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45
– 145화에 계속 –
145화 위협
원세개는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듯 쾌재를 불렀다.
“내 그럴 줄 알았소! 완화군이 아라사와 밀접한 관계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데, 그동안 아닌 척해 왔지. 대청이 아라사와 갈등을 맺고 있는데 육로 통상 장정을 맺고, 갑자기 전권공사를 파견한다고 하니 분명 무언가 밀약이 있다고 생각했소.”
민영익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화군께서는 아라사 황제와 각별한 사이입니다. 주조선 공사 베베르와도 벗이나 다름없지요. 하오나 개인의 친분과 국가 간의 조약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완화군께서는 육로 통상 장정을 맺고 공사 파견을 명하면서 아라사와 밀약을 맺었습니다.”
“대체 그 밀약의 내용이 무엇이오?”
“그게……. 좀 말씀드리기가…….”
민영익이 주저하자, 원세개가 거듭 채근했다.
“밀약이 있다고 하면서 내용은 말씀 못 할 것이 뭡니까? 중대한 일이니 반드시 알려 주십시오.”
민영익이 잠시 고민하다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원 대인, 제가 말씀을 드린다 해도, 이건 사사로운 원한이나 가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를 믿고 중책을 맡겨준 완화군께 누가 될까 우려가 됩니다만, 아라사와의 밀약은 워낙 중차대한 일이라 조선과 동양의 앞날이 걱정되어 고민했습니다. 대인의 말씀을 들으니 중국과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세개가 특유의 오만한 태도를 저버리고, 정중하게 읍하면서 말했다.
“민 공의 안위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완화군과 개화당 무리가 공을 해치지 못하도록 중국이 보호하겠습니다.”
민영익은 고개를 숙여 화답하고, 비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 개인의 안전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주상 전하의 안전과 국가의 평안이 중요합니다. 조약을 맺은 지 얼마 안 된 서양 세력인 아라사보다는, 오랫동안 한집안처럼 여겨왔던 중국에 평안을 의탁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원세개는 민영익이 너무나 쉽게 중차대한 사안을 토설하는 것에 대해 의심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민영익이 자신보다는 조선과 국왕의 안정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니, 원세개는 민영익의 진심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민 공의 우국충정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는 결코 사사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온 조선, 아니 중화에서도 공의 충정을 높이 칭송할 것입니다. 중국은 조선은 과연 한집안과 다름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책임지고 보호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민영익은 마침내 목소리를 낮추어 원세개에게 말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원세개의 표정이 붉게 달아올랐다.
“완화군과 개화당 무리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을 멋대로 추진할 수가 있는가!”
“대인,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부디 조선을 지켜달라는 바람을 저버리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아아, 물론입니다. 혹시 밀약의 문건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원세개는 증거가 필요했다.
“문건이 있긴 합니다만, 이는 외무독판이신 완화군의 소관이니 제가 확보하긴 어렵습니다.”
“말만으로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꼭 문건이 필요합니다. 밀약 문건을 확보하면, 민 공의 앞날은 만대에 걸쳐 보장될 것입니다.”
민영익이 고민하다가 결국 승낙했다.
“확보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원세개가 크게 기뻐하며 민영익을 치하했다.
“조선, 아니 동양의 앞날이 민 공에게 달렸습니다!”
며칠 후, 민영익이 은밀히 원세개와 만났다.
“진본은 외무부에서 철통같이 보안을 유지하고 있어 확보하지 못했습니다만, 진본을 옮겨 적은 사본을 구했습니다.”
진본이 아니라고 하니 원세개는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어서 보여 주십시오.”
조선의 왕자이자 외무장관인 이선이 대 러시아 제국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저는 러시아에 망명하여 지극한 황은을 입은바, 폐하의 배려 덕에 조선으로 돌아와 국가의 개혁을 완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러시아의 대개혁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 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 대군주와 조선 정부는, 국권의 진흥에 힘써 영구히 타국의 구속을 당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열강의 승인하에 중립을 선포한 것도 이를 위해서입니다.
하온데 조선은 명백한 자주독립국인데도 타국의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케케묵은 과거의 논리로 조선을 압박하며, 그 대리인은 오만방자하여 조선의 군신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만약 타국이 조선의 중립을 무시하고 국권을 침해하려 한다면, 조선은 가장 믿을만한 이웃인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사시 러시아에서 육해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보호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선과 러시아는 상부상조할 수 있으니, 러시아에 대한 무한한 호의의 뜻으로 특별한 조선의 이권을 양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보호의 대가로 원하시는 바를 일러주시길 바랍니다.
