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47
– 147화에 계속 –
147화 유학생
1887년, 미국 워싱턴.
양복 차림에 단발을 한 동양인 청년 셋이 한자리에 모였다.
‘양복 차림에 단발을 한 동양인은 일본인’뿐이었으므로, 미국인들은 으레 그들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입니다, 구당(矩堂) 형.”
“이야, 윤경(允卿)과 성흠(聖欽). 정말 간만이구려. 어디 보자, 한 5년 만인가?”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군요.”
하지만 이들의 정체는 조선인 유학생이자 외교관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였다. 유길준은 서른둘, 서재필은 스물넷, 윤치호는 스물셋으로 모두 한창 활동하던 청년들이었다.
유길준은 미국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단발과 양복을 입었고, 서재필과 윤치호도 그렇게 했다.
갑신경장 이후에도 조선 조정은 공식적으로 단발령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을 상대하는 외교관과 유학생에 한하여’ 단발과 양복을 권장했다.
단발과 양복에 거부감이 큰 사대부를 배려한 조치로, 외교관과 유학생에 한정하여 시행한 조치에 큰 반대는 없었다.
“오래간만에 보게 되어 반갑소. 미국에서도 조선 사정에 대해 유심히 듣고 있었소이다만, 경장을 선포하고 개화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타국에서도 큰 힘이 되었소이다.”
개화당 동지이자 미국 유학의 선배인 유길준이 반갑게 맞이했다.
1883년 보빙사절단 일원으로 미국에 와서,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유길준은 1885년 보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희망하던 대로 법학, 그중에서도 국제법을 전공하여 연구했다.
“윤경과 성흠도 경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지요? 조국이 개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나는 외국에서 구경만 하고 있으려니 부끄러워서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구당 형이 미국에서 많은 도움을 준 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완화군께서도 감사의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조선이 중립을 선포할 때, 미국에 있던 유길준은 자신이 조사하고 연구한 바를 전신을 통해 조선으로 보냈다. 특히 벨기에와 불가리아 사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조선에서 참조하도록 했다.
“그야 내가 여기에서 공부하는 목적은, 결국 조선의 개화에 이바지하기 위함이오. 그대들이 미국에 온 이유도 같을 것이고.”
“물론입니다.”
서재필과 윤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주미국 조선공사관의 참찬관으로 파견되었지만, 조정의 허가를 받아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기로 결정되었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조선에서 쉽게 공부할 수 없는 자연과학을 선택했다. 서재필은 의학, 윤치호는 수학을 공부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낮에는 공사관 일을, 밤에는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에 매진했다.
이들을 시작으로, 조선 조정을 유망한 청년을 서양으로 유학 보내는 계획에 착수했다.
청나라와 일본에서 미국 유학을 보낸 게 1860년대였으니, 조선은 그보다 늦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학생의 귀국 후 신분 보장이 가장 잘된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들이 조선 사회를 지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차이가 있었다. 청나라는 미국 유학생들이 ‘불순한 사고방식에 물들었다’고 하여 중용하지 않으려 했다.
“마음은 진작 찾아오고 싶었지만, 학업이 급해 지금에서야 올 수 있었소. 아무튼,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회포를 풀어보도록 합시다.”
미국에 조선 공사관이 신설되고, 조선 사절단이 오자 유길준도 크게 기뻐했다. 겨울방학이 되자 부랴부랴 보스턴에서 워싱턴으로 와서 조선 공사관을 방문했다.
세 사람은 맥주를 마시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유길준은 조선과 동양 사정에 관해 물었고, 서재필과 윤치호는 반대로 미국과 서양 사정에 관해 물었다.
서로 한창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술잔을 들이키니 취기가 상당히 올랐다.
“내가 조선에 없는 사이에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군. 학업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가면 상전벽해가 아닐까 싶은데, 하하하.”
“조정은 갑신경장부터 10년을 기한으로 삼아 대대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럼 갑오년 즈음에는 확고히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겠군.”
셋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조선에서 가장 급진적인 문명 개화론자들이었다.
“개화란 인간 사회를 지선극미(至善極美)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오. 내가 보기에, 역사 단계의 발전은 미(未)개화, 반(半)개화, 개화의 세 단계가 있소. 조선은 이제야 막 미개를 벗어나 반개화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지. 역사와 문명은 진보하고 있소. 조선은 진보의 막차를 탈 수 있을 것이오.”
