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4
– 14화에 계속 –
14화 동상이몽(同床異夢)
“중당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조선과 귀국은 한집안과도 같습니다. 북경이 조선에서 이토록 가까우니, 양국의 관계는 순망치한입니다. 그렇기에 조선이 스스로 내정을 개혁하여 무비(武備)를 닦아 국방을 튼튼히 하면, 양국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선은 이홍장의 말을 반복했다. 외교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해 주는 말을 하는 건 호감을 주는 행동이었다.
“그렇소. 수교하여 관세를 정하면 나라의 경비에 적으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으며 상업에 익숙하면 무기 구입도 어렵지 않게 될 것이오.”
“그리하여 조선이 서양 각국들로부터 독립을 공인받으면, 감히 일본도 동양을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당의 계책은 두 나라 모두를 위한 것이니, 이선은 감복을 금치 못하겠나이다.”
이선이 한껏 이홍장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만난 조선인 중 유일하게 자신의 뜻에 동조를 표하는 이선을 보며 이홍장은 내심 흐뭇했다.
“실로 그렇소. 조약을 체결한 나라들은 관리들을 파견하여 서로 방문하고 관계를 맺어 둘 것이오. 평상시에 관계를 맺어 둔다면, 설사 한 나라에서 침략해 오는 것과 맞닥트려도 조약을 체결한 나라들이 모두 요청하여 공동으로 그 나라의 잘못을 논의하여 공격하게 될 터. 그러면 아마 일본도 감히 함부로 날뛰지 못할 테지요.”
“말씀하신 바와 같이 조선이 외교를 하면 마땅히 서양의 공사들이 조선에 들어올 것이요,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조선 또한 외국에 사절을 파견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제후국의 분수를 넘어선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을 터인데, 중당께서는 이를 이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선이 서양과 수교한 직후, 하필 공교롭게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후 청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고, 특히 외교 문제에 더욱 민감했다. 조선이 외국으로 사신을 보내려 할 때마다 간섭했고, 청나라의 속국이니 외교를 대행한다고 서양 각국에 공인받고자 했다. 각국이 난색을 표해 청의 부당한 요구가 관철되진 않았지만, 조선 입장에선 심히 불쾌한 일이었다.
“나는 물론 이해하오. 조선은 비록 중국을 섬기고 있으나 자주지국(自主之國)이었으니,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서양과 수교함이 옳을 것이오. 다만 서양은 교활한 족속인데 귀국은 그에 대해 알지 못하니, 한집안과 같은 중국에서 몇 가지 조언을 하려는 것이지요.”
‘자주국임은 인정한다. 그러나 조선은 바깥세상에 나가기엔 너무 무력한 아이와 같으니 부모인 청의 지도를 받아라, 이런 말이군. 예상했던 바이다.’
이선은 이홍장에게 너무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자신의 식견을 드러내기로 했다.
“조선이 서양에 대해 알지 못하다는 건, 송구한 말이오나 중당의 편견이십니다. 비록 저와 같은 삼척동자도 조선을 위하여 구구히 정세를 논할 수 있습니다.”
“허어, 그래요? 그거 놀랍군요. 그럼 이 늙은이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소?”
이홍장은 예의는 갖추고 있으나, 약간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도 그럴법한 게, 이제 10대 초반의 소년이 천하의 이홍장을 상대로 세객(說客) 노릇을 하겠다니 우스울 수도 있었다.
“그럼 제가 동양 정세에 대해 말씀을 좀 올려도 되겠습니까?”
“편히 하십시오.”
“예, 그럼 고하겠습니다.”
이선은 이홍장과의 만남을 예상하며 그동안 갈고 닦은 말을 시작했다.
“작금에 조선을 위협하는 것은, 중당의 말씀과 같이 단연코 일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은 유신을 단행한 이래, 국력이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부에는 가혹한 정책으로 불만을 품은 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그 불만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해 북으로는 북해도와 남으로는 유구를 병합하였습니다. 다음 차례는 단연코 대만과 조선, 더 나아가 요동일 것입니다.”
“나 역시 이를 우려하고 있소. 그렇기에 귀국에게 일본을 방비하라 하는 것이외다.”
“세간에서는 아라사가 일본보다 더 위협적이니, 일본과 손을 잡고 아라사를 방비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는 옳은 방책이 아닙니다. 아라사가 비록 강국이라고는 하나 새로이 얻은 극동 영토를 관리하기도 버거운 상황이고, 무엇보다 그들은 영국을 두려워합니다. 영국은 아라사가 남쪽으로 진출하는 걸 막기 위해 온갖 조치를 다하고 있습니다. 아라사가 조선을 위협하면 영국을 크게 자극할 것인데, 어찌 소탐대실하려 들겠습니까? 구구한 억측일 뿐입니다.”
