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28
– 128화에 계속 –
128화 사회 변혁
한양에서 시작된 변화의 소문은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각 관아에 홍범 20조와 윤음을 내려보내기도 했지만, 각지를 돌아다니는 보부상들이 전국에 널리 알린 덕이기도 했다.
“어이, 들었어? 이제 양반, 상놈 구분 없이 다 똑같은 조선 백성이라는군!”
“들었다마다! 우리 고을에도 방이 써 붙었다네.”
“나도 봤네! 상하 귀천의 구별 없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국가 발전을 위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 이제 장돌뱅이 신세가 부끄러울 게 없네! 내가 일을 충실히 함으로써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거 아닌가?”
“뿐인가? 농민에게는 무거운 세금도 감면하고 탐관오리와 지주의 횡포도 막아 준다지. 이제 정말 양반 관리만의 나라가 아니라 만백성을 위한 나라가 된 거야.”
“임금님 말씀에 출신이 천해도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고 하지 않나. 나는 늦었지만 내 아들놈은 열심히 공부시켜서 관리를 만들겠네.”
“그래, 역시 관리가 최고지. 내 아들놈도 당장 책부터 사줘야겠구먼. 근데 뭘 공부시키면 되나? 천자문?”
“아서라, 아서. 낫 놓고 기역 자 모르는 자네가 나서서 공부시켜 봤자 뭘 배우겠나.”
“뭐가 어째?”
“어허, 화내지 말고. 나라에서 학교란 걸 만든다고 하더군. 기다리면 알아서 나라에서 공부할 길을 열어줄 것이네.”
“그래? 나라에서 애들한테 공부도 시켜준다고? 이야, 정말 좋은 나라가 됐구먼.”
백성들은 감개무량하며 기뻐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나라에서 이렇게 좋은 일만 한다니…….”
“우리 백성이 없으면 자주도 독립도 없다고 하지 않나. 자주독립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라는 건 알겠네.”
“우리 백성들이 양반들로부터 자립하는 것처럼, 나라도 외적으로부터 자립한다는 의미일세. 그건 우리 백성이 도와야 이룰 수 있는 일이고.”
“그래? 그렇다면 마땅히 도와드려야지!”
“임금님 말씀을 들었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한결같은 정신으로 임금에게 충성하라. 나라에서 은혜를 베푸는데, 우리가 마땅히 보답해야 하지 않겠나?”
“암, 은혜를 베푼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지!”
지금까지 조선 백성들은 오랜 수탈과 가난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국가가 오랜 적폐를 청산하고 새 시대의 희망을 약속하자, 이는 백성들의 소박한 충성심을 북돋웠다.
백성들은 그간 국가에서 외치는 ‘개화’와 ‘자주독립’의 개념을 잘 몰랐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개화의 혜택을 받게 되자, 이들은 개화에 열광하게 되었다.
홍범 20조와 윤음은 사회 변혁의 시초를 알렸으나, 전체적인 사회상을 제시했을 뿐 세세한 항목까지 정하진 않았다.
개화당은 이윽고 급진적인 사회 변혁안까지 내놓았다. 바로 계급과 성(性) 문제였다.
현대 평등사회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는 이선뿐만 아니라, 개화당도 사회 변혁에 동의했다. 개화당 지도부는 대개 노론 명문 출신이었지만, 인민 평등은 이들의 오랜 지론이었다. 더욱이 서양과 일본의 사례를 체험한 이들은 국민국가 건설을 위해선 사회적 평등이 필요하다는 걸 공감했다.
1. 문벌, 양반과 상인들의 등급을 없애고 귀천과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한다.
2. 문관과 무관의 높고 낮은 구별을 폐지하고 단지 품계만 따른다.
3. 죄인 본인 외에 친족에게 연좌(緣坐) 형률을 일절 시행하지 않는다.
4. 적서 차별을 금한다. 처와 첩에게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양자를 세우도록 한 전 규정을 거듭 밝힌다.
5. 남녀 간의 조혼(早婚)을 속히 엄금하며 남자는 20살, 여자는 16살 이상이라야 비로소 혼인을 허락한다.
6. 과부가 재가(再嫁)하는 것은 귀천을 막론하고 자신의 의사대로 하게 한다.
7. 공노비(公奴婢)와 사노비(私奴婢)에 관한 법을 일체 폐지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
8. 비록 평민이라도 나라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한 의견을 제기할 것이 있으면 향회와 조정에 글을 올려 회의에 부친다.
1항은 신분제 폐지를 다시 한번 천명했다.
2항은 문무관 차별을 금지하여 문관의 우위를 없앴다.
