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62
– 162화에 계속 –
162화 주권선과 이익선
1889년, 3대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련의 ‘외교 정략론’을 제출한다.
1안. 열강에 의해 보증받는 조선 중립화 유지.
2안. 일본 주도 하의 조선 보호론.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해, 일본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보호한다.
이토와 문관, 해군과 사쓰마 파벌이 원하는 바가 1안이라면, 야마가타와 육군, 조슈 파벌이 원하는 건 2안이었다.
야마가타는 2안을 토대로, 일본 정부의 정략을 모색했다. 1890년 11월 제국의회 개원식에서 있었던 ‘주권선과 이익선’ 연설이었다.
“주권국가는 다른 나라의 침해를 허용하지 않는 주권선을 지키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주권선의 안위와 긴밀히 관계를 맺는 이익선을 보호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군비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공개된 연설이고, 비공개된 외교 정략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면,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로 신속하게 대군을 파견하여 전략상 긴요한 요지를 점령할 것이다. 조선은 러시아에 종속되고, 동양에 일대 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쓰시마 섬의 머리 위에 칼날을 닿는 정세가 되어 주권선마저 지킬 수 없다.”
야마가타는 러시아 위협론에 조선은 일본을 향한 대륙의 비수(匕首)라는 ‘조선 비수론’을 결합시켜 군비를 국가 예산의 3할까지 올리는 데 정당화했다.
야마가타와 같은 조슈 파벌에 속하는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러시아를 적으로 하는 청일동맹을 체결한다. 영국의 후원을 받아 청일동맹군은 시베리아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 레나강 동쪽을 청국에 할양한다. 일본은 조선과 연해주를 속령으로 확보한다.”
아오키의 주장은 너무 극단적이라 일본 정부 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베리아 철도 부설을 일본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때까지 청국을 타도하고 동양의 패자가 될 목적으로 군비를 강화하고 있던 군부는, 더 나아가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선의 설명을 들은 니콜라이가 격분했다.
“일본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그따위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 이 정보가 모두 사실인가?”
“내가 황태자께 거짓을 말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조선과 러시아의 앞날이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일세. 나 역시 저들의 계획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네.”
“고맙네. 문자 그대로 극비 정보일터인데, 대체 어떻게 확보한 것인가?”
‘…… 내 머릿속 기억.’
애초에 이선은 확신이 없었다. 분명 21세기에 외교사 문서를 본 건 사실이지만, 역사가 바뀌었으니 일본 정부의 정략도 변화했을 수 있었다.
하지만 1890년 11월 야마가타의 ‘주권선과 이익선’ 연설이 역사대로 이뤄지는 걸 보고, 이선은 짐작할 수 있었다.
‘역사가 바뀌어도 육군과 조슈 파벌은 그대로군. 분명히 저들은 대륙 침략을 추구할 것이다.’
방곡령 갈등이 전면적인 무역 갈등으로 확산하는 걸 보고, 이선의 짐작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다.
‘야마가타와 조슈 파벌을 제거해야 한다.’
기회를 엿보던 이선에게 러시아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천우신조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일본 정부 내에 나에게 협조하는 사람이 있네. 그는 합리적인 인물로, 군부의 말도 안 되는 팽창 주장에 반대하고 있지. 그가 내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네.”
이선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상의 인격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말이 되는군. 근데 자네에겐 분명히 도움이 되는 사람이겠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반역자 아닌가?”
“아니지! 일본이 멸망의 길을 걷는 걸 막으려 하니, 진정한 애국자라고 할 수 있지.”
“아, 그렇게 되는군. 맞네. 그 말이 맞아.”
이선이 두 번이나 암살을 막으면서, 니콜라이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선은 나와 로마노프 황가를 위해 하느님이 보내주신 사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옳지 않은가?’
신비주의 성향이 강한 니콜라이는 종교적 확신을 했다. 이제 이선이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상황이었다.
1891년 5월 18일(율리우스력 5월 6일). 이날은 니콜라이 황태자의 23번째 생일이자, 시베리아 횡단철도 극동 기공식이 있는 날이었다.
