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55
– 155화에 계속 –
155화 국상(國喪)
1890년 6월 4일(경인년 4월 17일). 대왕대비 조씨가 경복궁 흥덕전에서 승하했다.
향년 83세. 당시로는 드물게 장수한 나이였다. 익종(효명세자)이 요절한 지 꼭 60년 만이었다.
남편 효명세자는 왕위에 오르지도 못한 채 22세의 나이로, 아들 헌종도 23세의 나이에 요절하여 오랫동안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시어머니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에 치여 오랫동안 침묵해야 했던 조대비는, 철종이 승하하자 마침내 기회를 잡게 되었다.
흥선군의 차남 재황을 양자로 삼아 왕위에 올리고, 대원군과 함께 안동 김문(安東 金門)의 세도 정치와 오래 묵은 적폐를 척결하였다.
수렴청정이 끝난 후, 대왕대비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임금은 생부인 대원군과의 관계가 나빠질수록 법적 모친인 대왕대비에게 지극정성으로 효성을 다했고, 팔순 잔치도 성대하게 치렀다.
대왕대비의 병세가 갈수록 악화하자, 임금과 중전이 직접 대비전에 가서 병을 간호할 정도였다.
대왕대비가 승하하기 전, 맏손자인 이선도 한동안 대비전에 시립(侍立)하며 쾌유를 기원했다.
병세가 위태로워지자, 대왕대비는 이선을 불러들였다. 노인은 병색이 완연했지만, 자세는 꼿꼿했다.
“완화군.”
“예, 대비마마.”
“아무래도 내가 회복하기는 어려울 성싶구려. 그러니 가기 전에 당부의 말을 할까 하오.”
“어찌 그런 황망한 말씀을 하십니까? 반드시 쾌차하실 것입니다.”
“내 나이 여든셋이요. 익종께서 승하하신 지 한 갑자가 지났으니, 이 늙은이가 너무 오래 살았소. 오히려 갈 때가 지났지.”
“마마…….”
이선이 황망해 했다. 대비는 어조를 바꾸었다.
“너는 나의 맏손자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네가 태어났을 때 모처럼 왕실의 후손이 태어난 것에 모두가 기쁨을 금치 못했지. 나 또한 그러했다.”
이선이 어렸을 적, 대원군 못지않게 총애했던 게 대왕대비였다.
“하지만 주상과 대원군의 관계가 날로 험악해지고, 중전……, 아니 폐비 민씨가 끼어들면서 더 심해졌지. 그로 인해 너는 갈등의 피해자가 되었고.”
대왕대비는 회한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청국으로 떠나고 임오년에 돌아왔을 때, 죽은 줄 알았던 손자가 살아 돌아왔으니, 어찌 나의 기쁨이 운현궁 못지않았겠느냐? 하지만 이는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궁중이 난군에 의해 어지럽혀지고, 중전은 폐비되었다. 대원군과 주상의 관계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됐지.”
이선은 죽음을 앞둔 노인의 넋두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대왕대비는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주상의 전철을 밟으려고 하느냐?”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주상은 네 아버지다. 대를 이어 아비와 자식이 권력을 다투는 비극이 재발했구나. 네가 대원군과 함께 주상을 배제하고, 이제는 모든 걸 너의 뜻대로 하지 않느냐. 주상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아도, 그 실망과 한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다.”
대왕대비의 지적에 이선이 부정했다.
“저는 군부(君父)의 신자(臣子)된 처지로 오직 충성을 다할 따름입니다. 모든 것은 대군주의 명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건 너의 뜻이지 주상의 뜻이 아니지 않느냐. 콜록, 콜록!”
기침을 내뱉던 대왕대비는 이선의 부축을 거절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아녀자이니 정치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겠다. 나는 단지 부자(父子)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네가 아직 어리고, 혼례도 치르지 않아 자식이 없으니 부모의 마음을 모르겠지. 주상은 네 아비다. 주상이 어찌 너를 특별히 생각하지 않겠느냐.”
대비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했다.
“주상과 화해하고, 효성을 다하거라. 주상은 이 나라의 군주이자, 네 아버지임을 잊으면 아니 된다. 알겠느냐?”
이선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마마의 말씀이 지극히 옳으시니, 제가 어찌 그 말씀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좋다. 부디 네가 지켜주길 바란다. 왕실에 골육상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이다.”
“대비마마의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정중히 예를 표했다. 이는 조대비와 이선이 생전에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대비가 끝내 승하하자, 임금은 크게 슬퍼했다. 흰 용포에 한쪽 어깨를 드러내놓고 머리를 풀고서 거적자리에 엎드려 슬피 곡하였다.
