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57
– 157화에 계속 –
157화 방곡령(防穀令)
국상 절차가 끝나고, 1890년 겨울에 접어들었다. 전국적으로 국민교육이 시행되고, 징병검사도 집행되었다. 입영 적격자로 판명된 장정 1만 5000명이 내년 초부터 각 지역의 진위대에 입영하기로 했다.
표면적인 갈등은 봉합되고, 국민국가로의 길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내부 갈등은 어떻게든 봉합되어 갔지만, 문제는 외부에서 다시 싹트기 시작했다.
1889년과 1890년은 잇달아 흉년으로 동아시아 전체의 작황이 좋지 못했다. 미곡(米穀) 가격이 급등하면서 쌀 품귀 현상까지 나타났다.
조선 조정은 이전과 달랐다. 흉년을 재앙처럼 받아들였던 과거와 달리, 국가에서 미곡을 수매(收買)한 뒤 빈민들에게 분배하여 흉년에 대처하고자 했다.
“미곡의 매점매석을 금지한다. 당분간 미곡 거래는 국가의 통제하에 둔다.”
개항 이후 일본에서 사들이는 곡물의 규모가 상당했다. 지주들은 쌀을 품고 있다가, 가격이 오르면 개항장을 통해 일본으로 판매해 이문을 올리곤 했다.
일본 또한 곡물 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일본 상인들은 정부의 지원하에 거액을 융자받아 조일 간의 곡물 무역에 몰두했다.
하지만 조선의 곡물 작황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상인의 대량의 곡물 구입은 조선의 곡물 부족 문제를 초래했다.
풍년에는 잉여 생산량이 많았기에 상관없었지만, 흉년에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농업 인구가 많고 생산량이 많은 삼남 지방은 그렇다 쳐도, 생산량이 적은 북부 지역의 타격이 컸다.
“미곡의 무분별한 반출을 엄금한다. 조일 통상 장정에 의거,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에서 방곡령(防穀令)을 시행한다. 해당 지역에서는 1년간 다른 지역으로 미곡을 반출할 수 없다.”
1883년에 체결된 조일 통상 장정에 따르면, 한발·수해·병란 등으로 국내 식량의 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사전 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9월 1일, 이북 5도 지역에서 방곡령을 시행함을 결정하고, 외무부는 일본 공사관에 통고했다. 이북 5도 지역에서 10월 1일부터 미곡 수출을 금지하자, 일본 상인들이 반발했다.
“이미 미곡 구매를 마쳤는데 지금 통보하면 손해를 감수하란 말인가?”
“우리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일본 상인들은 이미 쌀, 콩, 팥 등을 적게는 수천 석에서 많게는 수만 석의 곡물을 매입해 둔 상태였다. 방곡령 소식이 전달되는데 시일이 걸린 것이다.
그들은 방곡령이 사전에 아무런 통고 없이 시행되었다는 주장하며 인천감리서에 항의하였다.
인천감리서는 곡물의 운반을 허용하라는 통첩장을 황해도에 발송하였다. 그러나 황해도 관찰사는 황해도에는 개항장이 없으므로 한일 간의 통상장정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하면서 통첩장을 무시해버렸다.
개항장인 원산이 있는 함경도에서는 갈등이 더 심하게 발생했다. 원산의 일본 영사는 부랴부랴 방곡령 연기를 주장했지만, 함경남도 관찰사는 이를 무시하고 방곡령을 실시했다.
수만 석의 미곡을 모아두었던 일본 상인들은 큰 손해를 입었고, 상인들은 공사관으로 몰려들어 항의했다.
“방곡령으로 대체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지 아십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빚을 내준 제일은행에도 손해입니다! 국가적인 손실이라고요!”
일본 대리공사 곤도 신조(近藤眞鋤)는 방곡령 폐지와 상인들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방곡령 폐기와 상인들의 피해 보상을 요구합니다.”
신임 외무독판 김옥균이 냉정하게 거절했다.
“조일 통상 장정에 규정된 대로 방곡령을 시행한 것입니다.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대체 무슨 무례한 요구입니까?”
통상 장정의 규정을 세세히 읽어본 곤도가 구절을 가지고 트집을 잡았다.
