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7
– 17화에 계속 –
17화 강태공(姜太公)
“호오…….”
조선 밀사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베베르는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선과 베베르는 주변 사람을 모두 물리고, 단둘이서 한참 동안 밀담을 나누었다. 밀담이 끝나자, 베베르가 결론을 내렸다.
“귀하의 제안은 매우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다만 성사가 되려면, 본국의 답변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조선과 러시아, 이웃 나라 간에 우호가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청한 것이니 부디 귀국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길 바라겠습니다.”
“예, 본국에 상신해서 훈령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영사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이선과 베베르는 악수를 하였다.
“귀하의 영어 실력이 훌륭하십니다. 조선은 서양과 교류가 없는 걸로 아는데, 영어를 배울 방법이 있는지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어떻게 배울 방법이 있어서 익혔습니다.”
“북양 대신의 소개장을 보면, 조선의 고귀한 분이라고 하시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조선의 귀족 정도로 해 두지요. 아마 유럽으로 치면 ‘Prince’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Prince에는 왕자란 의미 외에도 번역하기에 따라 군주, 제후, 공작(公爵)급 고위 귀족이란 의미도 있었다. 베베르는 당연히 후자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역시 고귀하신 분은 다르군요.”
이선은 어리지만 귀티가 나는 데다, 동양 귀족 특유의 예의범절뿐만 아니라 서양에 대해서도 높은 식견을 지니고 있어 베베르는 내심 놀라던 차였다.
“저도 북양 대신께 듣기로 영사께서도 한문과 중국어에 능통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대학에서 동양학과를 다녔었지요. 가혹할 정도로 한문과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나도 외국어라면 꽤 고생했지.’
이선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차후에 조선어까지 배워볼 생각은 없으신지요? 이미 영국 외교관 중에서 조선어를 익히는 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선이 언급한 건 일본 주재 영국 서기관 어니스트 사토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토는 개화파 승려 이동인을 통해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다.
‘영국 놈들이 벌써 조선을 상대로 공작을 추진하고 있구나. 일본과 중국에 이어 조선까지 러시아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 주려고? 절대 선수를 뺏겨선 안 된다.’
영국에 강한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는 러시아 외교관에게, 이선의 말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들렸다.
“언어 능력이라면 저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의 예상대로, 베베르는 바로 반응을 보였다.
“그럼 제가 도와드리지요. 앞으로 저는 외교 언어인 프랑스어를 배워 보고 싶습니다.”
이 시대 외교 공용어는 프랑스어였다. 향후 서양인들과 접촉하려면 영어 못지않게 프랑스어도 잘해야 했다. 이선은 프랑스어를 읽고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회화는 무리였다.
“그런 목적이시라면 저희 영사관에서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러시아 엘리트들은 프랑스인들 못지않게 프랑스어를 잘하니까요.”
서유럽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한 러시아는 프랑스어를 러시아어보다 더 쳐줄 정도였다. 귀족이나 고위 관료 같은 상류층은 프랑스어 실력을 교양의 척도로 쳐줬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종종 영사관으로 찾아뵙지요.”
“예, 언제든지 환영하겠습니다.”
베베르는 이선을 직접 영사관 밖까지 안내하며, 아주 정중하고 호의적으로 대했다.
‘생각 이상으로 러시아가 우호적이군.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아직까진 베베르 개인의 우호적 태도려나. 페테르부르크는 뭐라고 답할지…….’
이선은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동시에 낚싯대를 던져 놓고, 신호가 오기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이선은 21세기에, 1890년대의 풍자화를 본 기억이 났다.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이라는 물고기를 낚으려고 낚싯대를 드려 놓고, 러시아가 그걸 지켜보는 만평이었다. 한국인 입장에선 심히 불쾌한 만평이었으나, 조선의 처지라는 게 그랬다.
‘일단 1880년까진 조선이 미지의 존재니까, 가치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대한 가치를 부풀려서 낚아 봐야지.’
이선은 열강의 낚싯대에 물리는 물고기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낚시를 하려 했다. 마치 강태공처럼 낚싯대를 강에 드리우고, 나라를 낚기 위해 때를 기다렸다.
‘오직 믿을 것이라곤 내 머릿속과 혓바닥뿐. 최대한 잘 굴려서 효과를 만들어 내자.’