영중추부사 심순택 등 원로 대신들이 임금을 찾아가 위로했다.
“우리 대왕대비께서 승하하셨으니, 천지가 아득함을 무슨 말로 삼가 위로하겠습니까? 하오나 감정대로 호곡(號哭)하시다가 옥체를 상하게 될까 대단히 걱정됩니다. 슬픔을 절제하고 곡을 그치기를 삼가 바랍니다.”
“전하께서 먼저 스스로 슬픔을 절제하고 억지로라도 죽을 드신 뒤에 이어서 중궁전에도 드시도록 권하소서. 신들이 삼가 바랍니다.”
임금이 슬퍼하면서도 청을 받아들였다.
“경들의 말이 옳소. 빈전을 태원전(泰元殿)으로 하고, 시원임 대신들이 상사(喪事)를 주재하시오.”
대행(大行) 대왕대비의 시호는 신정(神貞)으로 하고, 능은 익종이 묻혀 있는 수릉(綏陵)으로 정해졌다.
왕실의 큰 어른인 대왕대비의 승하는 마치 옛 시대의 퇴조를 상징하는 듯했다.
그 퇴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임금과 원로 대신들은 전통적 절차에 따라 대왕대비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장례비용으로 왕실의 내탕금 50만 냥이 사용되었다.
추모 분위기는 몇 달에 걸쳐 지속하였다. 흰 상복을 입은 사대부들이 한성으로 올라와, 광화문 앞에서 곡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리 성상을 보위에 올리시고, 왕실과 국가를 지킨 대행 대왕대비의 지극한 공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온데 조정에서는 개화를 내세워, 위로는 임금의 치세를 어지럽히고 아래로는 백성의 민생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반상의 법도를 어지럽히고, 강상의 윤리를 파괴하였습니다. 신하가 군주를 모르고 자식이 부모를 모르며 지어미가 지아비를 모르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모릅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모든 기준은 서양에 맞춰져 있으니, 이 나라 조선이 언제부터 서양 오랑캐의 나라가 되었단 말입니까!”
개화에 반대하는 사대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곡을 하며 불만을 쏟아냈다. 대왕대비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옛 조선의 상징으로 남게 된 것이다.
조정과 개화 정책 전반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개화당은 거슬려 했다.
“순검을 동원하여 저들을 해산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무력을 독점하고 있는 개화당은,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반란에 대비하여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랬다가는 호곡하는 선비를 잡았다고 역효과만 날걸. 마음대로 떠들게 놔두시오.”
이선은 불만을 쏟아내는 사대부들을 용인하기로 했다.
‘저들이 여론을 동원 가능하다면, 위험한 존재이다. 과거에는 사대부만이 여론이었으니 저렇게 모여들어 외치는 게 위협적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대부들의 불평은 정권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단, 퇴조하는 계급의 한풀이에 가까웠다.
그들의 곡소리를 지켜보는 도성 백성들은 대체로 거의 무관심했다.
“양반님네들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역대 조정 중에 이만큼 백성을 생각하는 조정이 어디 있었나?”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한강철교를 넘어 도성에 도착한 상인들은, 양반들의 곡소리를 보며 비웃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저 양반들은 아직도 그대로구먼.”
도시민, 특히 상인들은 개화 정책의 수혜자였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기회를 잡은 이가 상당했다. 이들로선 사대부의 외침이 귀에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이 한 무리의 유생들이 상경하여, 광화문 앞에 모여 곡을 했다.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이었다.
위정척사파의 지도자, 최익현(崔益鉉)이 오랜 침묵을 깨고 한양으로 온 것이다.
보수적 성리학자 이항로(李恒老)의 제자, 최익현은 1873년 대원군을 통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써 대원군의 실각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 위정척사파인 최익현으로서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친정하게 된 임금과도 불화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조선과 일본 간에 수교 조약이 논의되자,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상소를 바치는 지부상소를 단행했다. 상소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우리의 힘은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할 것이다.
둘째, 통상조약을 맺으면 생산에 한계가 있는 우리의 농산물과 무한하게 생산할 수 있는 저들의 공산품을 교역하게 되니 우리 경제가 지탱할 수 없다.
셋째, 왜인은 서양 오랑캐와 하나가 되었으니 그들을 거쳐 서양 문화가 들어오면 인륜이 무너져 금수(禽獸)가 될 것이다.
넷째, 저들이 우리 땅을 자유롭게 오가며 살면서 우리의 재물과 부녀자를 약탈하면 막을 수 없다.
