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53
– 153화에 계속 –
153화 국민교육
1889년, 대조선 개국기원 498년.
경장 시작 이후 5년 차에 접어들어, 이선이 구상하던 ‘개혁 1기’ 10년의 중간 지점에 도달했다. 이 해에,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잇달아 추진되었다.
먼저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전국 8도를 13도로 나누었다. 인구가 많은 삼남의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면적이 넓은 평안도, 함경도를 각각 남·북도로 나누었다. 그리고 수도인 한성부를 경기도 관할이 아니라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독립시켰다.
기존의 8도 산하에는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행정 개편 과정에서 ‘부’와 ‘군’으로 이원화했다. 도시에는 부, 농촌에는 군이었다. 군 아래에는 ‘면’과 ‘리’를 두었다. 월경지로 복잡했던 행정단위도 정리하여 관할구역을 명확히 했다.
행정구역 개편은 행정의 효율성 외에도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국민 동원을 수월히 할 목적이었다.
제일 먼저 추진된 건 국민교육이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무협판 유길준이 학제 개편을 주도했다. 학무부는 프랑스 국민교육을 모델로 한 학제(學制)를 공포하였다.
“학제를 공포하여, 개국 499년(1890)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한다.”
소학교 4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3년이 학제로 정해졌다.
소학교는 초등교육 과정으로 의무교육이고, 중등교육 과정에 해당하는 중학교부터는 학문을 익힐 목적이었다.
고등학교는 전문학교로, 사범학교·농업학교·상업학교·광공업학교·전신(電信)학교 등이 해당했다. 혹은 예비 고등교육 기관으로, 향후 설치될 종합대학 진학자를 위한 기관이었다.
학무부는 교육 기회의 균등을 위해 최소한 각 도에 고등학교 1개, 각 군에 중학교 1개, 각 면에 소학교 1개씩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늘어나는 만큼이나 학교가 많이 필요함에 따라, 전국에 사범학교가 설치되었다. 한성사범학교에서 정식 3년제를 수료한 교사들이 배출되어 학무부 관리로 임용되었다. 사범학교에는 1년 이내의 속성과정도 있어서, 기존의 서당 훈장이나 유생도 교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출신과 관계없이, 모든 취학연령의 아동은 초등교육을 이수할 의무가 있다.”
8세 이상의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학교 취학의 의무화되었다.
학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분과 성별에 무관하게, 전국 모든 아동을 대상으로 학교에 진학하여 의무교육을 이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라의 명이 떨어졌으니, 내년부터는 자제들을 소학교에 진학시키시오.”
“교육은 그 자체로 충군애국(忠君愛國) 하는 길이오. 출신과 관계없이 아이라면 누구나 학문을 익혀 수양하고, 장차 입신양명을 할 수 있으니, 나라와 백성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오. 자! 모두 학교로 오시오.”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이상에 불타는 청년들이 발령지로 가서 신학제를 홍보했다.
이미 3년 전에 교육 조서를 공포한 바 있어, 국민교육에 대해서는 예고하였기에 반발은 별로 없었다. 예전부터 교육열이 워낙 강한 조선이기에 백성들의 기대도 컸다.
“모두가 학문을 익힐 수 있다니, 참으로 좋은 세상이 왔군그래.”
“나라의 뜻이 그렇다면 마땅히 받아들여야지.”
“난 일자무식하여 농군으로 살아왔지만, 우리 아들놈은 반드시 공부시켜 출세시킬 거네.”
국민교육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와 기대는 상당했다. 하지만 모두가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공맹의 도가 땅에 떨어진 세상이라지만, 서당을 없애고 양놈의 학문을 익히기 위해 학교에 가야 한다니?”
“서원을 없앤 것도 모자라 서당까지 없애다니! 정녕 이 나라가 성학을 저버린단 말이냐?”
먼저 향촌 양반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기존의 서당은 교육기관에서 배제되었고, 오직 신식 학제를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 곳만 살아남아 학교로 개편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보조금이 주어졌고, 신입생 선발의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모조리 사설 학원 정도로 격하되었다.
“상놈이 교사랍시고 양반의 자제를 가리킨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양반 자제와 상놈 자식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계집까지 교육 받게 하라는군.”
“완전히 강상(綱常)의 도리가 무너졌군. 말세로구먼, 말세야.”
향촌 양반의 반발에 이어, 농민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아니, 대체 농사꾼에게 뭔 학교가 필요하단 말요? 그런 건 양반님네들이 하면 되는 거지.”
