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5
– 15화에 계속 –
15화 선택
“조선인은 전부 문약한 줄 알았더니만, 이하응은 진정 효웅(梟雄)일세!”
이선이 나간 후에, 이홍장이 이하응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홍장은 이선이 하는 말이 모두, 이하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저 왕자도 범상치 않게 느껴집니다만.”
이홍장 뒤에 서 있던 40대 초반의 사내가 말했다.
“음, 정 통령도 그렇게 생각했나?”
사내는 이홍장의 오른팔인 정여창(丁汝昌)이었다. 이홍장과 동향인 안휘성 출신으로, 이홍장이 태평천국과 맞서 조직한 회군(淮軍)의 지휘관이기도 했다.
이때 정여창은 통령북양수사기명제독(統領北洋水師記名提督)으로, 이홍장의 명을 받아 북양 수사를 근대적 해군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예, 저야 영어 실력이 중당에는 미치지 못하나 대략 알아들을 수는 있었으니. 나이를 감안하면 화술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래. 저 소년도 효웅의 피를 이어받아 재기(才氣)가 남다르군. 그 재기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듯해.”
“대청과 조선은 한집안이니, 조선에 영명한 왕자가 있다는 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음, 그렇지. 근데 내가 알기로 조선에 세자는 따로 있는데 말이야……. 유능한 왕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어찌 되겠나?”
이홍장의 의미심장한 말에, 정여창이 씩 웃었다.
“대청의 품에 들어온 왕자를 누가 감히 건드리겠습니까? 아마 그래서 대원군도 저 왕자를 이곳으로 보내지 않았을지요.”
“그렇겠지. 어찌 됐건 대원군이 우리와 접촉을 취한 건 바람직한 일이네. 적어도 수교를 반대하진 않겠군. 대원군을 다시 봐야겠어.”
역설적인 일이었다.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이홍장의 명을 받아 북양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들어와 대원군을 납치해 온 이가 바로 정여창이었다. 이들은 조선에 다시 배외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걸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선의 등장으로 인해 이홍장과 정여창이 대원군에 대해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이홍장의 관저를 물러난 이선은, 이제 막 첫발을 뗀 느낌이었다.
‘이만하면 이홍장과의 첫 만남, 아니 외교 무대 데뷔 자체가 성공적이겠지? 앞으로가 더 중요하겠지만…….’
“대감, 대체 아까 북양 대신과 어느 나라 말로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송 객주의 질문에 이선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영어요. 영길리와 미리견에서 쓰는 말.”
“아니, 대체 언제 서양 말은 알게 되신 건지…….”
안영흠도 놀랐다. 오랫동안 모셨던 이선이지만, 그가 영어를 할 줄 알았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운현궁의 뜻에 따라 미리 익혀 두었소. 언제 이렇게 외국과 교섭하게 될지 모를 일 아니겠소? 이건 비밀이니, 그대들도 비밀을 지켜 주시오.”
이번에도 대원군 핑계를 대자, 모두 순순히 받아들였다.
“과연 국태공께서는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이 있으십니다. 군 대감께서도 총명하기 이를 데 없으시고요.”
“하하, 아첨해 봤자 뭐 나오는 것 없소이다.”
“아첨이 아닙니다. 청국의 실력자라는 북양 대신 이홍장과 천하 정세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물며 서양의 언어로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걸 믿고 무작정 북양 대신을 찾아간 것 아니겠소.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있을 터이니, 너무 놀라지들 마시오.”
이선의 말에, 일행은 모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각으로 돌아온 이선은 관복을 벗고, 호복(胡服)을 구해 오라 명했다. 아무래도 조선 관복은 천진에서 너무 눈에 띌 게 뻔했다.
‘단발하고 양복을 입고 싶지만, 그럼 일본인이라고 생각할 테니 눈에 띄는 건 마찬가지.’
이선은 일행에게도 모두 만주인의 마괘(馬褂, 마고자)를 입게 했다.
본래 마고자는 만주인의 옷이었으나, 대원군이 청나라 유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입고 들어와 이후에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선은 그보다 몇 년 빨리 자발적으로 입게 된 셈이었다.
“이제 좀 덜 눈에 띄겠군.”