청나라의 실질적인 외교부 노릇을 하는 북양 대신 이홍장의 관저가 있는 천진 영사관은, 북경 공사관 못지않게 중요한 자리였다.
이선은 러시아 영사관에 이어 영국, 프랑스, 독일 영사관을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세 나라 모두 조선과의 수교에 관심을 보이던 터라 이선을 환대했으나, 러시아 영사 베베르만큼의 적극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법도 하지. 독일은 아시아 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고. 프랑스는 천주교 전교 문제 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영국은 조선에 관심이 있을 법도 한데, 그냥 영사가 관심이 없나?’
겉으로는 매우 우호적이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나, 실질적인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는 걸 보고 이선은 이유를 생각했다. 영국이나 프랑스나 모두 러시아만큼의 적극성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선은 마지막으로 들린 독일 영사 대리 묄렌도르프를 상대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이선 그 자신보다 소개장을 써준 이홍장에게 더 신경을 썼던 것이다.
‘이제 알겠다. 저 3국은 이홍장만 움직이면 조선과 수교가 가능하다고 보는구만. 뭐 실제로도 그랬고. 그에 비하면 러시아는 현재 청나라와 전쟁설이 돌 정도니까, 이홍장에게 부탁할 처지도 못 되고. 또한 극동에서의 외교적 고립을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이니, 조선 사절의 방문이 반가울 수밖에.’
나중에 베트남 문제로 청나라와 결렬하여 독자적으로 조선과 접촉한 프랑스는 별도로 치면, 미국과 영국, 독일은 이홍장을 통해 조선과 수교했다.
그에 비하면 러시아는 독자적으로 조선에게 접촉해 수교 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귀하께서는 북양 대신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북양 대신께서 친히 소개장까지 써주신 걸 보아…….”
묄렌도르프가 안경 너머로 계산하는 시선을 보이자, 이선도 이홍장과의 친분을 강조했다.
“북양 대신과 돈독한 사이입니다. 제가 듣기로 부영사께서도 대신과 친분이 있으신 걸로 압니다만.”
“북경에 있던 시절에 통역을 맡은 적이 있지요. 그때 친분을 맺고, 작년에 천진에 부임한 이후로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지요. 대신께서는 저를 친구라고 불러 주십니다.”
실제 역사에서 조선 최초 서양인 고문이 된 묄렌도르프는, 중국에 근무하던 여느 외교관들처럼 한문과 중국어에 능통했다. 특히 이홍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덕에, 근대적 관료가 부족한 조선이 외교 및 재정 고문 초빙을 요청하자 이홍장이 묄렌도르프를 추천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전부 이홍장과의 친소 관계로 결정되잖아. 이홍장이 묄렌도르프를 조선으로 보낸 건 친밀하니까. 일본이 다케조에를 조선 공사로 보낸 것도 이홍장하고 친밀하니까. 러시아가 베베르를 조선 공사로 보낸 것도 이홍장하고 친밀하니까. 미국이 슈펠트를 조미 조약 체결 전권대사로 파견한 것도 이홍장하고 친밀하니까.’
단순히 외교 문서상으로 보던 걸, 이선은 이 시대에 와서야 인간관계가 상당하게 작용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하……. 이거 웃기네. 이래서 이홍장하고 친해져야 한다는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던 거군.’
이선은 자신이 옳은 판단을 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뒷맛은 씁쓸했다.
이홍장이 사실상 개항 초기 조선의 외교를 전담하다시피 했고, 각국 정부는 조선 조정보다 이홍장과 먼저 접촉하는 길을 택했다. 그만큼 조선은 서양에 대해 무지했고, 서양에게 조선도 미지의 나라였던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내가 그 역할을 맡아 줘야겠군. 앞으로 책임이 무겁다.’
이선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묄렌도르프. 조선 초대 해관 세무관으로서는 썩 유능했지. 재정이나 외교는 영 아니었지만…….’
“부영사께선, 혹시 기회가 된다면 조선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조선이 서양과 수교하게 된다면, 중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서양인 고문관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저는 지금은 독일 외무부 소속이라,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하지만 흥미로운 제안이란 건 인정하겠습니다.”