개국 495년, 1886년 조선국 독판외무부사 이선
“참으로 기가 막히는 밀약이로군! 이는 조선을 아라사에 팔아먹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원세개가 열을 올리니, 민영익은 자기 잘못인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니 부디 조선이 잘못된 길을 걷지 않도록 중국에서 잘 인도해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민 공의 도움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원세개는 화급히 밀약의 사본을 첨부해 이홍장에게 전문을 보냈다.
아라사에 조선을 팔아먹으려는 완화군의 추악한 실체가 낱낱이 밝혀졌습니다. 그동안 완화군은 대청과 중당의 호의를 이용하여 농락하였을 뿐입니다. 마땅히 징벌이 필요합니다. 적당한 조치를 훈령으로 내려주십시오.
전문을 읽어본 이홍장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홍장은 밀약의 내용을 읽고 격노하였으나, 곧 냉정을 되찾고 답신을 보냈다.
완화군이 아라사와 밀약을 맺었다고 하니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다. 먼저 일의 선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상황을 알아보겠으니, 그대는 조선에서 계속 정보를 확보하라.
이홍장의 전문을 받은 원세개는 실망스러웠다.
“중당께서 너무 조심하는군. 이 문서가 사실이든 아니든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완화군과 개화당 무리들을 몰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거늘.”
이미 원세개는 밀약의 사실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반청 독립성향을 보이는 완화군과 개화당이 러시아와 결탁해서 동양 정세를 흔들려고 하니, 이를 명분 삼아 쫓아낼 생각이었다.
“아라사와의 밀약을 명분 삼아 쫓아낸다면 감히 누가 뭐라 하겠는가? 대청에는 그런 힘이 있다. 이대로 완화군을 놔두면 분명히 중국을 노리는 칼이 될 것이다. 미리 싹을 끊어놔야 한다.”
원세개는 이홍장이 아니라, 강경파들과 연락해 ‘조선 정벌’을 부르짖게 할 준비를 시작했다.
1886년 12월. 원세개는 각국 공사와 조선의 서양인 고문관들을 청 상무위원 관저로 초청했다. 모두 한자리에 모이자, 원세개는 밀약의 사본을 공개했다.
“여러분, 이걸 보십시오! 조선이 중립을 운운한 건 술책에 불과했습니다. 실상은 완화군이 아라사와 결탁하여 조선의 이권을 팔아먹고, 동양 평화를 흔들려고 한 것입니다!”
문서 내용을 읽어보던 조선 관료들이 충격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원세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증거가 명확하지 않습니까? 마땅히 완화군은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사본을 읽어보던 고문관 묄렌도르프와 데니가 일제히 이의를 제기했다.
“문서의 진본도 아니고 필사로 적은 사본이 무슨 증거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조작될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습니까?”
원세개는 민영익을 증인으로 댔다.
“조선의 고위 관료이자, 완화군의 측근인 민영익이 바로 이 밀약의 내용을 공개한 증인입니다.”
“민영익 한 사람만으로 어찌 증인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미국 공사 푸트와 무관 포크 중위도 이의를 제기했다. 특히 보빙사 일정을 함께 했던 포크는 더욱 반발이 컸다.
“제가 몇 년간 함께 지켜본바, 완화군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조선의 그 누구보다 서양에 대해 호의적인 건 사실이나, 나라의 이익을 팔아먹을 배신자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민영익이야말로 심약한 위인이니, 청과 결탁하여 일을 꾸민 것 아닙니까!”
“뭐요? 결탁이라니! 그대야말로 완화군과 결탁하여 미국인 고문관들을 채용하고, 전권공사를 보내게 한 걸 모를 것 같소? 아라사가 없었다면 밀약의 대상은 미국이었겠지!”
혈기가 넘치는 포크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미합중국을 모욕하는 겁니까! 미합중국 장교의 명예를 걸고 맹세컨대, 미국을 모욕하는 발언을 취소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호오, 용서하지 못한다면 어쩔 거요?”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밀약’의 당사자인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냉소적인 태도로 반응했다.
“완화군이 러시아와 밀약을 맺었다면 반대쪽도 책임자도 있겠지요? 이 문서대로라면 본관이겠군요. 하지만 금시초문입니다.”
