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70
– 170화에 계속 –
170화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
조청 간의 협약이 체결되자, 이선은 후속 처리에 들어갔다.
“청국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한 것은, 저들의 논리가 옳아서라기보다 저들의 힘이 아직 우리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힘을 축적해야 할 시기이지, 발산할 때가 아닙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였다. 진위대가 3류도 못 되는 길림 팔기군을 이겼다고 좋아할 시기가 아니었다. 힘을 키워야 했다.
국경 분쟁의 책임자가 한성으로 소환되었다. 함경북도 관찰사 이중하, 5연대장 권동수 부령, 종성 진위대장 이범윤 참령이 원수부에 출두했다.
이선은 엄한 어조로 말했다.
“비록 간도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나, 하마터면 청국과 전면전까지 이어질 뻔했습니다. 중앙의 명령 없이 멋대로 병력을 움직인 건 군율을 어긴 죄요. 이런 경우 군법에서 어떻게 처벌합니까?”
“…… 사형입니다.”
이범윤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청국 병사들이 우리 동포들을 학대하는 걸 지켜만 볼 수 없었습니다. 모든 책임은 명령 구조를 깨트린 소관에게 있습니다. 두 분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소관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소관도 결국 5연대 병력을 이끌고 함께 국경을 넘었으니, 이 참령만 처벌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상관인 소관이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아닙니다. 애초에 관찰사로서 간도 백성들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두 장교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공이 있으니,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권동수와 이중하가 잇달아 자신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선의 곁에 있던 내부협판 이범진(李範晉)이 머리를 조아리며 청했다.
“내부협판으로서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저의 죄가 가장 큽니다. 대죄(待罪)를 청하니 다른 이들은 용서해주십시오.”
이범진은 대원군의 측근으로 경찰력을 이끌었던 이경하의 아들이었고, 이범윤과는 사촌이었다.
이범진은 하급 관리 시절 청국 상인들의 횡포를 저지하려다, 적반하장으로 청국 군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 이선이 개입하여 책임자를 처벌하고 사과를 받았으나, 이범진이 이후 강경한 반청 자주파가 된 건 당연한 순서였다.
사촌인 이범윤도 반청 자주 성향을 공유했다. 이범진은 책임감을 느꼈다.
“책임을 계속 위로 올리면, 군무독판인 내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사직하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좌중이 모두 놀랐다.
“안 됩니다! 완화군 대감께서 물러나시면 어떡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를 처벌해 주십시오.”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백성들이 귀관을 영웅으로 여기는데, 여론을 고려하면 과한 처벌은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지요. 직위 해제하고 대기발령 하겠습니다. 당분간 한양에서 쉬시오.”
간도 전투의 승리를 언론이 떠들썩하게 보도한 덕에, 이범윤 등은 ‘간도 백성을 구하고 조선의 무위를 떨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강하게 처벌하면 청나라에 굴복하는 인상을 줄 터였다.
이선은 관대한 처벌을 결정했다. 대신 자신이 책임을 지기로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감께서 물러나려 하십니까?”
“내 뜻은 굳건하니 그렇게 합시다. 나는 성상께 사직 상소를 올릴 생각입니다.”
이선은 관대한 처벌로 마무리 짓고, 바로 사직 상소를 냈다.
“책임은 군무독판이자 원수부 군무국장으로서 군부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신에게 있사오니, 비록 죄는 있으나 공도 큰 이범윤 등은 관대히 처우하시고 신이 물러나게 해 주십시오.”
임금은 사직 상소를 반려했지만, 이선은 끝내 사직을 관철했다.
사직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와 백성을 가리지 않고 여론이 이선을 칭송했다.
“역시 완화군 대감은 그릇이 달라. 공은 아랫사람에게 돌리고 책임은 스스로 지다니.”
“애초에 군 대감이 아니었더라면 조선군이 이렇게 강해질 수나 있었겠나? 아라사와 법국, 덕국이 조선을 도와 청국을 압박했겠나? 그런데도 공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시다니…….”
“왕족의 품격은 다르네. 역시 대단한 분이야.”
이선이 사직하자 청국도 만족해했다. ‘책임자 처벌’은 충분히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그날 밤, 김옥균과 개화당 관료들이 이선의 집을 찾았다.
“정녕 이대로 물러나실 생각입니까?”
“책임을 지기로 했으니 당연히 물러나야지요.”
“그 무슨 말씀입니까. 대감께서 없으면 조정은 어찌하라고…….”