“통상 장정에 따르면 한발, 수해, 병란 등 천재지변이 있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언제 천재지변이 있었습니까? 무작정 방곡령을 선포한 게 아닙니까!”
“조선도 흉년이었습니다. 흉년이 천재지변이 아니면 대체 뭐가 천재지변이란 말입니까? 더 논할 것도 없으니 돌아가십시오.”
조선 조정의 단호한 거부로 방곡령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1891년에 들어서 신임 조선 주재 일본공사 가지야마 게이스케(梶山鼎介)가 부임함에 따라 방곡령 사건은 다시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조선에서 곡물 무역에 종사하는 일본 상인이 방곡령 사건에서 큰 손해를 입었다는 것을 구실로, 일본공사는 조선 정부가 일본 상인의 손해에 대해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합니다. 방곡령 폐기, 책임자 처벌, 일본국 상인의 피해 보상. 일본 상인의 손실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첨부합니다.”
외무독판 김옥균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는데, 가지야마가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상인의 손해가 막심합니다. 22만 엔의 배상금을 요구합니다.”
김옥균이 벌컥 화를 냈다.
“귀국에서 작성한 보고서에도 실제 피해액은 12만 엔으로 집계되는데, 대체 뭘 근거로 그런 액수를 산정했단 말입니까?”
“귀국의 일방적인 통보로 인해 발생한 문제이니, 당연히 추가 배상금이 있어야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방곡령은 우리의 주권 문제요. 결단코 이런 요구에 응할 수 없소이다.”
“일본은 귀국의 중립과 자주독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런데 우의를 저버리겠다는 것입니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런 사소한 문제로 인해 일본에 대한 조선의 우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좋습니다. 어디 두고 보시지요.”
조선 조정은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천진 조약 이후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을 정도로 잠잠하던 일본이 갑자기 강경하게 나서는 것에 대해 조선 관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선은 알 수 있었다. 일본 주재 공사관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토대로 정세를 짐작했다.
“첫째, 국내 정치적 요인. 신임 총리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취임했습니다. 일본 군부를 대표하는 야마가타는 대외 강경파이지요.”
1889년. 일본은 메이지 헌법을 반포하고, 육군의 대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3대 총리로 취임했다. 야마모토 내각은 일본의 국력 신장과 발전 방향을 정했다. 즉 군사 면에서는 대규모 군비 확장을 지향하고, 외교면에서는 서양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추진했다.
1890년, 의회 선거로 일본 제국의회가 개설됐다. 야마모토는 첫 시정연설에서 ‘주권선’과 ‘이익선’의 수호를 천명했다. 주권선은 일본 영토를 의미하고, 이익선은 일본과 밀접한 이익의 주변국, 즉 조선과 대만을 의미했다. 조선에서의 이익을 수호하겠다는 의미였다.
“둘째, 국외정치적 요인. 일본은 불평등조약 개정을 추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일본 우익들은 격분했고, 조약 개정에 실패한 외무대신이 피습을 당할 정도로 분위기가 흉흉합니다. 그러니 외교적으로 강경책을 쓸 요인이 충분하지요.”
목표한 군비 확장은 착착 진행됐지만, 일본의 조약 개정요구는 서양 열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격분한 일본의 우익단체 겐요샤(玄洋社)는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게 폭탄 테러를 감행했고, 오쿠마는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후임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青木周蔵)는 야마가타 못지않은 대외 강경파이자 대륙 팽창론자였다. 총리에서 외무대신까지 모두 강경파가 되었으니 일본의 태도가 바뀐 것도 당연했다.
“셋째, 사회경제적 요인. 일본은 산업화에 돌입했고, 농촌 인구의 이농 현상이 심각합니다. 취약한 일본 산업이 경쟁하려면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해서 수지를 맞추는데, 그러기 위해선 미곡가를 저가로 유지해야 하지요. 근데 흉년으로 이게 안 되니까, 외국에서라도 곡물을 긁어모으려고 하는 겁니다.”
1870년대부터 식산흥업 정책에 들어선 일본은 농업과 농민을 착취하여 산업을 진흥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농민의 몰락이 가속화됐고, 저임금의 노동자가 되어 도시로 향했다. 일본 정부는 농촌에 강압적 정책을 써 미곡가를 저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흉년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웃나라인 조선에까지 손을 뻗치는 것이었다.