“……!”
순간 이홍장은 이선을 보는 시선을 달리했다. 이는 자신이 총서에다가 올린 보고와 거의 일치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위협을 강조하는 이들과 달리, 이홍장은 일본이야말로 중요한 위협으로 여겼다. 이선이 이를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중국도 이와 같습니다. 지금 아라사가 저 멀리 서쪽 변방에서 중국과 국경 분쟁을 벌이고 있다 하여, 전쟁을 부르짖는 이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신강은 북경에서 너무나 멀고, 러시아가 육지를 통해 중국을 공격할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지난 전쟁에서 드러났듯이, 중국을 위협하는 건 바다에서의 위협입니다. 영국과 법국(프랑스)은 이곳 천진을 통해 북경을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섬나라 일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강대한 해군을 거느려 대륙으로 웅비하려 합니다. 중국은 해상의 방위를 튼튼히 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내 말이!”
조용히 듣고 있던 이홍장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이선의 말을 맞장구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홍장에게 쏠리자, 이홍장이 헛기침을 하며 점잖게 말했다.
“이는 실로 내가 오래전부터 고민하고 있던 바입니다. 조선에서 온 손님으로부터 같은 견해를 듣게 되니 반가워서 그랬습니다.”
‘역시, 내가 가려운 데를 긁어 줬군.’
이홍장은 냉철한 인물이나, 저도 모르게 순간 감정을 분출한 것이었다.
현재 청나라는 러시아와 서북쪽 변방, 이리(伊犁, 훗날의 이리카자흐자치주)를 놓고 국경 분쟁 중이었다.
1864년, 야쿱 벡(Yakub Beg)이 청의 영토인 신강 카슈가르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새로운 영토(新疆)’을 의미하는 신강이란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청나라가 정복하긴 했으나 전통적인 의미의 중국이 아니었다. 대개 위구르족인 무슬림들은 청의 통치를 받기를 원치 않았다.
청은 태평천국의 난이 종결된 이후에도 온갖 문제로 변방 영토를 방기하고 있었고, 반란은 성공적이었다. 야쿱 벡 정권은 카슈가르 일대를 지배하고, 영국과 러시아로부터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청에서는 신강 문제의 해결을 놓고, 그 유명한 ‘해방(海防)’과 ‘육방(陸防)’ 논쟁이 시작된다.
해방파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북경은 해안과 가까이 있지만, 신강은 수도에서 멀기 때문에 해안 방어만큼 중요하지가 않다.
둘째, 조정의 재정 형편이 어려운데 이 전쟁을 해야 하는지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셋째, 신강의 토지는 척박하여 중국에 실제적인 가치가 없으니, 높은 대가를 치러서 수복할 만한 가치가 없다.
넷째, 신강의 주위는 모두 강대국들이라, 오랫동안 고수할 수가 없다.
다섯째, 전쟁 대신에 장래를 위해 힘을 보존하는 건 현명한 조치다.
바로 이홍장의 지론이었다. 쓸데없는 영토를 차지하느라 힘 낭비하지 말고, 해안 방위에 온 힘을 기울이자는 제안이었다.
이는 함께 태평천국을 격파한 옛 전우이자 양무파 동지였던 좌종당(左宗棠)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좌종당은 영국과 프랑스는 상업적 이익만을 노리지만, 러시아야말로 중국의 영토를 노리기에 진정한 적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이홍장의 예상과 달리 청조 최후의 명장 좌종당은 단기간에 야쿱 벡 정권을 무너트리고, 1877년 신강을 수복했다. 이제 최후의 문제가 발생했다. 1871년에 러시아가 은근슬쩍 점령한 이리 유역을 돌려달라는 주장이 대두한 것이다.
조정은 크게 서양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진보적 양무파와 서양과 관계를 끊길 원하는 보수적 청류파로 나누어진 상황이었다. 양무파가 이홍장의 해방파와 좌종당의 육방파로 분열하니, 청류파는 육방파와 손을 잡고 이홍장을 공격했다.
이홍장은 무조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러시아가 근대적 외교에 무지한 청나라를 상대로 기만책을 썼다. 격분한 청류파는 분수를 모르고 러시아와 일전을 각오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었다. 심지어 좌종당까지도 일전불사를 외치니 이홍장으로선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이선이 청나라에 온 1880년 봄은, 청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설이 퍼져 나가 북경의 상공에 전쟁의 기운이 돌고 있는 시기였다.
