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41
– 141화에 계속 –
141화 사관학교
1886년, 새로운 장교 양성기관인 연무공원(鍊武公院)이 설립됐다. 임금은 교육조서에 이어 사관학교 설립을 조령으로 반포했다.
무비(武備)는 나라의 중요한 일이니 또한 형식적으로 하거나 느긋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교의 명단에 들어간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무술을 익숙히 단련하여야만 대오를 정리하고 군사의 위용을 엄하게 할 수 있다.
새로이 설립하는 기관을 연무공원이라 부르고, 제반 실행해야 할 규정들은 군무부에서 토의하고 확정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들이도록 하라.
연무공원의 교관은 서양인을 초빙해야 하는데, 누구를 데려오느냐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군사고문단을 이끌며 군제개혁을 도맡는 고든 일행에게 교관도 겸하게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거문도 사건으로 조선 조정은 영국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
고든은 직무에 충실하고 조선을 존중했으므로 거문도 사건 이후에도 군무협판 직위를 유지했지만, 연무공원의 교관은 제3국 사람으로 뽑자는 말이 나왔다.
“조선의 국방을 모두 영국인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연무공원 교관은 다른 나라 사람에게 맡기지요.”
“그렇다면 독일이 좋겠군요. 독일의 군사는 세계 제일이니까.”
이선은 이미 비스마르크를 만나는 자리에서 독일인 군사교관을 파견해달라고 희망한 바 있었다.
묄렌도르프도 적극 지지해 독일인 교관 파견을 희망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뜻밖에도 조선의 중립을 제안한 당사국으로써 군사교관단을 파견하는 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하여 정중히 거절했다.
의외의 결과에 이선은 실망했지만, 가급적 극동 문제에 휘말리지 않으려 하는 비스마르크의 입장을 이해했다.
‘조선 중립을 제안한 것도 러시아를 끌어들이기 위함이지, 딱히 조선을 위한 일도 아니었지. 중립 제안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 했다.’
교관 파견에 러시아와 프랑스도 관심을 보였지만, 이는 주변국의 반발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선은 중립적인 미국을 선택했다.
‘근대 최초의 총력전이라 할 수 있는 남북전쟁을 경험한 베테랑 장군이 좋겠군.’
이선은 미국에서 친분을 갖게 된 그랜트 전 대통령에게 교관 파견을 부탁했다.
그랜트는 남북전쟁 당시 부하 장교이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낸 웨슬리 메릿(Wesley Merritt) 준장을 추천했다. 메릿 장군은 보빙사절단이 웨스트포인트를 방문했을 때 정중히 환영한 인물이기도 했다.
메릿은 제안을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그랜트에 이어 육군참모총장 필립 셰리든(Philip Sheridan) 중장도 권유하자 결국 조선행을 받아들였다.
“호오, 남북전쟁의 영웅이자 웨스트포인트 육사 교장이라. 그거 좋군. 속히 입국을 원한다고 전해 주시오.”
1886년 3월, 연무공원의 초대 원장으로 내정된 메릿 준장과 함께 교관으로 선발된 윌리엄 다이(William Dye) 퇴역 준장 이하 5인이 새로 교관으로 부임했다.
메릿은 군무협판, 다이는 군무참의에 해당하는 대우와 넉넉한 연봉을 보장받았다.
다이는 마침 이집트군 군사고문관으로 복무한 바 있고, 이집트 군대를 지휘했던 고든과도 친분이 있었다.
영국인 군사고문단과 미국인 교관단은 서로를 견제하지 않고 힘을 합쳐 조선의 군제개혁에 힘썼다. 군사고문단은 군제개혁과 친위대를 비롯한 기존 군대의 훈련을, 교관단은 사관학교 업무에 매진하여 서로의 역할을 분명히 했다.
입학자는 무과에 합격한 이들 중 유망한 하급 무관과, 무관이 되기를 희망하는 16세 이상 27세 이하의 청년들에게 시험과 면접을 봐서 선발했다.
연무공원은 근대식 군사학을 배우고, 과정을 무사히 이수해 졸업하면 종6품 참위(參尉)로 임관을 보장받았다. 신식 군대의 기간(基幹)이 될 학교였다.
그동안 상문천무(尙文賤武)의 전통에 따라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했던 조선이지만, 출신에 관계 없이 무관을 파격적으로 대우한다는 걸 친위대 장령들을 통해 입증했다.
그렇기에 육영공원 1기 지원자가 상당했다. 200명을 선발하는 데 지원자가 그 10배에 달할 정도였다.