“열 살이면 농사에 필요한 인력인데, 아무 대가 없이 학교에 보내 일꾼 하나 줄이라고?”
“소학교가 완전히 공짜도 아니고, 월사금을 내야 한다며?”
“돈까지 내고 애들을 4년씩이나 버리라구?”
“심지어 계집애까지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거야.”
“사내도 안 하는 판에, 계집이 뭔 공부야?”
중앙에서 교부금이 내려왔지만, 기본적으로 교육세는 지역별로 충당하여 학교를 운영하는 걸 원칙으로 했다. 그러니 지역별 편차가 컸다.
한성·평양·함흥·개성·수원·공주·대구·전주 등 전통적인 대도시는 본래 교육이 발달했고, 인천·부산·원산·목포·경흥 등 개항장과 인근 지역은 학제를 적극 지지했다.
개화의 혜택을 본 도시나 개항장, 인근 농촌은 전반적으로 학제를 지지했다. 이들은 상민들이 신분과 관계없이 신교육을 통해 ‘입신양명’을 이루는 걸 눈으로 보았기에 교육의 효과를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시와 개항장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일수록, 교육을 불신했다. 이들의 사고방식으로 국민교육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육은 국민의 의무이다. 이를 어기는 부모는 벌금을 내게 될 것이다.”
관아에서는 ‘국민의 의무’임을 강조하여, 불응하면 벌금이나 처벌을 위협했다.
“젠장, 완전히 강요잖아.”
“흥, 나라에서 뭐라고 하든 나는 안 보내!”
백성들은 마치 부역(負役)이 또 생긴 것처럼 받아들였다.
1890년 국민교육 첫해, 학교 진학률은 지역·신분·직업에 따라 천차만별을 보였다.
도시와 개항장의 진학률은 상당히 높았으나, 벽촌으로 갈수록 현저히 낮았다. 옛 양반과 상인의 자제들은 어딜 가나 진학률이 높았으나, 농민은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남성 진학률은 비교적 높았으나, 여성 진학률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교육의 효과를 분명히 맛보게 되면, 알아서 학교에 보내게 되어있다.’
이선은 당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각지의 소학교는 실용학문을 가르쳐 새 시대에 필요한 지식을 익히게 했다. 또한 근대국민교육의 특징인 애국주의적 교육이 이뤄졌다. 조선의 단일한 언어와 오래된 역사를 중시하여, ‘한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연원을 학습시켰다.
양반이나 상놈이냐, 경기도 출신이냐 평안도 출신이냐는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민족’이라는 게 중요했다.
국민교육의 첫 세대인 1880년대 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국민’이었다.
‘근대국민국가는 두 공간에서 만들어진다고 했지. 학교와 병영.’
국민교육에 이어 국민개병이, 국민국가를 뒷받침하는 두 다리였다.
새로 조선에 도착한 독일 군사고문단은 징병제의 시행에 대해 실무적인 도움을 주었다.
1889년 말, 군무부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의 사례를 참조해 징병제 안을 내놓았다.
“서양 각국에서 징병하는 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비병, 다음은 예비병, 그다음은 국민병이다. 비상시나 평상시는 물론 빈부귀천 없이 모두 병적에 편입되어 훈련을 받는다.
날마다 병술을 배우는 자는 상비병이고, 혹 내란이나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군대 생활을 마친 자를 다시 징집하여 함께 방어하는데, 이를 예비병이라 한다. 만약 상비병과 예비병으로 방어하기가 부족하다면 전국에 명을 내려 병역에 복무할 남자는 모두 지원하게 되니 이것이 국민병이다.
그래서 그 나라에 사는 모든 남자는 누구나 병사가 아닌 자가 없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전쟁이 나더라도 수십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하기가 어렵지 않아 내란이나 외침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남자를 병적에 편성시킨 국민개병제는,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자 근대국민국가의 상징이었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1873년 징병령을 선포하여, 가장 먼저 징병제를 도입했다. 이때만 해도 광범위한 면제조항이 있었지만, 1889년 프로이센 징병법을 모델로 개정을 하여 징집률을 대폭 증가시켰다.
최근에 이루어진 1889년의 개정 징병령은 조선에도 참조할 모델이 되었다.
병역검사를 통과한 장정은 2년의 상비병, 5년 4개월의 예비병, 10년의 후비병 생활을 거쳐야 했다.
“작금의 조선 현실에서 징병제가 되겠습니까? 현재의 군대로도 충분할 터인데…….”
