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65
– 165화에 계속 –
165화 노호(老虎)
복제 개정 이후, 이선은 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운현궁으로 갔다.
갑신경장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대원군은 명예직인 중추원 의장을 맡다가, 조대비의 승하 이후 사임하고 은거했다. 조대비의 승하와 대원군의 은퇴는 한 시대의 종식을 상징했다.
그간 이선은 정기적으로 운현궁에 가서 문안을 올렸고, 대원군은 이런저런 조언은 해 주어도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비판하겠지.’
이선은 충돌의 예감이 들었다.
“할아버님. 소손이옵니다.”
“음. 들어오너라.”
“기체후일향만강 하셨는지요.”
이선은 대원군에게 절하며 정중히 예를 표했다. 대원군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정치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이선의 핼쑥한 안색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게냐?”
“아, 잘 먹고 있습니다. 걱정 마시옵소서.”
이선은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오고, 안색도 핼쑥했다.
맡고 있는 업무가 워낙 많은 데다, 이선 자신이 만기친람(萬機親覽)으로 살피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일했다. 그나마 20대 중반이라는 한창나이기에 체력이 버틸 수 있었다.
“내 듣기로 가배인지 뭔지 하는 양탕국을 즐겨 마신다던데. 그걸 마시면 잠이 안 온다지?”
이선은 카페인 성분이 많은 커피와 차를 늘 달고 살았다.
“잠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요. 성상께서도 즐겨 드십니다.”
임금도 이선 못지않게 커피를 좋아했다. 어색한 부자(父子) 사이에 그나마 공유하는 게 있다면, 함께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쯧, 부자가 밤마다 잠을 제대로 못 잔다더니 똑같군. 늙은이가 잠이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젊은이가 그래서야 쓰나. 건강 다 망치겠구나.”
대원군이 혀를 찼다. 이렇게만 보면, 아들과 손자를 걱정하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왕족으로서 좀 정상적인 삶을 살아 보거라. 네 나이가 이제 스물다섯이다. 대체 혼례는 언제 치를 게냐? 대를 이을 자식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너도 가정이 있으면 지금보다 나을 터.”
“말씀은 감사하오나, 국가의 일이 시급하니 다른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선은 늘 그렇듯이 국무를 명분으로 댔다. 누구도 비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선이 국무에 매진 중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국가의 일이 시급한 건 나도 이해하고, 네가 국무에 매진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렇게 조급한 이유가 무엇이냐? 너는 이미 많은 걸 이루었지 않았느냐?”
“아직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고 험하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시국 비판으로 넘어갔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단발과 양복이 시급한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도 부국강병을 위한 길이냐?”
“위생과 편리함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조선의 전통 의복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 나도 관리와 양반들이 넓은 소매로 거들먹거리는 걸 매우 혐오한다. 그래서 집정기에 갓과 소매의 길이를 확 줄여 버렸지. 하지만 무관과 순검이 실용적 이유로 양복을 입는 건 이해한다만, 문관까지 강요할 이유가 있느냐?”
“저는 관리만이 아니라 만백성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싶습니다만, 때가 무르익지 않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마침내 대원군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 김병시 이하 조정을 지지하던 대신들까지 모두 물러난 것 아니냐! 세간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조정을 서양 오랑캐의 무리라고 부른다! 오랑캐의 조정에 출사하지 않겠다는 자들이 허다하단 말이다!”
민간 차원까지 단발과 양복 착용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모든 관리에게 일괄적으로 강요되자 사대부들은 격노했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항복한 조정으로 출사하지 않은 산림에 빗대, ‘오랑캐의 조정을 거부하고 중화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라는 사대부들이 늘어났다. 관직은 물론이요, 중추원과 지방 향회에서도 사임하는 자가 늘어났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는 것이옵니다.”
“뭣이?”
이선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저는 그들이 조정 밖에서 뭐라고 비난하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만, 국정에 관여하는 직은 더 이상 맡길 생각이 없습니다.”
이선과 개화당이 모든 관료에 대한 단발과 양복을 강요한 건, 물론 위생과 편의를 내세웠지만, 결국 보수파들을 조정에서 알아서 물러나게 하기 위한 시험대였다. 예상대로 단발에 반발한 보수파들은 줄줄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경장 7년, 이제 더 이상의 형식적인 ‘연립정부’는 필요 없었다.