“허, 물론 그러시겠지요. 밀약을 들킨 당사자가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지.”
“청국이야말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러시아와의 국경조약을 유리하게 맺으려고 이런 일을 꾸민 게 아닌지? 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베베르가 정곡을 찌르자, 원세개가 벌컥 화를 냈다.
“지금 요동에는 10만의 정예병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내 말 한마디면 이들이 조선으로 들어와 완화군과 개화당 무리들을 축출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물론 밀약대로 아라사가 조선을 도우려 하겠지요? 하지만 극동군의 취약한 전력으로 북양함대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노골적으로 전쟁을 운운하는 원세개의 말에, 베베르뿐만 아니라 각국 공사들이 반발했다. 일본 공사도 나섰다.
“조선의 중립을 침해하고 군대를 파견하면 천진 조약 위반이 된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조선이 중립을 충실히 지키려 하는 경우나 그렇지요. 먼저 아라사와 결탁하여 동양 평화를 흔든 건 조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국 영사?”
원세개는 러시아의 남하를 누구보다 껄끄러워하는 영국을 끌어들이려 했다. 영국의 지지만 얻어낼 수 있다면, 나머지는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문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렇겠지요.”
애스턴은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거문도에서 철수한 이후, 영국은 당분간 조선에 대해 불간섭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밀약이 사실이라면 경계할 일이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먼저 조선의 답변을 기다리는 게 우선일 듯합니다.”
애스턴은 외교관 특유의 조심성을 보였다.
“그들이야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요. 뭐, 두고 봅시다. 완화군이 뭐라고 한들, 증거가 명백한 이상 10만 대군이 황해를 넘어 진격해 들어갈 수 있으니.”
“노골적으로 전쟁을 위협하지 마십시오. 조선이 비록 작은 나라라고 하나,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건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군사고문관 고든이 분개하여 외쳤다. 영국인이라는 걸 떠나, 고든은 조선의 군사고문관으로서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조선은 중국의 신하인데, 서양에서는 신하가 외세를 끌어들여 군주에게 반역하더라도 용납해줍니까?”
“비유가 맞지 않습니다. 지금은 만국공법의 시대로, 조공국이라 할지라도 주권이 있는 이상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묄렌도르프와 데니도 반발했지만, 원세개는 귓등으로 흘렸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게 따로 있었다.
원세개가 밀약의 내용을 북경으로 보내자, 청불전쟁으로 실각했던 청류파들이 강경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조선이 아라사와 결탁하여 중국에 반역하였으니, 마땅히 징벌해야 합니다!”
“태종(홍타이지) 황제께옵서 조선을 정벌한 이래, 조선은 대청의 충실한 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서양을 끌어들여 중국에 반역하려 한단 말입니까?”
“이는 모두 북양대신 이홍장이 완화군 이선에게 뇌물을 받았기에, 이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눈을 감아준 덕분입니다.”
“황상께서 책봉한 조선의 왕이 따로 있는데, 어찌하여 일개 왕자가 국정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저들의 중립이 대청에 대한 반역의 뜻임이 명백히 밝혀졌으니, 천병(天兵)을 조선으로 보내 천조(天朝)의 지엄함을 보여주시옵소서!”
1636년 병자호란 이후 꼭 250년 만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위협에 사람들은 놀랐다.
“청이 조선을 침공한다고?”
원세개의 노골적인 위협은, 이선이 기다려 주던 명분을 축적해 주었다.
‘청의 국력에 대한 과대평가와 조선에 대한 과소평가가 일을 이렇게 만들어주는군.’
원세개는 좋게 보면 과단성 있고 야심만만하지만, 나쁘게 보면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질렀다.
실제 역사에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신속히 진압할 수 있었던 건 분명 원세개의 과단성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조선이 고립무원의 상태였다면, 이선은 안전장치를 여러 겹으로 만들어 놨던 것이다.
‘청은 결코 조선을 침략할 수 없다. 예전하고 다른 시대라는 걸 내가 명백히 보여주지.’
“원세개는 공을 세우기에 급급하여, 가짜 문서를 만들어내어 조선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원세개가 증인으로 내세운 민영익은 부친과 가문의 일로 원한을 품고 멋대로 밀서를 조작한 것입니다. 즉각 민영익을 심문하여 진실을 명확히 밝히겠습니다.”
이선은 밀약설을 단호하게 부인하고 민영익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