3항은 전근대적 형법이었던 연좌제를 폐기하고 근대적 형법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4항은 이미 영·정조 시기부터 논의되었던 적서 차별을 철폐하고, 서얼도 대를 이을 아들이라 하였다.
5항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만연하던 조혼 풍습을 금지시켰다. ‘꼬마 신랑’은 이제 사라질 풍습이었다.
6항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엄격해진 과부의 재가를 허용했다. ‘평생 청상과부’는 사라질 악습이었다.
7항은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노비제의 영구한 폐지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노비제가 형해화(形骸化)되고 있었는데, 이를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
8항은 백성들도 자유롭게 정치적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음을 천명했다.
8개 조로 구성된 정령(政令)은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려는 조치라, 의정부 내부에서도 이견이 갈라졌다.
“이는 너무 급진적인 조치입니다. 오랜 전통을 한순간에 없애는 건 불가한 일입니다.”
이선은 단호하게 답했다.
“전통이 아니라 적폐겠지요. 성상께서 홍범 20조를 반포해 왕화(王化)를 온 조선에 펼치셨습니다. 그런데 만백성 모두가 이를 누리지 못한다면, 어찌 진정한 개화라 할 수 있겠습니까? 노비라는 이유로, 천하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면 국가의 단합이란 불가능합니다.”
“양반들이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사노비의 폐지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이들은 노비를 물려받은 재산으로 여기거늘, 노비 해방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어허! 사람이 사람을 재산으로 여기는 게 어찌 선비의 태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노비제는 실질적으로 끝났습니다. 법적으로도 완전히 금지할 때가 왔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경제생활의 발달에 따라 노비들도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납속(納贖)제를 실시함에 따라 노비들은 상전에게 속전(贖錢)을 지급하고 면천을 받을 수 있었다.
18세기 이후로 재력만 있으면 노비 신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문호가 열려 있었으며, 실제로 노비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정조는 시대착오적인 노비제 혁파를 위해 고심했고, 비록 그 생전에는 이루지 못했지만, 정조를 계승한 순조가 1801년 공노비의 혁파를 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노비는 존재했으므로, 개화당은 이번 기회에 인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신분을 완전히 혁파하고자 했다.
“신분제를 깨뜨리고 노비를 없앤다는 조항은 해석도 없고 설명도 전혀 없다 보니, 백성들로 하여금 구실을 삼아 변란을 일으키게 할 것입니다. 이리되면 일반 백성의 위엄이 장수나 관리보다 커져서 종국에는 조정의 위엄을 위협할까 우려가 됩니다.”
온건 개화파인 내무협판 신기선이 반대를 표하자, 보수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이선이 나서서 논리를 들어 반박하려는데, 김옥균이 먼저 말했다.
“이미 정종(正宗, 정조의 원래 묘호)대왕께서 지극한 인덕으로 노비의 참혹한 처지를 끊으려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순조 대왕께서 80여 년 전에 공노비를 혁파하였던 것입니다.”
김옥균의 말을 듣고 이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조종의 법도는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명분이었다.
다음 날, 임금의 윤음이 반포되었다.
“내수사와 각 궁방, 각사(各司) 노비안(奴婢案)을 불태워 버린 것은 바로 우리 정종 대왕과 순조 대왕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봐준 성대한 덕과 지극한 인(仁)이었다. 그러니 누군들 그 큰 은혜에 감격하지 않았겠는가? 나도 늘 칭송하면서 그 위업을 잘 이어가려고 생각하고 있다.”
선대왕 중 정조를 크게 존경하여 본받고 싶어 했던 임금은 노비제 폐지에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개인 집을 놓고 말하면 한번 노비의 명색을 지니게 되면 종신토록 복종해 섬기게 되며, 대대로 그 역(役)을 지면서 명색을 고치지 못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어진 정사에 흠이 될 뿐 아니라 또한 화합을 손상하기에 충분하다. 사역(使役)은 매매로 이뤄지거나 신분으로 세습되어서는 안 된다. 의정부는 토의하여 절목을 만들고 온 나라에 반포해서 상서로운 화기를 맞이하게 하라.”
임금의 윤음까지 떨어지자, 개화당은 거칠 게 없었다. 홍범 20조에 이어 8조 정령이 전국에 통보되었다.
“노비를 금한다! 인신을 억압하는 어떠한 조치도 허용할 수 없다. 세습 신분으로서의 노비는 이제 없으며, 사람을 사고파는 일은 엄히 처벌받을 것이다.”
먼저 한양의 사노비 문서가 수거되어 불태워졌다. 이들은 기뻐하며 임금의 덕을 칭송했다.
“참으로 어진 임금님이시로다!”
“임금님의 은혜로 우리가 노비 신분을 벗어나게 되었으니, 결코 잊어서는 안 되네!”
