 대를 이어지는 숙명일지도.’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부왕의 불만을 살 걸 알면서도, 개화당이 지배하는 조정 인사를 단행했다. 임금이 희망하는 대로 권력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권력은 이선의 통제 아래에 있어야 했다.
일단 현재의 권력 구도를 굳히면 개화당의 지배는 탄탄대로가 될 터였다.
조선의 운명을 바꿀 대개혁이 시작되는 가운데 임금과 개화당의 동상이몽도 함께 시작했다.
1885년 1월 20일(갑신년 12월 5일). 정강 20조를 종묘에 고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군주제 국가인 조선에서, 종묘에서 열성조의 신위 앞에 고하는 고묘(告廟)만큼 확실한 의식도 없었다.
고묘 의식에는 왕족과 문무백관이 모두 소집되어 성대하게 치러져야 했지만, 매우 급한 상황에서 사전예고 없이 진행되는 것이니만큼 간략하게 이뤄졌다.
임금과 중전, 왕세자, 대원군, 완화군, 의화군, 이재원과 이재면을 비롯한 종실의 고관들, 김홍집 이하 의정부의 당상들이 모여 고묘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들은 모두 조복(朝服) 차림이었다. 임금도 면류관과 구장복(九章服)을 입고 있었다.
임금은 교서를 펼치고 엄숙한 어조로 서고(誓告)를 시작했다.
“감히 조종(祖宗)과 열성(列聖)의 신령 앞에 고합니다. 우리 태조께서 왕조를 세우고 후손들에게 물려준 지도 493년이 되는데, 고(孤)의 대에 와서 시운이 크게 변하고 문화가 개화하였으며 우방이 진심으로 도와주고 조정의 의견이 일치되었으니, 오직 자주독립을 해야 우리나라를 튼튼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음력 섣달의 추운 날씨 속에서도, 대원군 이하 백관들은 홀을 들고 꼿꼿이 서 있었다.
“이제부터는 국운을 융성하게 하여 백성의 복리를 증진함으로써 자주독립의 터전을 튼튼히 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그 방도는 혹시라도 낡은 습관에 얽매지 말고 안일한 버릇에 파묻히지 말며, 우리 조종의 큰 계책을 공손히 따르고 세상 형편을 살펴 내정을 개혁하여 오래 쌓인 폐단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임금은 목청을 가다듬고 서고를 마무리했다.
“고는 이에 20개 조목의 큰 규범을 하늘에 있는 우리 조종의 신령 앞에 고하면서, 조종이 남긴 업적을 우러러 능히 공적을 이룩하고 감히 어기지 않을 것이니 밝은 신령은 굽어살피시기 바랍니다!”
서고가 끝나자, 임금과 백관이 일제히 종묘의 위패를 향해 절하였다.
‘근대적 개혁을 선포하는 의식이 지극히 전근대적이로군. 참 역설적이지만, 조선이라는 체제 안에서의 개혁이니 별수 있나.’
추위 속에서 고묘 의식을 치르는 이선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조선의 건국 이래 고묘 의식은 수없이 많았으나, 이번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약속한 의식은 없었다.
이선은 근대국가에는 그에 걸맞은 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도 옛 의식에 따른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선포한 다음, 급속도로 근대적 체제로 변화했다.
‘고묘 의식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에는 종묘의 신위가 아니라, 의회에서 국민의 대표자와 함께 의식을 치러야 한다.’
“아! 열성조께서 대조선의 앞날과 성상의 치세를 굽어살피실 것이옵니다.”
대원군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자, 영의정 이재원이 외쳤다.
“대조선국 천세! 주상 전하 천세!”
“대조선국 천세! 주상 전하 천세!”
문무백관이 일제히 천세를 외쳤다.
아직은 제후국으로 완벽한 ‘자주독립국’이 아니니만큼, 구호만큼은 예전과 같았다.
20개 정강을 논의할 때, 전하를 폐하로, 세자를 태자로, 왕명을 칙(勅)으로, 심지어 청과 사대관계를 청산하여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천명하자는 의견이 개화당 일각에서 있었다.
하지만 이선은 이를 거절했다. 그렇게 되면 청나라와 당장 전쟁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는 보류일 뿐, 완전한 거절은 아니었다.
‘명분을 내주고 실리를 취한다. 실리를 취하여 힘을 키우다 보면 언젠가 명분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다음날 조보(朝報)에 홍범(洪範) 20조가 반포되었다. 홍범 20조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지닌 문서였다.
백성들이 다니는 길목마다 홍범 20조가 나붙었다. 방대한 내용의 정강은 한문 외에도 최초로 국한문 혼용체와 국문의 세 문체로 작성되어, 백성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언문이라 불리던 한글은 국문(國文)으로 격상되어 각종 공문서에 기재될 예정이었다.
“이보시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요? 읽어도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소.”
“문벌의 폐지는 무엇이고, 인민평등권이란 무엇이오?”
“제길, 나도 이걸 좀 읽을 수 있으면 좋겠네.”
아직은 한글조차 읽지 못하는 백성들이 허다했다. 그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임금의 윤음(綸音)도 반포되었다.
이는 순 한글로 작성되어, 대화체로 들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홍범 20조의 곁에 임금의 윤음도 나붙었다.
아! 너희 백성은 실로 나라의 근본이다. 자주도 백성에게 달렸고 독립도 백성에게 달렸다. 임금이 아무리 자주를 하려고 해도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 의거하며, 나라가 아무리 독립을 하려 하여도 백성이 없으면 누구나 더불어 하겠는가?
너희 백성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한결같은 정신으로 임금에게 충성하라.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외적을 막을 수 있다고 할 것이로다.
재간과 덕망이 있으면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드러내고 미천한 사람이라도 귀한 사람에게 가려지지 않을 것이다. 모두 등용하여 쓸 것이니 너희 백성은 자신을 수양하라.
너희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내가 보호하고 안전하게 할 것이니, 법이 아니고서는 너희들을 형벌에 처하거나 죽이지 않을 것이고, 법이 아니고서는 너희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며 너희들에게서 거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의 생명과 너희들의 재산은 오직 법으로 보호할 것이다.
나라가 부유하지 않고 군사가 강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자주요, 독립이요 하여도 실속이 없을 것이다. 이제 자주독립의 큰 위업을 확고히 세우고 온 나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린다.
나의 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국운은 새로워졌으니, 너희 관리와 백성들은 서로 권하고 서로 알려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장려하여 태산처럼 끄떡하지 않게 하고, 여러 나라들에서 학문을 널리 탐구하며 좋은 기술을 섭취함으로써 우리 자주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하라.
이에 나는 종묘에 다짐한 글도 함께 너희들에게 널리 알리는 바이다.
아! 나의 말은 이에 그치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대조선 개국기원 493년 12월 6일
관리와 개화당원들이 도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임금의 윤음을 들려주고 홍범 20조를 설명했다. 설명이 달려있는 윤음까지 듣게 되자, 백성들은 홍범 20조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걸 정리하면…….”
“임금님께서 이 나라 조선이 백성을 위한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네.”
“백성을 위한 나라라니?”
“간단히 말해서 양반, 상놈 그런 거 다 없어진다는 뜻이네. 이제 능력만 있으면 출신과 관계없이 관리도 될 수 있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은 국법으로 보호되며,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고 기술을 익힐 수 있다고 하네.”
“뭐라고? 그게 참말이오?”
“임금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참말이 아닐 리가 있겠는가!”
“세상에, 이런 날도 온단 말인가?”
“진짜 세상이 바뀌긴 바뀌었구나!”
백성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변화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더 큰 변화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