“오랫동안 병역을 면제받은 백성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조선은 가뜩이나 상공업이 취약한데, 백성이 징집되어 군대에 들어가면 산업이 더욱 약해질 것입니다.”
“경장 이후 서양의 군제를 익힌 정병(精兵)이 모였습니다. 징병으로 어중이떠중이가 모이면 그 전력이 현저히 약화될 것입니다.”
“기껏 열강의 승인을 받는 중립을 이뤄냈는데, 징병제와 중립은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유교적 이상과도 맞닿은 국민교육과 달리, 국민개병은 정부 내에서도 반발에 부딪혔다.
“국권을 지키는 데 징병제만 한 방법이 없습니다. 징병제를 실시한 나라로써 약한 국가는 없습니다.”
“소수의 용병이 아무리 정예하다 한들, 국민군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용병들은 전투 의지가 약하지만, 국민군은 국가방위의식이 투철합니다.”
“군무부 보고서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개병은 국민교육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군대는 학교의 역할도 합니다. 모든 병졸들에게 읽고, 쓰고, 계산하는 법을 학습시켰기에 교화가 크게 퍼졌고 민심도 단결되었습니다.”
“상공업이 징병 때문에 후퇴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오히려 프로이센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군대와 상공업의 발전이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제일 작은 나라인 스위스조차도 징병제를 채택하여 강대국의 외압을 극복했습니다. 스위스의 중립과 자주독립은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세계정세에 밝은 관료들은 징병제 안에 공감을 표했다.
“서양의 사례만을 무작정 주장하면 어찌합니까? 조선의 경우는 다릅니다.”
“동양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일본이 징병제를 실시하여 그 군비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오, 청국에도 수십만 대군과 북양함대가 있습니다. 조선은 그에 비하면 턱없이 취약합니다. 단기간에 이를 따라잡는 길은 징병제를 통한 군비의 확충뿐입니다.”
“일본이라면 모를까 중국은 조선과 오랜 가족과 같거늘, 무얼 걱정한단 말입니까?”
의정부 총재 영의정 김병시의 말에, 부총재 우의정 홍영식이 벌컥 화를 냈다.
“바로 그런 태도가 틀렸습니다! 조선과 청국은 엄연히 다른 나라이거늘, 어찌 국방을 청국에 의존하려 합니까?”
“사대주의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보자는 것이지요. 청의 수십만 대군, 아라사의 수백만 대군을 조선이 징병제를 한다고 한들 유사시 어찌 막아내겠습니까.”
김병시는 보수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개화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유교적 왕도 사상에 근거한 경세 정책을 지지했다. 보수파 원로를 대표해 의정부에 앉아있는 김병시는, 징병제는 조선의 근본적인 사회구조를 뒤흔드는 것으로 판단했다.
“외교로 이들을 잘 달래놔야지요. 완화군 대감께서 이를 완벽하게 조율하지 않으셨습니까?”
좌중의 시선이 이선에게 집중되었다. 이선은 징병제의 실질적인 계획자이면서도, 지금껏 논쟁에 끼어들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분명히 외교는 중요합니다. 외교 덕분에 조선의 자주독립과 중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요.”
“과연 그렇습니다.”
이선은 김병시의 의견을 존중하는 척하다가, 본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는 열강의 호의를 사서 생명을 유예 받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 스스로가 자주독립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외교가 아니라, 오직 내정개혁과 국방 강화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이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오랫동안 맡아왔던 외무독판 직을 사임할까 합니다. 조선을 둘러싼 외교적 상황은 안정되었고, 5년이나 역임했으니 충분합니다.”
“대, 대감!”
“대감께서 물러나시면 어찌합니까?”
관료들이 일제히 당황해서 말했다. 이는 사전에 예고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개화파뿐만 아니라 보수파들조차 당황했다. 이선의 사임은 현재 정국에서 불가한 일이었다.
“대신에.”
이선은 좌중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군무부를 맡아 군제개혁을 완수할까 합니다. 국민개병은 반드시 내년 안으로 시행할 것입니다.”
이선이 군무독판을 맡기로 군부 인사들과 사전에 합의한 바였다. 이선은 반드시 국민개병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사를 드러냈다.
‘초기 5년이 외교였다면, 후기 5년은 국방이다. 군사력 강화에 개혁의 성패와 자주독립이 달려있다.’
아무리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지만, 엄연한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였다. 국민개병은 반드시 달성해야 할 역사적 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