유길준은 당시 서양을 풍미하던 사회진화론과 문명 진보 사관의 영향을 받아 확고한 진보주의자가 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조선의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 되겠지. 무조건 서양의 것을 추종하는 게 아니라 조선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 개화, 실상개화(實狀開化)를 추진해야 하오. 나는 지금 조정에서 이를 제대로 추진해나가는 것 같아 기쁘오.”
이때 서재필이 반론을 제기했다.
“구당 형께서 미국에 오래 계셨으니 저희보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마는, 그래도 전 미국에 오고 나서 더욱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개화의 속도를 높여 하루라도 빨리 서양과 동렬에 서야하지 않겠습니까?”
윤치호는 서재필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일본처럼, 아니 일본 이상으로 철저하게 서양화를 추진해야 합니다. 조선이 뒤떨어졌던 만큼 서둘러 보충해야지요. 기존의 조선은 완전히 낡았습니다. 다 뜯어고쳐야지요. 아예 서양의 제도와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방법이 될 겁니다.”
30대의 유길준이 보다 전통적인 교육을 받고 일본을 거쳐 미국에 왔다면, 중간 단계를 건너 뛴 서재필과 윤치호는 훨씬 급진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나 역시 개화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조선이 기존에 가져왔던 가치를 부정한다면 반발이 크지 않을까?”
“작금의 세계는 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중국조차도 서양의 눈치를 보는 실정입니다. 서양을 강하게 만든 기술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원천이 된 사상까지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길준은 동양의 법도와 서양의 기술을 접목시키자는 동도서기(東道西器)적인 시무(時務) 개화파와 달리 서양식으로 제도까지 개혁하자는 변법(變法) 개화파였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문명 자체를 서양식으로 전환하자는 문명 개화파였다.
“미국이 내세우는 자유, 평등, 인권, 합리, 대의제, 민주주의. 직접 보고 나니 미국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이를 서둘러 도입해야 합니다.”
“단발하고 양복을 입으면서 서양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저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저는 필요하다면 기독교로 개종할 용의도 있습니다.”
술이 들어간 탓인지, 아니면 ‘자유로운’ 미국에 와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인지, 청년들의 발언 수위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미국, 좋은 나라지. 나는 미국에 온지 몇 년이 되었소만, 아직도 미국에 대해 경탄을 멈추지 못하고 있소. 하지만 그대들은 아직 미국의 어두운 점을 보지 못했소.”
유길준은 이상에 불타는 서재필과 윤치호와 달리, 좀 더 현실적이었다.
“저들이 유색인종을 얼마나 경멸하는지 아시오? 말로는 자유와 평등, 기독교 박애 정신을 외치면서, 흑인과 홍인(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소. 우리 황인들이라고 다를 것 같소?”
유길준은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인종차별을 지적했다. 유길준은 미국인으로 가득한 술집에 동양인 셋이 들어와 조선말로 떠드는 자신들을 두고 별로 곱지 못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있음을 의식했다.
“우리 신분이 공식 외교관이고 명문대에 다니는 유학생이기 때문에 대우가 좀 다른 것뿐이오. 우리는 적당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신분이니까.”
유길준의 말대로, 이들은 ‘신분 보장되고, 영어 잘하며, 서양의 방식을 배우려는 동양의 모범생’으로 여겨졌기에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중국인 쿨리(막노동자)나 일본 이주민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보면, 미국에 대한 환상도 깨질걸.”
“그건 그만큼 저들이 강하기 때문이지요. 앞으로 조선의 힘, 동양의 힘이 더 강해진다면, 언제든지 역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강해져서 저들을 이겨내면 그만입니다.”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이들은, 인종차별을 역겨워하면서도 이를 내재화했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서재필과 윤치호는 갑신정변 이후 ‘보호받지 못하는’ 신분으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일상생활의 인종차별과 각종 서러움을 맛보면서, 이들이 찬탄하던 미국의 현실을 보게 된다.
그래도 서재필이 미국 여인과 결혼하여 시민권을 받아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면, 많은 난관을 겪고 조선으로 돌아가야 했던 윤치호는 비뚤어진 사회진화론자가 된다.