이선도 생도 선발에 관여했다. 군무독판인 윤웅렬 본인도 서자 출신으로 출세한 경우라, 가문과 출신만을 보고 뽑지 않았다.
이선은 지원자 목록을 살피던 중에 특별한 이름을 발견했다.
평안도 출신, 무진년(1868)생 홍범도(洪範圖).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격술에 특히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평안도 출신에다 신분이 워낙 낮아서, 혹여 반발이…….”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내가 직접 면접을 보겠으니 불러 주십시오.”
이선의 부름에 약관 남짓한 청년이 들어섰다.
“평양에서 온 홍범도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반갑소. 나는 독판외무부사 이선이오.”
그 유명한 완화군이라는 말에, 홍범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과, 광영이옵니다.”
‘나야말로 영광일세. 홍범도 장군을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 연무공원에 지원한 목적을 듣고 싶은데.”
홍범도는 목청을 가다듬고, 평안도 사투리가 나오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예의를 갖춰 말했다.
“저는 3년간 평양 병영에서 복무했습니다. 나라에 경장이 있고, 출신에 상관없이 무관을 선발한다고 하여 상경하여 시험에 지원했습니다.”
육영공원 공고에 따라 홍범도가 지원한다고 하자, 주위에서는 평안도 출신 나팔수가 무슨 무관이냐고 비웃었다. 하지만 홍범도는 꿋꿋이 시험을 준비했다. 열심히 병학(兵學)을 익히고 사격술을 연마했다.
홍범도가 독학하며 익힌 병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지만, 그 노력만큼은 가상했다.
“그렇다면 무관이 되고 싶은 이유는 출세하기 위함이오?”
홍범도가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비록 제 출신이 낮다고 해도, 충군애국 하고 싶은 마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평양에서 복무하며 새로운 군대의 필요성을 그 누구보다 절실히 느낀 사람입니다.”
홍범도는 기존 군대의 부조리를 보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군대와 너무 달라 실망을 거듭했다. 하지만 한양에 와서 친위대의 위풍당당한 행군을 보자, 그가 생각하던 진정한 군대를 발견하게 했다.
“저는 새 군대의 무관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습니다.”
이선은 빙긋 웃었다.
‘홍범도가 포수 출신 의병장으로 독립을 되찾기 위해 나라를 떠날 필요 없이, 조선군의 장교가 되어 자주독립을 지킬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역사의 변화가 있을까.’
“포부가 좋소. 뜻하는 바가 이뤄지길 바라겠소.”
며칠 후, 연무공원 합격자 공고가 있었다.
“통(通)이다!”
“제길, 불통일세.”
사람들의 환호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홍범도는 조마조마하며 명단을 훑어봤다. 거의 끝까지 봐도 자신의 이름이 없어 한숨이 나왔다.
“휴우.”
완화군과의 최종면접 이후 잘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나 싶었다.
그러다 뒤늦게 수석과 차석을 제외하면 이름의 국문 순서대로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홍범도(洪範圖)라는 이름이 맨 마지막에 적혀 있는 걸 보고, 비로소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야! 길티, 길티! 내래 해낼듈 알았디!”
주위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는 걸 보고, 홍범도는 한양에 온 이상 사투리부터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86년 5월 1일, 1기 학도 200명이 연무공원에 도열했다. 조정 대신들이 개교식에 참석하여 연무공원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지금 세계는 난세요, 국방은 나라의 근본이니 장교의 자질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이외다. 생도 여러분은 대조선 군대의 기간이 될 장교로 성장하여, 성은에 보답하고 충군애국하기를 바라외다.”
군무독판 윤웅렬이 군부를 대표하여 연설했다. 생도들은 부동자세로 연설을 들었다.
군제개편과 함께 새로 조직한 군악대가 처음으로 서양식 행진곡을 연주했다. 미국인 교관들의 입국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미군을 대표하는 행진곡이 연주되었다.
뜻밖의 환영에 미국인들은 기쁘게 노래를 불렀다. 특히 남북 전쟁 베테랑 출신인 메릿과 다이는 조선에서 조지아 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이 연주되자 즐거워했다.
Bring the good old bugle, boys, we’ll sing another song
Sing it with a spirit that will start the world along
Sing it as we used to sing it, 50,000 strong
While we were marching through Georgia!
좋은 옛 나팔을 꺼내게 친구들, 새로운 노래를 부르세
온 세상을 놀래킬 기세로 부르세
5만 장병들과 부르던 대로 부르세
우리가 조지아를 행진하던 그때에!
Hurrah! Hurrah! we bring the jubilee!
Hurrah! Hurrah! the flag that makes you free!