머리에 붕대를 매긴 했지만 건강한 모습의 황태자가 기공식 현장에 나타나자, 러시아인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
“러시아 제국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니콜라이는 웃으면서 답례하고, 짧게 연설을 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량이자, 러시아의 번영을 상징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니콜라이는 기공식의 상징적인 퍼포먼스로 망치를 들어 철도에 못을 박았다.
“와아!”
모스크바까지 총 길이 9288km, 유럽과 아시아를 2주 만에 이을 19세기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철도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미 서쪽에서는 우랄산맥 너머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시작되었다. 서쪽과 동쪽에서 철도를 이어나가, 1900년까지 완공하는 게 목표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면, 유라시아의 정세가 근본적으로 바뀌리라는 예측이 많았다.
최소한 니콜라이 본인은, 자신이 ‘태평양의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이 생겼다고 판단했다.
“표트르 대제께서 발트해를 정복하고 예카테리나 대제께서 흑해를 정복했다면, 나의 사명은 태평양으로 나가는 것이라 믿고 있소. 시베리아 철도는 그 시작을 상징할 것이오.”
그 사명을 완수하려면, 힘의 우위와 부유한 자본, 동맹자를 필요로 했다. 철도 부설에 필요한 자본은 프랑스가 제공했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이 실현 직전까지 다가옴에 따라, 러시아는 고립에 대한 우려도 떨쳐냈다. 힘의 우위라면 자신이 있었다.
‘감히 일본 따위가 내 앞길을 막으려 한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니콜라이는 일본에 대해 관대한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이선의 말을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천황은 틀림없이 선량하고 좋은 군주지만, 주변의 간신들이 그의 총명을 가리는 것이리라.’
니콜라이는 메이지 천황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단지 주위의 간신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애초에 전제군주제 국가의 후계자인 니콜라이에게, 황족도 아닌 신하들이 모든 결정을 하는 일본의 정치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처럼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이선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10년 전에 고려인 자치를 이끌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던 이선이지만, 1882년에 귀국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려인과 러시아인을 막론하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로마노프 황가의 구원자이신 이선 공이시다!”
“이선 공 만세!”
조선 왕자 이선과 그리스 왕자 요르요스가 암살자로부터 니콜라이의 생명을 구했다는 소식은 러시아 전역에 전해졌다. 이선은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막은 적도 있었기에, 그에 대한 열광은 대단했다.
“군 대감께서는 참으로 우리 고려인의 자랑이십니다. 러시아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연해주 고려인의 대표, 최재형이 이선에게 찬사를 보냈다.
“하하, 그리 말해 주니 내가 더 기쁘군. 우리 동포들의 삶은 어떻소?”
이선과 최재형의 재회도 오랜만이었다. 1882년에 귀국하면서, 이선은 고려인 사회의 전권을 최재형에게 맡긴 바 있었다. 그로부터 지속적으로 보고를 받았지만, 대면하는 건 근 10년 만이었다.
“군 대감께서 예비하신 대로 되어가고 있지요. 동포들의 삶은 풍족하고 행복합니다. 육로 통상 장정의 체결 이후,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면서 두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우리 동포들도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이선의 조선 근대화 구상은 연해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선의 구상을 이어받은 최재형과 고려인 사회는, 조선보다 더 빠르게 근대화되어 갔다. 비록 러시아 국적이었지만, 교육과 생활의 측면에서 상당한 진일보를 이루어냈다.
“다들 열심히 배우고 일을 합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자니 부끄럽지만, 머슴의 아들이었던 제가 러시아에서 성공한 것이 큰 자극을 주었지요.”
“부끄러울 게 뭐 있소? 나 역시 연해주의 성공 사례를 조선에서 끊임없이 상기시키는데.”
“다 군 대감께서 잘 이끌어주신 덕이지요. 군 대감의 뜻을 받들어, 출신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교육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제 안사람은 초등교사인데, 여자아이들을 가르치지요.”
“그거 훌륭하구려. 조선의 국민교육은 이제 막 시작했는데, 여성 교육에 대한 저항이 커서……. 뭐, 차차 확산하겠지만.”
“제 안사람도 군 대감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하하, 나야 환영이오.”