다섯째, 저들은 재물과 여색만 탐하는 금수이므로 화친해 어울릴 수 없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도끼로 목을 쳐 달라는 최익현의 강경한 태도에, 임금도 적잖이 불쾌하게 여겼다. 최익현은 임금을 겁박한 죄로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어, 3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최익현은 그 자체로 개항을 반대하는 핵심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최익현은 임오군란과 갑신경장이라는 격동의 시대에도 10년 넘게 침묵을 지켜왔다. 개화에 반대하는 사대부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격동하였지만, 예전처럼 나서기를 꺼렸다.
정치적 호오(好惡)를 떠나서, 신정권이 최익현의 우려와 달리 민생을 안정시키고 민심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나설 여지가 부족했다.
하지만 급진개혁이 이어지고 마침내 국민개병이 실시되자, 최익현은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깼다. 대왕대비의 승하 소식에, 최익현은 기호(畿湖) 유생 수백 명을 이끌고 상경하였다.
“개화한 이후로 선왕의 법제를 모두 바꾸고 일체 양이의 지휘를 따랐으니, 중화를 이적(夷狄)이 되게 하고 사람을 금수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것만도 개벽(開闢)한 이래 처음 있는 일대 변고입니다.”
57세의 최익현은 성성한 백발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상소문을 읽어 나갔다.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의복과 정신까지 서양의 것을 따르려 합니다. 자칭 조선의 관리란 자들이 오랑캐와 같이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은 걸 보면, 이자들이 사람인지 금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대부의 반발을 고려해 공식적인 단발령과 복제개혁은 없었지만, 외교관과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단발 및 양복 착용은 점차 국내에도 확대되었다. 특히 개화당 관료들은 관복을 입을 때를 제외하면 단발과 양복 차림으로 다녔다.
무관의 제복은 아예 서양식 군복을 택함에 따라, 단발이 필수조건이 되었다. 민간 차원에서도 개화의 풍토가 강해지면서 자발적으로 단발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아, 성상께서도 어찌 중화를 따르고 오랑캐를 등지는 것이 잠시도 늦출 수 없는 것임을 모르셨겠습니까. 하오나 조정을 장악한 강신(强臣)의 무리가 성상의 치세를 위협하니, 참으로 비통할 따름입니다!”
최익현의 외침에 유생들이 일제히 곡을 했다.
“마땅히 우리의 전례(典禮)를 보존하고 우리의 문물을 회복하며 조금이라도 오랑캐의 습속에 관련된 모든 정령(政令)은 일체 혁파한 다음, 뉘우치고 고치는 뜻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면, 어찌 중화의 도를 되찾지 못하겠습니까? 오직 밝으신 성상께서 살펴 재결해 주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최익현과 유생들이 일제히 옛 제도의 복구와 개화 정책의 철폐를 외쳤다. 그 소식을 듣고 사대부들이 한양으로 계속 몰려드니, 조정에서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최익현은 병자년에 성상을 위협하는 상소를 올려 위리안치된 자입니다. 이제 또다시 성상과 조정을 매도하고 위협하니, 마땅히 중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외교관 임무를 마치고 귀임한 김옥균이 강경론을 쏟아냈다. 4년간의 유럽 생활로 김옥균은 더욱 더 확고한 문명 개화론자가 되었다. 철저한 위정척사파 최익현과는 상극이나 다름없었다.
“무작정 탄압이 능사가 아니외다. 최익현을 따르는 자들이 많소이다. 그들을 모두 잡아들일 것이오이까?”
영의정 김홍집이 반대했다. 사실 최익현의 상소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이는 다름 아닌 김홍집이었다. 그는 온건 개화파였지만, 조정 밖에 있는 사대부에게 영의정 김홍집은 개화 정책을 이끄는 수괴였다. 그런데도 김홍집은 온건한 해결을 주장했다.
“그동안 조정은 불평분자에게 너무 관대했습니다. 조정의 단호함을 보일 때가 되었습니다.”
“저들이 비록 꽉 막혔다고는 하나, 방법이 다를 뿐 충군애국 하는 마음은 같소이다. 하물며 지금은 국상 기간이거늘, 애도하러 온 선비를 상대로 어찌 무력을 쓴단 말이오이까? 저들을 설득해서 돌려보내도록 하지요.”
사대부들이 비난하는 대상이 결국 자신이라는 걸 아는 이선은, 솔직히 감정적으로는 사대부들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김홍집의 의견이 옳다고 판단했다.
김홍집의 말대로 최익현의 ‘충군애국’에 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내가 생각하는 조선과 그가 생각하는 조선이 너무나 다르다는 게 문제지만.’
“좋습니다. 최익현을 조정으로 불러들이지요.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들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