“이번에 물러난 자들이 나를 지지하는 자들임을 알고 있겠지?”
이번에 조정에서 물러난 이들은 대부분 대원군계 보수파들이었다. 조정의 개화 정책을 지지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거부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을 저버려 최익현의 무리와 힘을 합치게 할 생각이냐?”
대원군은 최익현을 혐오했다. 1873년 최익현이 대원군을 실각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악연도 있지만, 본래 대원군은 보수적 유림을 공리공담이나 일삼는 자들이라 경멸했다.
“저들이 그러지도 않을뿐더러, 소손은 할아버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보수파들이 개화의 비판세력으로 이탈하지 않은 건, 대원군이 막후에서 계속 영향력을 발휘한 덕이었다.
“내가 왜? 이 늙은이가 영원히 저들을 움직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할아버님. 저와 할아버님, 개화파와 보수파는 비록 생각은 다르지만, 부국강병과 종묘사직의 보존이라는 목표는 같습니다.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는 건 수단에 불과합니다. 다만 가장 빠른 길이지요.”
이선은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금년, 인아거일로 아라사를 이용해 일본을 제압하여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오나 동양의 패자가 되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 자체를 꺾을 순 없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청국과 충돌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최대한 빨리 힘을 비축해 두어야 합니다.”
“대체 그때가 언제라고 생각하기에 이리 조급한 것이냐?”
“일본의 군비 증원 10개년이 종료되는 갑오년(1894)으로 예상합니다.”
이선이 1894년으로 지목한 이유는, 실제 청일전쟁이 그 해가 일어난 점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가 틀어진 시점에서 그대로 전개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일본이 1894년에 전쟁을 일으킨 건 이유가 있었다. 1884년 이후 10년 계획으로 진행된 육군 증원과, 1889년 이후 5년 계획으로 진행된 해군의 건함 정책이 1차로 완료되는 해가 1894년이었다. 1894년, 일본의 자신감은 충만했다.
김옥균 암살과 동학 농민 전쟁, 청군의 개입은 그들이 기다리던 천우신조의 명분이었다.
‘만약 명분이 제공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청과 일전을 벌였을 것이다.’
역사가 바뀌어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이선은 일본이 전쟁을 획책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팽창을 원하며, 식민지가 필요하다. 오쓰 사건으로 변화가 있었다지만 근본적으로 바뀌진 않았다. 단지 조슈와 육군에서 사쓰마와 해군으로 주류 파벌이 교체된 것뿐이다. 조선 침략이 좌절된다면, 대만과 남양을 노릴 것이다. 사쓰마와 해군이 원하는 바도 그거니까.’
이선이 차분하게 정세를 설명하고 예측하자, 대원군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이선의 예측이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아니, 놀라울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고 천진 조약을 맺어 중립을 확보한 것도, 러시아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을 이용해 일본을 제압한 것도 이선이었다.
대원군은 이번에도 이선이 틀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갑오년이면 3년도 안 남았군. 만약 청일 간에 개전이 이뤄진다면, 가운데 낀 조선에 미칠 영향도 적지 않을 터. 중립을 지킬 수 있겠느냐?”
이선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이이제이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청은 명목상 종주국이니, 조선에게 함께 싸울 것을 강권하겠지요. 애초에 이홍장은 조선이 일본을 막는 울타리가 되리라 믿고, 조선의 개항과 개혁을 지지한 것이기도 합니다.”
“청일 간에 전쟁이 있으면 청국이 이길 테지. 그럼 청국을 도와 일본을 제압한다면, 조선에도 이익이 되지 않겠는가?”
“아니, 저는 일본이 이길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이선의 예측에 대원군은 놀라워했다.
“청국의 영토와 인구는 일본의 열 배가 넘지 않는가?”
“비록 일본의 덩치가 청국보다 작다고는 하나, 전면적인 개혁을 한 나라와 개혁과 반동 사이에서 사분오열된 나라가 비견될 수 없습니다. 일본은 국가적인 총동원이 가능하지만, 청국은 일부의 전력만 동원해서 대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하물며 일본은 해군이 막강한 섬나라인데, 현재 조선은 해군이 없습니다. 어찌 일본과 적대하겠습니까? 청국의 편에 서는 건 극력 회피해야 합니다. 조선을 전쟁터로 내모는 꼴이 될 것입니다.”