변발을 하고 있지 않아 청나라 사람으로 보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한복보다는 사람들의 주목을 덜 받게 될 터였다.
일행은 며칠 쉬었다가, 이홍장의 부름을 받고 다시 북양 대신의 관저를 찾았다.
이선은 송 객주에게 명해 이홍장에게 견본으로 줄 개성 홍삼을 챙기게 했다.
“어서 오시오. 천진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시오?”
“중당의 배려 덕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대청의 옷이 잘 어울리는구려.”
“입어 보니 따뜻하고 편해서 좋습니다.”
“잘했소. 여기서는 조선 옷보다 마괘를 입는 게 편할 거요.”
이홍장은 흐뭇해했다. 의복과 예의에 목숨을 거는 조선의 왕자가 자발적으로 청나라 옷을 입으니, 스스로 친청파가 된 것 같아 보기 좋았던 것이다.
‘빨리 양복 입었으면 좋겠다.’
이홍장의 생각과 달리 이선은 하루라도 빨리 상투를 깎고 양복을 입고 싶었다. 21세기에는 늘 그렇게 지내왔으니, 그쪽이 훨씬 편했던 것이다.
“일전에 부탁한 대로,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소개장을 준비해 봤소. 조선에서 서양 사정을 알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보낸 밀사로 소개했소.”
이홍장은 북양 대신의 명의로 된 소개장을 이선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이것도 받아 두시오. 천진에 현재 주재 중인 영사관의 위치와 영사의 이름이오.”
이선은 천진 조계(租界)에 위치한 영사관과 영사의 목록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아는 이름이 여럿 보였던 것이다.
“중당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뭘, 조선에서 자발적으로 서양과 논의한다니 반가운 일이지. 특히 대원군께서 마음을 돌렸다니 좋은 일이오. 더 이상 수교의 걸림돌은 없지 않겠소?”
“예, 하오나 조선은 오랫동안 사대부의 나라였습니다. 유생들의 반발이 크니, 이를 잠재우려면 대략 1, 2년의 시간은 필요할 것입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요.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고, 아직도 천조(天朝)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자들이 너무 많지…….”
이홍장은 혀를 끌끌 찼다. 자신도 유학을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한 엘리트 사대부이지만, 서세동점의 현실을 인정하고 가장 빠르게 서양 문물을 흡수한 관료였다.
“중당께서 고민이 크시겠습니다. 특히 함대를 건설하려면 워낙 비용이 많이 들 터이니…….”
“아아, 안 그래도 그게 고민이오. 영국에서 군함을 사 오려고 하는데 이게 좀 비싸야지. 군함이란 게 참 돈 먹는 귀신이오, 귀신.”
이홍장은 연안 방어에서 확장된 대양 함대를 원했고, 이를 위해 영국에서 최신 순양함 2척을 주문해 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아라사와 전쟁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지금 중요한 건 점증하는 일본의 위협에 맞서 해군을 건설하는 것이지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오. 아라사와의 전쟁은 어림도 없소.”
“조선에서 온 저도 중당께서 바른길로 나라를 이끈다고 여기거늘, 이 나라에서 중당의 혜안을 몰라보는 이들이 안타깝습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이번에도 이홍장이 원하는 바를 이선이 정확히 찍어내니, 만족해했다.
“제가 조선과 중당의 공통된 고민을 덜어드릴 겸, 천진의 아라사 영사관을 찾아가 한번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조선 입장에서도 아라사가 정말로 조선 영토를 노리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아라사 영사는 한문도 능통하고, 동양을 존중하지. 말이 잘 통하는 위인이오.”
이홍장이 흔쾌히 승낙하니, 이선은 속으로 빙긋 웃었다. 현재 청과 러시아 사이가 심각하니, 러시아 영사관을 찾는 건 사전에 양해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홍장이 승낙했으니 내가 러시아 외교관과 어울려도 결탁했다고 하는 이는 없겠군.’
“중당께서 나라를 위해 이토록 불철주야 일하시니, 제가 조금이나마 성의를 보일까 합니다.”
이선은 안영흠과 송 객주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궤짝을 들고 왔다.
“이게 무엇이오?”
“직접 열어 보시지요.”
이홍장은 궤짝을 열어 보자, 잘 쪄낸 홍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고려 홍삼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개성에서 나오는 최상품이지요.”