“그럼 어찌 대처하는 게 좋겠습니까?”
“일본은 중요한 이웃 나라이니, 척을 져서 좋은 일이 없습니다. 저들 상인이 큰 피해를 본 건 사실이니 피해액을 적당히 보상해 주고…….”
영의정 김홍집의 온건론에 외무독판 김옥균이 강경하게 외쳤다.
“단 한 푼의 보상금도 줄 수 없습니다! 무시하면 됩니다. 일본공사가 군함 파견을 운운하며 위협하고 있긴 하지만, 천진 조약이 있는 이상 군대를 파견할 순 없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부러워하고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김옥균이었지만,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데는 양보가 없었다.
“저도 외무독판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일본은 결코 말 이상의 위협은 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야마가타가 아무리 강경파라지만, 청이나 러시아와 일전을 각오하면서까지 일을 확대할 리가 있나?’
이선도 김옥균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자, 의정부 각료 대부분이 대일 강경론에 동조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배상 요구를 묵살하기로 했다.
“조선이 방곡령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에 대한 무역 금수 조치에 나선다.”
야마가타 내각은 금수(禁輸) 조치로 대응했다.
어쩌니저쩌니해도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높았고, 주된 수출도 일본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정부는 강경한 경제적 조치로 조선이 굴복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도 단호하긴 매한가지였다.
“일본 아니면 무역할 나라가 없나? 금수에는 금수로 대응한다. 일본산 제품뿐만 아니라 일본 경유 수입품에도 모두 추가 관세를 부여한다.”
1891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총성 없는 무역전쟁이 개시됐다.
양국 정부의 갈등으로 인해 가장 큰 손실을 보는 건 조선에 거주 중인 일본 상인과, 그들을 상대하는 조선의 지주와 매판 상인이었다. 이들을 무역분쟁을 해소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조선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조일수호조규 이후, 조선을 경제적 식민지로 취급한 일본 정부와 상인의 행태는 심히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번 기회에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
가뜩이나 높은 대일 무역의존도를 줄이고 싶어 했던 이선에게, 이는 피할 수 없는 투쟁으로 여겨졌다.
“대체 조선이 뭘 믿고 이러는 건가?”
조일 양국 중에 조선이 훨씬 경제가 취약했으므로, 무역분쟁이 장기화되면 조선의 손실이 크리라는 게 자명해 보였다. 일본 정부는 이를 확신하고 강경책을 쓴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의 단호함으로 사태는 장기화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할까 우려가 됐는데, 잘 됐군.”
조일 간의 갈등을 가장 즐거워하는 건 청국이었다. 청국은 진작부터 조선 시장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비중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조선에서 일본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청국은, 이번 기회를 틈타 적극적으로 무역을 확대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아닌가. 그동안 침체했던 조선 무역을 늘립시다.”
아시아 무역을 주도하던 영국 상인들도 기회를 노렸다. 이들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수출되는 공산품이 대개 일본제보다는 영국제임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일본이 선취 효과로 중개무역이면서도 조선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콩과 상해에서 온 영국 상인들이 직접 인천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귀국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관세협정에 대해서는 신중히 고려해보겠습니다.”
1882년 조영 조약 이래 영국 상인의 숙원은 조선의 높은 관세율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단호하게 협상을 거부해 왔던 조선의 태도에, 영국은 조선 진출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외무독판 김옥균이 조영 간에 관세협정을 다시 맺을 수 있다는 기미를 보이자, 영국 상인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선은 자국의 주권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다. 일본 정부의 요구는 부당하기 짝이 없다.”
러시아는 조선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나라는 아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가까웠다.
야마가타 내각의 팽창 정책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러시아는 조선의 편을 들었다.
무역 다각화를 노리는 조선은, 원산과 함경도 일대에 러시아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극동 경제의 미발전으로 유보하는 태도를 보이던 러시아도,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이 시작되자 조선 북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891년 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대공의 극동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니콜라이 대공의 방문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 부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미 시베리아 횡단 열차 부설이 시작되었고, 1891년부터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부설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때마침 내 친구 니콜라이가 온다니 잘됐군. 이제 인아거일을 쓸 때가 왔다.’
이선은 니콜라이의 극동 방문에 맞춰, 러시아를 움직여 일본을 제압할 계획을 구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