“나 한 사람 물러난다고 조정 업무가 마비되면, 그건 정상적인 정부가 아닐 터인데.”
이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군제 개혁과 징병령이 정착되어 군무독판으로서 해야 할 일은 대략 마무리 지었으니, 후임자에게 물려줘도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김옥균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감께서는 갑신년 이래 개화를 대표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조정에 대감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이 일제히 이선의 사직을 만류했다.
“직책을 맡지 않는다고 해서, 국정을 도외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분간 나는 직함 없이 자유롭게 여러 분야를 살펴볼까 합니다. 나름대로 할 일이 많다는 뜻이지요.”
이선은 결코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단지 표면적인 직위에서만 물러날 뿐이었다.
개화당 관료들은 비로소 이선의 뜻을 이해했다.
“대감의 깊은 뜻을 알겠습니다.”
“군 대감께서 조정에 없으신 만큼, 저희가 더욱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다들 고맙습니다. 조정을 잘 부탁하지요.”
간도 분쟁은 조선에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청나라가 작정하고 조선을 쳐들어오려 한다면, 현시점에선 외교적 방법밖에 없었다.
외세의 침입 우려는 여론의 불만을 잠재우고, 동원 체제를 정당화시켰다. 근대화 개혁과 집행은 더욱 강경하게 실시되었다.
군비를 더 강화해야 했다. 이선의 후임으로 군무독판에 취임한 박영효는 1893년도 징병을 더욱 엄격하게 시행하기로 했고, 상비군 규모를 늘렸다. 1894년까지 7개 여단 14개 연대를 목표로 했다. 한성부에 2개 친위 연대, 13도에 각 1개 연대씩 징병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해군 건함은 워낙 돈이 많이 들어 당장 강화할 수 없었으나, 상륙에 대비해서 요충지마다 해안포를 설치했다.
꼭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해안 봉쇄에 대비해서 철도 부설에도 속도를 올렸다. 기존의 조선은 대부분의 물류를 수로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앞으로는 철도로 전국을 이을 생각이었다. 1차 사업으로 선정된 경부선과 경의선의 부설은 1894년까지 완료될 예정이었다.
여러 목표에서 볼 수 있듯이, 단기적으로 모두 1894년에 맞춰져 있었다.
개국기원 501년, 1892년 9월 7일.
이날은 조선의 개국기원절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새로 세운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 해는 1392년 조선 왕조 건국으로부터 특별히 5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본래 국가기념일은 모두 양력으로 환산하여 정하려 했으나, 개국기원절만은 음력 7월 17일에 지내기로 했다. 연도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양력 계산도 어렵고, 14세기에 쓰이던 율리우스력과 현재 쓰이는 그레고리력 간의 차이도 고려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9월 8일은 임금의 탄신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이었으므로, 임금의 41번째 탄일을 겸하여 성대한 진연이 준비되었다.
임금과 왕족, 신료들은 종묘에 의례를 올리고,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하례하였다. 이날만큼은 임금 이하 신료들의 복장은 모두 옛 조복 차림이었다.
“생각건대, 우리 태조는 하늘과 사람의 의사에 순응하여 왕업을 이룩하고 선대 임금들에게 물려주었으며, 열성(列聖)은 전대의 업적을 두터이 하여 위업을 이어받고, 그것을 후세에 굳건히 지켜낸 결과 업적을 거듭 빛내고 하늘의 의사를 잘 받들었다…….”
임금의 조문 낭독이 끝나자, 왕족을 대표해 이재면과 신료를 대표해 김홍집이 앞으로 나섰다.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만세 선창에 일제히 신료들이 화답했다.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만세’와 ‘대군주 폐하’는 갑신경장 이후 비공식적으로 써왔으나, 공식 석상에서 문무 신료가 일제히 외치기는 처음이었다.
여전히 청나라에 보내는 문서에는 제후를 자처했으나, 일본과 서양 각국에는 독자적인 개국기원 연호를 쓰고 ‘짐(朕)’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간도 분쟁 이후로 조선 전반에 청에 대한 적개심이 깔리면서, 청에 대해 자주독립을 선포하고 칭제건원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는 너무 급진적인 조처로 반려되었으나, 건국 500주년 개국기원절을 기점으로 실질적으로는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에 들어간 것이다.
경복궁 인정전의 하례는 조선 고관들만 참석했으므로, 문제가 발생할 건 없었다. 문제는 진연에서 있었다.
진연은 대군주의 친림 하에 각국 공사관의 외교관과 외국 고문관, 교사 등을 초대해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에 가장 오래 근무 중인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필두로, 각국 공사가 임금에게 예를 표했다.
