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3
– 13화에 계속 –
13화 북양 대신(北洋大臣)
이선 일행은 관저 안으로 정중하게 대접받았다. 이홍장이 주로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이니만큼, 관저의 응접실은 동양식과 서양식을 절충해 놓은 형태였다.
이선 일행은 응접실에 앉았다. 장무영은 무기 소지는 금지되었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문밖에서 경호 중이었다.
머지않아 청나라 관복을 입은 거구의 중년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이선은 이홍장과 초면이었지만, 바로 그가 이홍장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조선국 영종정경부사 이선이 이중당을 뵙습니다.”
이선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니, 송 객주가 중국어로 통역을 했다.
이홍장은 놀란 듯했다. 어린아이가 관복을 입고 있고, 어른들이 수행원으로 보이니 기묘할 따름이었다.
“대청국 직례총독 북양 통상 대신 태학사 숙의백작(肅毅伯爵) 이홍장이오.”
이홍장은 이선에게 정중하게 답례한 후,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고 본인도 착석했다. 이홍장 뒤에 두 사람이 시립(侍立)했는데, 보좌관으로 보였다.
“귤산(橘山, 이유원)께서 보내셨다고? 존형께서는 두루 평안하시오?”
전 영의정 이유원이 1875년에 사은사로 파견되어 이홍장을 만난 이래, 두 사람은 국경을 넘어선 우정을 맺어왔다. 두 사람은 왕복 서한을 통해 시국을 논의했고, 이홍장이 이유원에게 개국을 건의하는 밀서를 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상세한 내용은 글로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선은 굳이 통역을 거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이선과 이홍장, 두 사람만 알았으면 하는 이야기였다.
중국 관리와 조선 사신이 만나면 주로 통역을 거치지 않고 한문 필담(筆談)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홍장 역시 조선 사신과 주로 필담으로 의견을 주고받았으니 흔쾌히 동의했다.
막상 필담을 시작하려니, 이선은 어려움을 느꼈다. 왕자의 신분으로 어렸을 때부터 한학 교육을 받았던 경험으로 인해 한문 작성에는 능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는 속도랑 글 쓰는 속도가 안 맞아떨어지잖아. 말로 하면 열 마디 할 걸 한 줄 쓰고 있네.’
이선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필담을 작성해서 이홍장에게 넘겨주었다. 조선 조정에서 이홍장의 수교 권유문을 논의하여 불가피하게 거절했으나, 그 본심은 수교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말이었다. 이홍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답신을 적었다.
과연 청나라의 최고 실력자, 이홍장다운 관찰력이었다. 이유원이 보낸 사람이 아님을 바로 간파한 것이었다.
이선은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붓을 놀려 필담을 적던 이선은 점차 손이 피곤해졌다.
‘아오, 중국어 열심히 할걸. 말로 하면 편할 걸 이게 뭐냐. 보안의 측면에서 생각해 봐도 필담은 좋지 못하지. 여차하면 증거가 남잖아.’
갑자기 불현듯 이선의 머리에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홍장은 영어를 할 줄 알지 않나? 여기서 영어로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이홍장밖에 없을 터!’
“Your Excellency, may I speak in English?(각하, 영어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Oh, well, Do you speak English? (오, 그대도 영어 할 줄 아시오?)”
뜻밖에도 이홍장은 매우 반가워했다.
유학을 익힌 사대부, 특히 고관이 서양 언어를 배우는 건 천박하다고 여기는 풍조가 강한 중국이었다.
하지만 이홍장은 태평천국 전쟁을 치르며 서양, 특히 영국과 교섭을 자주 하면서 영어 사용의 필요성을 느꼈다. 나이 40 넘어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당대의 최고 엘리트 관료답게 만학으로 배운 영어임에도 곧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청나라 고관 중 드물게 서양인과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하다는 건 이홍장의 자부심이었는데, 이선이 이를 자극했던 것이다.
“예, 조금 할 줄 압니다.”
“조선에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아무튼 반갑소. 어디서 배운 것이오?”
이홍장은 이선의 영어 구사에 거듭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미래에서 배워 가지고 온 것이다, 라고 할 수는 없으니.’
“조기 교육을 잘 받은 덕입니다. 외국어를 어렸을 때 배우면 오래 간다지요.”
“훌륭하군. 그래서 나 역시 조카에게 일찌감치 영어를 배우라고 했지. 귀공 가문의 어른들은 참으로 개명된 분들인가 보오.”