“왕자님,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최재형의 아내는 이선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기억하다마다.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 알렉산드라 세묘노바 양?”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1884년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고려인 여학생, 알렉산드라 세묘노바였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연해주로 돌아와 고려인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약속을 지켰군요.”
“반드시 제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최재형 군과 결혼하고.”
“제가 열심히 구애했지요. 아내의 지적인 모습에 반했습니다.”
“하하하, 좋군요.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립니다.”
이선은 정말로 흐뭇했다.
왕의 아들인 이선과 머슴의 아들인 최재형이 동등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고아였던 여성이 고등교육을 마치고 돌아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근대화의 상징적인 모습이었다.
‘지금 연해주의 모습이자, 미래 조선의 모습이지.’
이선과 니콜라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어졌다. 니콜라이는 모스크바까지 육로로 여정을 이어가며 미래에 그가 다스릴 제국의 다양한 풍경을 살필 예정이었다.
“만나자니 이별이로군.”
“아쉽지만, 서로 국가에 대한 책무가 무거우니 말이야.”
“아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번 동양 방문에서 참으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네.”
니콜라이는 이선에게 악수를 청했다.
“할아버님에 이어 내 생명도 구해준 자네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걸세.”
“별말씀을. 내 소원이 있다면, 그만큼 조선도 잊지 않아 주었으면 하네.”
“아, 물론이지. 내가 살아있는 한 자네의 조선을 건드릴 외적은 없을 것이네.”
이선은 빙긋 웃었다.
“러시아 황위 계승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마음이 든든하군.”
“당연하지. 그러니 자네는 걱정하지 말고, 조선의 개혁을 위해 힘써 주게. 조선의 표트르 대제가 되어야지.”
두 사람은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그리하지. 만약 다시 조선에 올 기회가 있다면, 확연히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걸세.”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그 전에 자네가 먼저 러시아로 와주게나.”
“음, 언제든 기회가 닿는다면.”
하지만 두 사람은 쉽게 이루지 못할 약속이라는 걸 알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본국을 비우고 외국 여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막연한 미래에 대한 약속일뿐이었다.
더욱 관계가 돈독해진 두 사람은 재회를 희망하며 작별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오쓰 사건 뒤처리를 놓고 홍역을 앓는 중이었다.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내무대신 사이고 쓰구미치,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는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사건이 발생한 시가현 지사와 경시총감도 면직되었다.
후임 총리에는 재정 전문가인 마쓰가타 마사요시, 외무대신에는 러시아통인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취임했다. 다분히 러시아를 신경 쓴 인선이었다.
내각 각료와 원로들은 범인 쓰다 산조는 형법 116조, ‘대역죄’로 처단하길 희망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계엄령을 선포해서라도 쓰다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심원장 고지마 고레카타(児島惟謙)는 단호했다.
“형법상 대역죄는 천황과 황태자, 황후에만 해당한다. 외국 황족은 해당하지 않는다. 모살 미수를 적용해야 맞다.”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심원 판사 전원은 모살 미수죄를 적용했다.
마쓰가타와 각료들은 대경실색했다. 마쓰가타는 고지마를 불러 항의했다.
“당장 쓰다에게 사형을 선고하시오!”
“국가가 정한 법률을 상황에 따라 멋대로 적용한다면, 서양 각국이 일본을 어찌 보겠습니까? 아직도 근대화하지 못한 미개국으로 여길 것입니다.”
“법관의 양심을 지키려다 나라를 망칠 생각이오? 그러다가 러시아 함대가 시나가와 만으로 쇄도하면, 제국은 한 방에 끝장이오! 존망의 기로란 말이오!”
“러시아가 그렇게 야만적인 국가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총리께서는 삼권분립을 존중해 주십시오.”
고지마는 법관의 양심에 따라, 대심원 판사 전원 의견일치로 쓰다 산조에게 모살미수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일본은 러시아가 어떤 보복을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고지마의 예상대로, 러시아는 범인에게 사형이 아니라 무기징역을 선고했다는 이유로 군함을 동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러시아가 이번 사건을 그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4주 뒤인 5월 27일. 주일 러시아 공사 세비치는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여, 러시아 제국의 통첩문을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