“그런데 이걸 왜 내게……?”
이홍장은 이선의 목적을 짐작하면서도, 짐짓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건 결코 뇌물이 아닙니다. 조선이 청국에 판매하는 물품으로 홍삼만큼 수익이 좋은 것이 없습니다. 조선도 개항을 하면 대외 무역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운현궁과 개성상인이 시험 삼아 중국에서 판로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대외 무역을 배워 보려는 것이지요.”
이선의 매끄러운 설명에, 이홍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무역을 통해 국부(國富)를 얻는 건 중요한 일이오.”
“중당께서 이를 보증해 주시면 큰 영광이겠습니다. 그리해 주시면 이문의 1할을 중당께, 아니 직례성에 바치겠습니다. 이번에 개성에서 홍삼 천 근을 들고 왔으니, 백 근은 바치고자 합니다.”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받겠소? 가당치도 않소.”
이홍장은 완곡히 거절의 뜻을 밝혔으나, 속내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국가 간에는 관세라는 게 있는데, 아직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관세 협정이 없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관세는 1할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관세 대신에 드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를 통해 관세도 배워 보는 것이지요.”
이선이 이홍장에게 주는 건 당연히 뇌물 목적이었지만, 이를 관세라고 포장해서 말하니 이홍장도 만족스럽게 껄껄 웃었다.
“과연 현명하오! 암, 국부를 위해서 관세는 필요하지. 좋소. 그럼 내가, 아니 직례성이 관세를 대신해서 받도록 하지.”
“예, 여기 송 객주가 앞으로 저를 대신해서 개성과 천진 사이를 오고 갈 것입니다. 조선과 청국 사이에 정식 무역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이 조건을 유지했으면 합니다.”
단순한 밀무역이 아니라, 향후 조선의 국부가 될 홍삼 무역의 기초를 닦을 생각이었다.
“좋소. 그리 하십시다. 앞으로 직례성에서 송상에 편의를 봐 드리지.”
조선에서 가져온 홍삼을 중국에서 판매하면 7배의 이문을 남긴다. 밀무역의 형태가 아니라 이홍장의 보증을 받아 판매하면 중국 상인들에게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그 이문의 10%를 꼬박꼬박 이홍장에게 상납하겠다는 것이니, 이홍장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청렴한 관료와 거리가 먼 이홍장은 축재에도 재능이 있었다.
“조선말에, ‘누이 좋고 매부 좋고’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니, 비밀을 지켜 주십시오.”
이홍장은 흔쾌히 동의했다.
“하하, 그거 좋은 말이군. 물론이오. 여기 있는 사람들만 알도록 합시다.”
‘이로써 당분간 자금은 걱정 없겠군. 이 돈을 기반으로 다른 사업도 생각해 봐야겠어.’
이선은 기왕 이홍장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니, 정치와 경제를 가리지 않고 다각도로 접근해 볼 생각이었다.
청나라 최고 실력자 이홍장과 사업적으로도 특수한 관계를 맺게 된 이선은,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대로 이홍장 및 청나라의 권력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면, 임오군란이 터졌을 때 이홍장이 알아서 이선을 꽃가마에 태워 조선으로 보내 줄 터였다. 권력으로 접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청의 꼭두각시밖에 더 되나? 그럴 수는 없지. 스스로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청나라의 힘을 빌려 권좌에 오르는 건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동시에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기도 했다.
이선은 대원군이건 이홍장이건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었고, 주체적으로 조선의 권력을 쟁탈할 생각이었다. 열강은 사업 파트너지, 영혼까지 팔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 누가 조선과 내게 가장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인가.’
이선은 이홍장에게서 받은 천진 주재 각국 영사관의 위치와 영사의 목록을 살펴보았다.
일본 영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영국 영사 찰로너 그랜빌 알라바스터(Chaloner Grenville Alabaster)
프랑스 영사 샤를 딜롱(Charles Dillon)
독일 영사 대리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
러시아 영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미국 영사는 현재 부재. 영국 영사관이 대리 중.
‘일부러 이렇게 모이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향후 조선하고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이 셋이나 되는군.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구만.’
이선은 어디를 선택해야 조선과 자신에게 가장 득이 될지, 면밀히 따져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