“바로 보셨습니다. 제 아버님께서는 조선국 국왕이시며, 제 할아버님께서는 조선의 국태공이십니다.”
웃고 있던 이홍장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이선은 분명히 ‘The King of Joseon’, ‘The Archduke of Joseon’이란 표현을 썼던 것이다.
“농담이 지나치군. 조선에서는 왕족을 함부로 사칭하는 죄가 낮은가 보오?”
“다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조선국 영종정경부사, 완화군 이선입니다.”
이선은 안영흠을 시켜, 임금이 봉한 완화군 책문을 이홍장에게 넘겨주었다.
“허어.”
책문을 읽던 이홍장은 놀라워하며 이선을 쳐다보았다.
“이건 운현궁에서 중당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안영흠이 다시 두루마리를 전해 주었다. 이홍장은 두루마리를 펼쳐 보고, 난초화의 기품에 감탄했다. 이홍장은 그림에 찍힌 낙관과 글씨를 알아보았다. 그건 틀림없이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작품, 석파란이란 증거였다.
“제 생일을 기념하여 할아버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불철주야 나라를 위해 노력하시는 중당께 이를 드리고 싶습니다.”
“허허, 어찌 이런 귀한 선물을 받을 수 있겠소?”
이홍장이 사양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입으로는 그래도, 눈에는 탐욕이 깃들어 있었다.
“받아 주십시오. 이는 제 뜻이자, 운현궁의 뜻이기도 합니다.”
“험, 험. 그래도 어찌 할아버지가 손자의 생일 선물로 보내는 것을…….”
이홍장은 청조의 충신이자 유능한 관료이지만, 청렴한 인물은 아니었다. 축재에도 능력이 있어, 상당히 많은 재산을 끌어모은 인물이었다. 외국인들이 은근슬쩍 주는 ‘선물’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제겐 할아버님이 주신 그림이 많습니다. 이는 중당을 뵙는 제 성의 표시이기도 하니, 더 이상 사양하지 말아 주십시오.”
“알겠소이다. 그럼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지요.”
이홍장은 선물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이홍장은 이선이 대원군의 손자이자, 왕자라는 걸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제가 조선국의 왕자를 몰라보는 결례를 저질렀습니다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홍장은 태도가 바뀌어, 이선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올해 58세인 이홍장과 13세인 이선은 나이도 한참 차이가 나지만, 이선의 신분을 알게 된 이상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애당초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게 문제지요. 편히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왕자께서는 귀하신 지체를 이끌고, 어인 일로 중국까지 와서 이 사람을 찾으셨소이까?”
“운현궁, 즉 국태공의 명을 받들어서 왔습니다. 저는 국태공께서 가장 아끼시는 손자입니다.”
이선은 이번에도 편리한 핑계, 대원군의 이름을 빙자했다.
“국태공께서 이 사람에게 어인 용무가 있으셔서 왕자를 보내셨단 말이오?”
“중당께서 이유원 대감에게 밀서를 보내어 서양과의 수교를 권유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일은 조정에서 정식으로 논의가 되었고, 국태공께서도 알게 되셨습니다. 이에 뜻을 전하고자 저를 직접 보내신 것입니다.”
“수교를 반대하려는 뜻을 전하려고 친히 왕자를 보낸다고요?”
이홍장은 의아했다. 조선의 사정을 이유원을 통해 전해 듣고 있는 이홍장으로선, 수교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게 대원군으로 알고 있었다.
결국 이홍장은 외국과의 외교를 총괄하는 총서(總署, 총리각국사무아문)에, 현재 이유원 홀로 통상을 주장하기는 어려우며 조선이 결코 서양과 통상하지 않겠다고 하면 강권하기는 어렵다는 보고문을 올린 상황이었다.
“아닙니다. 겨우 그런 뜻으로 보내셨겠습니까? 중당의 뜻을 여쭙고, 수교의 득실을 따져보려 하는 것입니다.”
이선은 누구보다 열렬한 수교론자였지만, 먼저 패를 보일 생각이 없었다. 이홍장이 수교를 유도하면, 그에 흥미를 보이는 방향으로 답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소. 내가 작금에 조선을 둘러싼 정세를 보건대, 서양과의 수교가 불가피함을 조선에 권유했던 것이오. 국태공께서 이에 관심이 있다면 응답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역시나 이홍장은 흥미를 보였다. 이홍장은 이선을 대원군이 보낸 밀사로 인식했다. 수교 반대론자로 알고 있는 대원군, 조선 조야의 여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대원군을 찬성론으로 돌리면 일이 쉽게 풀리리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그럼 중당께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지요. 조선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부족하나마 말씀 드리지요. 험, 험.”