“임금님, 정말 고맙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이 천한 목숨이 아깝지 않소!”
하지만 사회적 해방과 달리, 경제적 여건이 되어 있지 않은 사노비 대부분은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옛 주인은 갑작스럽게 일손을 잃었으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면천된 노비는 사사로이 부릴 수 없고, 오직 고용의 형태로만 일을 시킬 수 있다.”
조정에서는 옛 주인이 해방 노비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지급하도록 했다. 신분으로서의 노비가 아니라, 새경을 받고 일하는 머슴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양민이오! 양민으로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소.”
양반들은 분개했지만, 국법으로 정한 일을 대놓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신정권은 말뿐만이 아니라, 개혁의 실무를 맡을 각 부처의 참의·주사급 인재에 무관·서얼·중인·평민 출신들을 대거 등용했다.
대표적으로 군무독판을 맡게 된 윤웅렬은 무관이자 서자 출신인데도 대신의 반열에 올랐다. 그 아들인 윤치호도 외무부 참의가 되었다.
역시 외무부 참의로 임명된 유대치와 변수는 중인 출신이었다.
특히 친위대 영관으로 임명된 이들 중에는 개화당에 동참한 상민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양반 출신으로 정령관으로 임명된 서재필은 논외로 하더라도, 뚝섬 나무장수의 아들 이규완, 배추장사였던 윤경순과 윤계완, 상한 출신 신복모와 신중모, 보부상 출신 이창규, 고려대대 출신 정유진 등이 친위대 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개화당 지도부의 추천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가, 친위대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친위대의 지휘체계는 장 – 부장 – 정영관 – 부영관 – 참영관으로 구성됐는데, 영관급도 종2품에서 종3품에 이르는 고위직으로 임명되었다.
“상놈이었던 내가 정3품 당상관이라니!”
친위대 부영관으로 임명되어 군복을 입은 신복모는 감개무량하여 외쳤다.
“그러게나 말이오. 금릉위 대감의 추천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 갔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출세하라리곤 상상도 못 했소.”
역시 친위대 부영관이 된 이규완도 만족스러워했다.
“조선의 차별이 러시아로 이주했는데, 조선의 관직을 받게 되다니. 참,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지 못할 일이오. 아버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아예 조선을 저버리고 러시아로 갔다가, 고려대대 지휘관으로 돌아와 부영관이 된 정유진은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이들의 출세를 벼락출세라고 업신여기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는 상징적인 조처였다.
신분에 무관하게 능력에 따라 입신출세를 보장하고, 특히 그동안 천시되었던 무관직을 높이 대우해 군인의 사회적 위치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이선과 개화당 지도부가 약속했던 ‘신분이 아닌 능력에 의한 출세’를 상징하는 이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상징은 소문으로 퍼져 지방에도 미쳤다.
평양, 평안 감영.
“상놈이어도, 서북 출신이어도, 병졸 출신이어도 무관으로 입신출세 할 수 있다, 그 말이디요.”
“아, 속고만 살았나. 거, 누구라더라. 함경도 출신으로 아라사에 이주했다가 완화군 대감과 함께 돌아와서 정3품 관작을 받은 이도 있다더군.”
“이야, 아라사 말입네까? 양코쟁이들?”
“그래, 완화군 대감이 아라사랑 친하거든. 그래서 아라사에서 살다 온 이들이 대거 출세했어.”
포고를 알리기 위해 한양에서 온 군관은 마치 자기가 출세한 것처럼 즐거워했다.
“아무튼, 한양에서는 무관을 높이 대우하고 있네. 앞으로 군공만 세운다면 얼마든지 입신출세할 수 있다 이거지.”
그 말을 듣던 청년의 눈이 빛났다.
청년은 평안 감영의 나팔수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머슴 노릇을 하다가, 재작년에 평양으로 와 입대했다. 그때 나이가 16세에 불과해, 두 살을 올려붙여 거짓으로 말하고 입대할 정도였다.
입대한 경위는 굶주림을 면하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병졸이 되고 나니 먹고살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실망도 컸다.
평안도 병사들은 날래고 용맹하다고 소문이 자자한데도, 이를 지휘하는 군교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고 부패했다. 사병에 대한 구타와 학대는 비일비재했다.
의협심이 넘치는 청년은 분개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꾹꾹 참아 넘겼다. 하지만 그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천한 상놈 출신, 중앙의 차별과 무시가 일상화된 평안도가 고향인 병졸.
입신출세할 길이 없는 최하층의 신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청년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상놈 출신도, 더 외진 함경도 출신도 고위 무관이 되었다는데, 그렇다고 못 할 것도 없었다.
“길티, 내래 못할 것도 없지!”
방년 18세의 청년, 홍범도(洪範圖)는 새 시대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