이선은 바로 이를 이용하고자 했다.
“아라사는 중국을 공격할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조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안타까운 말이나, 중국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아라사가 중국이나 조선을 침범하면, 결코 영국이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아라사는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고 있으니, 마치 전국 시대 진(秦)과 초(楚)가 다투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상대방이 강해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이선은 영국과 러시아가 세계적으로 벌이고 있는 패권 경쟁, ‘그레이트 게임’을 이해하기 쉽게 말했다.
“장차 중국과 조선을 위협할 나라는 단연 일본인즉,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려는 중당의 혜안이 옳습니다.”
‘역사를 아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결국 일본이 조선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침략하니, 경계 대상 1호가 일본인 건 맞다.’
메이지 일본의 대륙 침략과 청일 전쟁의 결과를 알고 있는 이선으로선, 이대로 역사가 그대로 흘러가다간 15년 뒤에 일어날 불길한 예언이었다.
‘하지만 현시점에선 일본은 조선을 칠 능력은 없다. 열강 사이에서 조선이 자주독립을 유지하려면, 영국, 러시아, 청, 일본 4개국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지금처럼 러시아가 따돌려지고, 청-일본-영국이 연대하는 상황이 놓이면 안 되지. 청과 일본이, 러시아와 영국이 계속 대립하고 견제하는 상황에서 조선은 살길을 찾을 수 있다.’
“조선은 머지않아 서양 각국과 수교하여, 일본을 제어할 것입니다. 이는 중당의 뜻이자, 동시에 저희 뜻이기도 합니다.”
이선은 철저하게 조선의 입장에서 정세를 분석한 것이나, 이는 이홍장의 입장과도 완전히 일치했다.
“제가 짧은 소견과 구구절절한 말로 중당의 귀를 어지럽힌 것이 아닐지 걱정입니다.”
“아니요. 실로 놀라울 따름이오. 아직 어린 왕자에게 어찌 이토록 정확한 정세 판단과 능력이 있는지?”
이홍장은 진정 감탄한 듯했으나, 한편으로는 이상했다. 이선이 마치 자신의 생각을 속속들이 읽는 것 같았던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되지.’
이선은 늘 그렇듯이 대원군을 팔기로 했다.
“이는 평상시에 국태공의 가르침을 받고, 또한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국지사들과 의논하면서 얻은 의견입니다. 저는 오직 그 말을 옮겼을 뿐입니다.”
이홍장은 거듭 감탄하며, 조선과 대원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과연 국태공의 명성이 중국까지 퍼질 만하군요. 또한 왕자께서 이토록 영명하시니, 실로 귀국의 복이외다.”
“과찬이십니다. 중당이시야말로 장발적(長髮賊, 태평천국의 멸칭)을 멸하여 나라를 굳건히 지켰으며,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국가를 발전시키려 하니, 중당의 존재야말로 대청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중당의 가르침을 본받고자 합니다.”
“오직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지요. 왕자께서 그리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외다.”
이홍장은 허허 웃었지만, 세상에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첨이라면 수없이 많이 들어본 닳고 닳은 노회한 대신 이홍장도, 똑똑하지만 순진해 보이는 10대 소년이 찬탄을 표하는 것이 썩 기분에 좋았다. 더군다나 그 소년은 자신이 관심이 많은 나라, 조선의 왕자였다.
“할아버님께서 저를 천진에 보내신 이유는, 중당을 뵙고 정세를 묻고자 한 것도 있지만, 서양 세력을 직접 살펴보려는 것도 있습니다. 천진에 주재하는 서양 외교관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선의 중요한 방문 목적이었지만, 이홍장 입장에서도 괜찮은 이야기였다.
“하하, 좋소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소개장을 써드리지요.”
“예, 하지만 조선의 왕자란 신분은 저와 중당만 알았으면 합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나랏일과 무관한, 사적인 용무이오니…….”
이선은 자신이 조선의 왕자라는 걸 널리 소문낼 생각이 없었다.
“그럼 그리하시지요. 천진에 계속 머무르실 예정이라면, 직례성에서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지요.”
“중당의 호의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제법 똑똑한 왕자군. 실로 왕재라 할 수 있어. 잘 다독여서 대청의 품으로 끌어들여야겠다. 잘만 하면 조선을 통제하기가 쉬워지겠어.’
‘앞으로 잘 부탁하겠소. 조선과 나 자신을 위해서 얼마든지 이용해 주지.’
이홍장과 이선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작별했지만, 속으로는 동상이몽이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