이홍장은 잠시 생각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최근에 살펴보면 일본의 행동이 잘못되고 속내가 음험하니 미리 방어해야 합니다. 일본은 근래 서양 제도를 숭상하여 허다한 것을 새로 만들면서 벌써 부강해질 방도를 얻었다고 스스로 말하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국고는 텅 비고 외채는 쌓여서, 도처에서 말썽을 일으키면서 널리 땅을 개척하여 그 비용을 보상하려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 강토가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 북쪽으로는 귀국이고, 남쪽으로는 대만이니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이외다.”
서양 국가들에 비하면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일본이었으나, 새로운 경계 대상이 된 것이다.
“유구(琉球, 류큐)도 수백 년 오랜 나라이고, 일본에 죄를 지었다고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작년에 갑자기 병선을 출동시켜 그 나라 임금을 폐위하고 강토를 병탄하였소. 중국과 귀국에 대해서도 장차 틈을 엿보아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고 담보하기 어렵소이다.”
일본의 류큐 합병에 놀란 이홍장은, 그다음 목표가 조선으로 향할까 우려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조선에서도 일본의 유구 병탄에 대해 크게 우려하였습니다.”
이선이 맞장구를 쳐주자, 이홍장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 일본이 사기와 폭력을 믿고 유구를 멸망시킨 사실에서 단서를 드러내놓은 것이외다. 귀국에서도 방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소. 일본이 겁을 내고 있는 것이 서양이지요. 조선의 힘만으로 일본을 제압하기에는 부족하겠지만 서양과 통상하면서 일본을 견제한다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외다.”
이홍장이 조선에 제시한 대안은 이이제이였다. 이선은 이홍장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서양의 역학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듣기만 하고 있었다.
“만약 귀국에서 먼저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과 관계를 가진다면 비단 일본만 견제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엿보는 것까지 아울러 막아낼 수 있지요. 러시아도 반드시 뒤따라서 강화를 하고 통상을 할 것이외다.”
러시아와 국경 분쟁 중인 청나라로서는, 조선과 국경을 면하고 있는 러시아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러시아와 일본에 대해 동시에 경계심을 느끼는 이홍장은, 그에 대한 대안으로 서구 열강과의 수교를 제안한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서양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이들은, 조선이 대청의 신하이므로 멋대로 외교를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정에는 명백히 자주를 갖고 있지요. 그렇기에 청국이 수교를 권유하는 건 내정 간섭이라고 여깁니다. 이에 대해 중당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이선은 조선의 약점이자, 청나라에서도 민감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찔렀다.
조선과 청나라의 보수파들은 ‘남의 신하된 자는 외교를 할 수 없다.’라는 논리를 들어, 각자 다른 이유에서 조선의 외교를 반대했다. 조선 보수파들은 서양과의 교역이 싫어서, 중국 보수파들은 조선이 외교를 하면 통제하지 못하게 될까 봐 우려해서였다.
‘이 논리부터 깨트려야 한다. 조선이 지금 당장은 형식적으로 중국의 신하이나, 내정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자주국임을 인정받아야 해.’
“그렇지 않소이다. 귀국은 정사와 법령을 모두 자체로 주관해 오고 있으니,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간섭하겠소?”
이홍장은 이선, 아니 이선이 대표한다고 믿는 대원군과 보수파를 달래기 위해 청나라가 내정 간섭을 할 뜻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단지 중국과 귀국은 한집안이나 같으며, 중국의 동삼성(東三省)을 병풍처럼 막아 주고 있으니 어찌 순망치한뿐이겠소? 귀국의 근심이 곧 중국의 근심이외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넘은 줄 알면서도 귀국을 위한 대책을 생각하여 진정으로 제기하는 것이외다.”
이홍장이 들고 나온 건 ‘한집안’의 논리였다. 황제와 제후라는 고압적인 관계보다, 같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에서 서로 잘해 보자는 것이었다.
‘조선은 북경에서 가깝다. 이홍장의 세력 기반과는 더욱 가깝지. 그렇기에 이홍장은 류큐와 베트남은 포기할지언정, 절대 조선은 포기하지 못하는 거다.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야지.’
“중당의 가르침은 잘 들었습니다. 이에 저도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이홍장이 한참 떠들었으니, 이번에는 이선이 나설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