이선은 이미 자신의 정세 분석과 예측을 조정의 핵심 인사들에게 공유한 바 있었다. 그들 모두 이선의 분석과 예측을 신뢰했다. 그렇기에 각종 개혁은 흔들림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 모름지기 평화란 강력한 군대에 의해 유지되는 법이다. 군비를 더욱 증대해야겠어.”
“역시 현명하십니다. 그렇기에 징병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징병제가 그렇게 효율적인가? 나도 병인년과 신미년에 서양의 침략을 막을 때, 전국적으로 민간의 포수들을 동원한 게 효과적이긴 했다만.”
“국토방위에 이보다 효율적일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제 막 징병 1년 차이니, 징집률이 낮았습니다. 내년부터는 징집병의 수를 훨씬 늘릴 생각입니다.”
징병 첫해, 전국적으로 징집된 병력은 1만여 명에 불과했다. 1892년부터는 그 수를 대폭 늘릴 예정이었다.
대원군은 마침내 이선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그는 이선과 개화당이 권력을 독점할 목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이는 것으로 의심했지만, 국가와 왕실에 대한 이선의 충성심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좋다. 나는 임오년 이래 늘 너를 믿어왔다. 지난 10년간, 조선은 정말로 강산이 바뀌었다. 여기에는 네 공로가 크다.”
“할아버님께서 지지해 주신 덕입니다.”
“또한, 주상이 별말 없이 따라준 덕이기도 하다.”
“과연 성은이옵니다.”
“주상은 이 나라의 군주다. 그 하나만으로, 한순간에 정세를 바꿀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내가 조정과 군부를 한손에 장악하고도 계유년(1873)에 실각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바로 그 명분론 때문에, 이선과 개화당도 임금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실질적인 권한은 없어도, 외관상으로 보기에 이선과 개화당은 임금을 지극히 존숭했다.
“물론 작금은 정세가 크게 다르다. 외세라는 변수가 생겼지. 네게는 아라사와 서양 각국의 지지가 있으니, 주상이 함부로 나설 수가 없다. 그러나 정세의 변화가 있다면 어찌 될지 모른다.”
대원군은 냉소하며 경고했다.
“내 아드님이지만, 주상은 결코 권력을 쉽게 놓을 분이 아니다. 인내심 하나만큼은 탁월하지. 분명 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계유년처럼 정세가 무르익길 말이지.”
“…… 명심하겠습니다.”
“뭐, 가장 좋은 건 부자간에 불화가 없는 거지. 왕실에 불화가 생기면 국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주상도 너와 개화를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다행이다.”
임금의 속내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려우나, 지난 10년간 개혁에 발목을 잡은 적은 없었다.
“아무튼, 주상과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특히 측근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마라. 주상의 상황에서 가장 믿을 만한 측근은…….”
대원군에게 외척은 트라우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중전 마마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될 듯합니다. 그분은 어질고 현명하시니,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중전 김씨는 대원군이 고심 끝에 앉힌 사람이니만큼, 일절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내명부의 수장 역할에만 충실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경계를 늦추지 마라. 나의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조정에서 물러난 늙은이들 걱정은 하지 마라. 사대부의 여론도 괘념치 마라. 내가 손을 좀 써보도록 하마.”
대원군은 여전히 여론과 막후공작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렇기에 이선은 대원군을 놓칠 수가 없었다.
“황공하옵니다. 늘 할아버님께 신세를 집니다.”
“뭐, 손자 사랑은 할아비가 하는 게지.”
대원군은 씩 웃었다. 한때 치열하게 아들과 권력투쟁을 한 게 머나먼 옛일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비우니, 이토록 편한 것을.’
대원군의 나이 어느덧 일흔둘, 당시로는 흔치 않은 장수(長壽)였다. 늙어도 여전한 활기와 위압감 때문에 세간에서 노호(老虎)라 불리는 대원군이었다.
‘저 녀석의 패기는 참으로 내 젊을 적을 보는 듯하다. 아니, 나보다 훨씬 낫지. 내 뜻을 이을 후계자가 있다는 게 이토록 든든하구나.’
늙은 호랑이는 이제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