“국왕 폐하, 러시아 황제 폐하께옵서 국서와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황제 폐하를 대리하여 조선국의 건국 500년과 국왕 폐하의 탄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귀국 황제 폐하의 은의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을 전해 주시오.”
부임 순서대로 예를 표하다가,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순서가 왔다.
“대군주 폐하, 삼가 일본국 천황 폐하의 명을 받들어, 조선국의 건국 500년과 대군주 폐하의 탄신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순간 청국 상무위원 마건상의 눈이 돌아갔다. 그동안 각국 외교관은 영어나 프랑스어로 축하했기에, ‘폐하(Your Majesty)’라는 표현은 통역하기 나름이었다.
하지만 오토리 공사는 일본어로 명백히 ‘헤이카(폐하, 陛下)’라고 존칭을 올렸다. 이는 통역할 필요도 없었다.
마건상은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참았다. 하지만 연회가 시작되자 바로 오토리를 찾아가 따졌다.
“일본 공사, 이 무슨 참람한 짓이오? 조선 국왕은 대청국 황제 폐하의 제후요. 제후에게 어찌 황제에게 쓰이는 폐하라는 존칭을 올린단 말이오?”
마건상의 지적에, 조선 관료들이 불쾌감을 느꼈다. 조선 관료들을 대신해 오토리가 답했다.
“조선은 조일 수호 조규 이래 일본과 동등한 자주 국가임을 알렸으니, 마땅히 조선에서 칭하는 바와 같이 대군주 폐하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조선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 ‘대군주’로 칭했다. 일본은 천황을 자처하는데, 조선은 국왕을 자처하면 격이 너무 떨어져 보임을 참작해서였다.
일본도 비공식적으로 ‘대군주 폐하’라는 존칭을 써주었다. 그런데 공식석상에서 일본 측이, 청국 외교관이 보는 앞에서 대군주 폐하라고 지칭하는 건 처음이었다.
“일본은 조선이 황제를 참칭하라 권하는 것이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이는 당연한 조선의 권리입니다.”
오토리의 답에, 조선 관료들은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수긍하는 의사였다. 마건상은 불쾌감을 표했다.
“보아하니,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여 중국에 반역할 뜻을 가졌나 보오? 그래서 월경하여 천병에 맞선 것인가?”
김옥균이 정색하며 말했다.
“상무위원, 오늘은 조선의 개국기원절이자, 성상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어찌하여 좋은 날을 망치려 하십니까?”
“조선에서 개국기원을 자처하는 것도 분수에 어긋나는 일이오! 조선은 바로 그 개국 이래 중국의 제후란 말이오. 애초에 제후의 신분으로 감히 묘호를 쓰는 것도 참담한 일이었소. 다만 조선의 내정은 자주이니, 그동안 무엇을 해도 중국은 관대히 넘겨주었소. 그런데 이제는 서양과 일본을 끌어들여 노골적으로 중국을 능멸하니, 황상의 신하가 되어 어찌 참을 수가 있겠소!”
각국 공사들이 만류했지만, 마건상은 강경했다.
“아라사, 덕국, 법국이 조선을 부추겨서 중국에 맞서게 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마건상과 청국 외교관들은 연회석에서 나가 버렸다.
개국기원절 진연에서 청국 외교관이 불쾌감을 표명하고 나갔다는 소식은 바로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 신임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는 전문을 받아보며 씩 웃었다.
“오토리 공사가 말 한마디로 청국을 격동시켰군.”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가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입니다. 뭐, 실속이 사라질수록 체면에 더 집착하는 법이지요.”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중장이 빈정거리듯이 답했다.
“청국 정토(征討) 계획은 어찌 되고 있습니까?”
“참모본부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토 총리도 몰라야 합니다. 그 소심한 원로 어르신은 청국에 맞선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하거든.”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표한 대로 8개 사단이 완비되면…….”
“서양이 일본의 불평등조약 개정을 거부하는 건, 아직 일본이 약하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일본의 국가적 사명인 불평등조약 개정의 사명을 갖고 외무대신에 취임한 무쓰는, 참모차장 가와카미 와 함께 전혀 색다른 해결책을 모색했다.
“청국을 꺾고 동양의 패자가 되기 전에는, 서양은 계속 일본을 우습게 여길 터. 러시아로 인해 북방으로 가는 길이 막혔으니, 남쪽에서 활로를 찾아봐야지요.”
무쓰와 가와카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