어차피 조선 조정의 뜻과 무관하게 이홍장은 서양인 고문관을 보낼 생각이었고, 묄렌도르프가 조선으로 가는 건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홍장의 뜻대로 움직이리라는 최초의 기대와 달리, 묄렌도르프는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일하는 나라인 조선에게 애착을 갖고 충성을 바치기 시작했다. 조선과 러시아가 손잡고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외교 정책을 짰던 것이다. 결국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소환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나와 묄렌도르프의 생각은 일치하는군. 조선을 압박하는 일본과 청나라를 동시에 견제하려면 일단은 러시아와 손잡는 길인가.’
외교라는 건, 결국 아쉬운 놈이 먼저 손을 내밀게 마련이었다. 지금 이 순간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이선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건 러시아였다.
이선은 이후에도 러시아 영사관을 몇 번 출입했다. 그때마다 베베르는 이선을 환대했고, 조선의 역사와 언어에 대해 물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조선 주재 외교관 중 가장 조선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베베르는, 이선에게도 상당한 호의를 베풀었다.
이선이 천진에서 생활하기 익숙해질 무렵, 베베르가 소식을 전해 왔다.
“공께서 러시아에 보낸 제안에 대한 답변이 왔습니다.”
베베르는 이선을 고위 귀족으로 대우하며 깍듯하게 대했다.
“오, 귀국에선 뭐라고 하던가요.”
“그러한 제안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합니다. 단, 정식 수교 전에 논의를 진전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흠, 이해하는 합니다만 양국 간에 수교가 당장 이뤄질 것 같진 않습니다. 영사께서 생각하시건대, 제 제안이 양국 관계에 있어 시급한 사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본국에서는 이 문제로 수교 이전에 조선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을 고려하는 듯합니다.”
“제 생각은 반대입니다. 오히려 양국 간에 오해를 풀고,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도 동의합니다만……. 그래서 말인데, 제가 공께 역으로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베베르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공께서 직접 러시아로 가서 설득해 봄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렇게 전문으로 보고하는 것보다, 직접 이야기를 해 보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으리라 봅니다만.”
‘러시아라……. 연해주는 고려인 때문에라도 가 볼 필요성을 느끼긴 하는데.’
“그럼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보잔 말씀이신지요?”
베베르는 고개를 젓고, 세계 지도에서 유럽을 가리켰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쪽 끝이지요. 거기선 뭘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유럽으로 가야 합니다.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가면 해결이 될 겁니다.”
베베르가 가리키는 지점,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보면서 이선은 만감이 교차했다.
‘유럽……. 분명히 지금 세계를 주도하는 건 유럽 열강이니만큼, 중국에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당장 조선의 운명이고 뭐고, 내 자신 부귀영화의 측면에서만 놓고 보면 훨씬 낫지.’
이선우는 경제사 전공은 아니었지만, 근대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있었다.
‘1880년 이후로 뭘 어떻게 하면 돈이 벌릴지 정도는 알 수 있지. 유러피언 드림을 꿈꿔 본다면, 조선 독립보다 훨씬 쉽지 않을까?’
자본주의가 한창 세계적으로 팽창하는 시대에, 그 본고장인 유럽에서 기회를 잡는다. 부르주아의 꿈이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그것도 꽤 즐거운 인생이겠지. 자본주의가 번영하는 자본의 시대, 자본가로서의 삶이라…….’
아마 ‘이선우’라면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자가 돼서 그럴 수야 있겠나. 나를 불러들인 완화군의 영혼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완화군의 기억과 육체를 공유하고 있는 이선우, 아니 이선으로선 조선에 대한 강한 의무감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가겠다. 하지만 내가 러시아에 간다면, 그건 향후 조선과 동포들의 미래를 위해서 가야 할 일이지.’
“영사의 제안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나, 당장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좀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언제든 결단만 내려 주신다면, 러시아는 공을 새로운 이웃 나라, 조선의 귀한 손님으로서 환영할 것입니다.”
이선은 베베르가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리라 짐작했다. 러시아 본국에서 ‘조선 사신’을 데려오라고 훈령을 내렸으리라.
‘친러파로 만들어 볼 생각인 건가? 가장 적극적이라서 좋긴 한데, 순순히 그쪽 뜻에 넘어갈 생각은 없다네.’
그리고 갈 땐 가더라도, 청나라에서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