So we sang the chorus from Atlanta to the sea.
While we were marching through Georgia!
만세! 만세! 우리가 희년(禧年)을 불렀지!
만세! 만세! 그대를 자유롭게 하는 저 깃발!
우린 애틀랜타에서 바다까지 노래를 부르며 갔지
우리가 조지아를 행진하던 그때에!
행진곡 연주에 맞춰 친위대의 사열행진이 있었다. 보무당당하고 정예인 모습에 학도들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앞으로 나도 저런 군대를 지휘할 수 있단 말이지.”
“그건 무사히 졸업한 이후의 일이고. 과정을 엄격히 해서 낙제하면 무조건 퇴학시킨다더라.”
학도들은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본격적인 교육과정이 시작되자, 미국인 교관들은 훈련의 방법과 내용에 모든 정열을 기울였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의 학제가 조선식으로 약간 변형되어 도입되었다. 학도들도 열성을 가지고 훈련을 받았다.
‘덕양, 체양, 지양’을 조화한다는 교육 방침에 따라, 군사학 교습과 엄격한 훈련이 매일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학도들의 상당수는 이미 무과에 합격했거나, 한양의 양반 자제들이었다. 사관학교 설립을 전국에 알렸다고 해도 정보의 습득과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홍범도처럼 지방 군영에서 복무하다 자원한 경우는 드물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무반도 세습하는 경향을 보였기에, 학도 중에는 특히 기존 무관의 자제가 많았다. 이들은 기존과 차원이 다른 훈련 강도에 점차 지쳐갔다.
“아니, 뭐가 이렇게 고되냐. 이렇게 힘들단 말은 없지 않았나?”
“그러게 말이야. 무관이 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그전까지 무과 선발이 파행으로 이루어졌으니, 갑작스럽게 상승한 교육 수준에 적응을 못했다. 오히려 성공욕에 불타는 평민 출신들이 더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홍범도는 이미 군대 경험도 있고, 체력과 사격술이 뛰어났고, 지휘관으로서의 자질도 갖고 있어 금방 두각을 드러냈다. 이는 자연히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어휴, 처음엔 연무공원에 들어왔다고 좋아했는데, 양반 체면에 상놈들하고 같이 훈련을 받으려니 부끄럽다. 가문의 망신이야.”
“상놈도 보통 상놈이어야지. 살다 살다 평안도 상놈하고 동렬에 설 줄이야.”
홍범도는 자신을 조롱하는 말임을 알아들었다. 그는 이런 모욕을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평양 군영에서 상관들에게 당했던 모욕과 부조리는 참아넘겨야 했지만, 같은 생도에게 모욕당할 이유는 없었다.
“무시기? 상놈? 그래, 나 평안도 상놈이다. 평양 사람 무서운 거 들어 봤나?”
“어휴, 그러세요. 무섭네, 무서워.”
“한 대 쳐보지 그래? 상놈이 양반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홍범도는 그동안의 한을 담아 자신을 조롱하던 생도들을 들이받고 싶었지만, 그래도 꾹 눌러 참았다. 기껏 들어온 연무공원에서 사고를 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무슨 부끄러운 행동인가? 당장 그만두게!”
지나가던 학도가 동료들의 일탈을 꾸짖었다. 양반 생도들은 또 상놈이려니 하다가, 그가 학도대(學徒隊)장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자네도 명문가 양반이면서 왜 상놈 편을 드나?”
“나라에서 문벌을 금하고 신분제를 혁파했거늘, 무슨 양반 상놈 타령인가? 연무공원 교칙에도 신분 차별을 엄금하고 있네.”
“흥,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격이 달라지나.”
“상놈하고 동렬에 설 수 있나?”
말리던 생도가 정색하고 꾸짖었다.
“사람의 격은 신분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덕양에 달린 것이네! 자네들은 양반을 부끄럽게 만들지 말고, 불만이면 자진 퇴교하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나는 자네들의 일탈을 교관들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네.”
학도대장의 일갈에, 불평하던 양반 학도들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고맙소, 학도대장.”
“우리는 같은 학도인데 존대할 것 없네.”
“음, 그리하지.”
“자네의 실력은 다들 높이 평가하네. 그래서 질시하는 게지. 저런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기분 상하지 말게나. 나 역시 자네에게 배우는 점이 많아.”
“고, 고맙네.”
홍범도는 그에게서 진정한 양반의 품격을 느꼈다.
학도대장은 명문가인 경주 이씨로, 그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었다. 그 부친도 이조참판을 지낸 이유승(李裕承)이었다.
연무공원 1기 학도대장의 이름은 바로 이회영(李會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