바뀐 역사에서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중책을 맡을 예정인 이들이, 서양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돌아갈지, 이선의 새로운 관심사가 되었다.
갑신경장 이래 조선의 근대화는 불변(不變)이 되었다. 서양식 근대화를 인식하는 자세로, 기존의 시무 개화와 변법 개화에서 더 나아가 문명개화의 담론까지 등장했다.
미래의 지식을 가진 이선은 내심 그 누구보다 확고한 문명 개화론자였다.
‘일관되고 철저한 서양화만이 약육강식의 근대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일본이 이를 증명했고, 중국이 반면교사가 되었지. 아니, 일본 방식으로도 부족해.’
이선은 서양의 기술과 법제는 받아들였지만, 사상과 시민사회의 원리는 거부하여 군국주의로 폭주한 일본의 사례를 경계했다.
‘세 단계로 나눠서, 향후 10년은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시행해 자주독립을 완수한다. 그 후 10년은 식산흥업과 부국강병을 통해 근대사회의 확고한 물적 토대를 만든다. 그 후에는, 헌정과 대의제를 실시해 국민이 주체가 되는 국민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자주독립, 식산흥업, 부국강병, 국민국가.
이선의 장대한 30년 구상이었다.
하지만 이선은 정책을 이끄는 집정자이자, 왕족의 신분으로 이를 대놓고 외치기가 곤란했다.
경장 이후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청년 진보주의자들이 문명 개화론을 받아들이고 지지했다.
이들의 영수는, 바로 김옥균이었다. 비밀결사였던 개화당의 지도자에서 정부의 지도적 인사가 된 김옥균은, 정권을 잡아 경장을 추진한 이후에도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권력을 행사하는 당국자의 보수성과 세상을 바꾸려는 급진성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옥균은 이선의 구상을 이해하고, 실천으로 옮기려 했다.
자신이 다름 아닌 프랑스 공사로 파견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믿었다.
“나는 입버릇처럼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고 싶다고 하였지. 하지만 이는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 노릇을 하고 싶어 하니, 조선은 최소한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는 관념적 망상에 지나지 않았소. 하지만 완화군께서는 진짜 ‘아시아의 프랑스’의 의미를 일깨워 주셨지.”
센(Seine)강을 바라보는 파리의 주점 앞에서, 초대 주프랑스 조선 공사 김옥균이 프랑스어를 읊조렸다.
“Les hommes naissent et demeurent libres et égaux en droits(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나서 살아간다).”
바로 이선이 김옥균과 계손향에게 들려주었던 말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공표한 「인간과 시민에 관한 권리 선언」 제 1조를 동양인이 큰소리로 읊조리자, 주위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하지만 김옥균은 그다지 개의치 않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서양의 근대를 만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 영국의 산업혁명, 그리고 프랑스의 대혁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추진하는 개화는 반쪽짜리에 불과할 것이오. 그렇기에 나는 주프랑스 공사 겸 영국 공사 겸 이탈리아 공사로서, 조선의 이익을 대변함과 동시에 서양의 근대를 확실히 익히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3국 공사를 겸하게 된 김옥균은 파리에 주재 공사관을 두고, 상황에 따라 런던과 로마를 오가기로 했다. 대 영국 외교는 총영사인 서광범이 맡고, 김옥균이 지휘하는 형태였다. 이탈리아는 아직 특별한 관계가 없으므로 겸임 공사로서 충분했다.
“선생이 여러 나라를 제쳐두고 프랑스를 유학지로 선택한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군요.”
김옥균은 맞은편에 앉은 동년배의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양복에 깔끔하게 단발을 한 김옥균과 달리, 사내는 한복에 갓을 쓰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완전히 튈 수밖에 없는 복장이었다.
“맞습니다. 서양 근대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을 연구해 보고 싶었지요.”
“훌륭한 생각입니다.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조선 사람이 있다는 게 반가울 따름이군요. 피차 열심히 해보도록 합시다.”
사내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다. 더 특이한 점은 프랑스와 수교를 맺자마자, 관비도 아닌 사비를 들여 유학을 왔다는 점이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김옥균은 자신보다 먼저 조선 유학생이 왔다는 걸 보고 놀랐다. 이를 기특히 여겨, 조정에 청원하여 사내가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내의 이름은 바로 홍종우(洪鍾宇)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