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77
– 177화에 계속 –
177화 피랍(被拉)
1894년 7월. 북양함대 기함 전함 정원과 진원이 인천에 입항했다.
7000톤급 배수량에 두꺼운 장갑, 거포를 보유한 동양 최대의 전함이었다. 크기가 워낙 큰 탓에 항구 접안 시설이 있는 제물포항에도 접안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재작년에 정원과 진원이 인천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한 적이 있어서 조선 측은 북양함대의 위용에 예전처럼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청국 측이 인천 일대에 배치된 해안포를 보고 방어 태세가 엄중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선이 겁을 먹지는 않았군.”
이홍장이 망원경으로 해안포 진지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하문(厦門)의 호리산 포대와 비슷하군요. 덕국제 크루프 해안포 같은데.”
정여창이 포대 형태를 살펴보며 감탄했다. 중국 남부의 개항장 하문에 배치된, 동양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호리산 해안포는 독일의 크루프 사에서 수입한 대포였다. 인천에 배치된 해안포도 같은 회사 수입품이었다.
“돈 좀 썼겠군. 언제나 이익을 보는 건 언제나 서양이지. 전쟁이 일어나면 서양만 이익일 것이네.”
이홍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에 하나라도, 북양함대를 조선의 해안포대 따위를 공격하는 데 쓰고 싶지 않았다.
이홍장과 북양함대 지휘부는 입항 직전에 배에서 내린 뒤 작은 보트로 갈아타 제물포항으로 들어왔다.
항구에서 이선과 김옥균, 홍영식, 미국인 외교고문 르장드르,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Brown), 해군고문 콜웰(Callwell) 소령 등이 이홍장을 기다렸다.
“어서 오십시오, 중당. 조선은 처음이시지요? 원로(遠路)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원로라고 할 게 뭐 있겠소? 천진에서 조선이 이렇게 가까운 것을. 군함을 타고 오면 금방이외다.”
이홍장의 말에는 조선이 그만큼 청국과 가까우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오래간만에 뵙게 되니 중당께서 많이 연로하였습니다. 나랏일이 어려우니 그만큼 고민이 많으시겠지요.”
이선은 이홍장의 말뜻을 이해하면서도 이홍장과 청국의 ‘늙음’을 은유적으로 말했다.
“내 나이가 어느덧 일흔둘이오. 은퇴하여 낙향할 나이지만, 완화군 말씀대로 나랏일 사정이 어려우니 쉽게 쉴 수 있어야지. 그러니 이 늙은 몸을 이끌고 직접 조선까지 온 게 아니겠소?”
“고생이십니다. 최고의 예우로 환대해 드리지요. 자,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조선 관료들은 청국 관료들을 인천감리서에 있는 연회장으로 초대했다. 인천에 주재하는 서양인들이 많은 만큼, 서양식 건물과 실내장식으로 완비된 공간이었다.
양복을 입고 단발을 한 조선 관료들과 호복을 입고 변발을 한 청국 관료들은 외관상으로도 확연히 대비되었다.
“이 늙은이가 조선은 처음인데, 여기가 동양인지 서양인지 알 수가 없군. 꼭 상해 조계지를 보는 거 같구려.”
조선이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는 걸 에둘러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선이 웃으면서 답했다.
“상해 조계지는 서양 열강이 건설한 공간입니다만, 인천은 조선이 자주적으로 변모했다는 차이가 있지요.”
이홍장은 외교적 언사도 배제하고 바로 들어갔다.
“자주적? 좋소! 말이 나온 김에 바로 말하리다. 아무리 조선의 내정이 자주라지만,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소.”
“무엇을 말입니까?”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 수교하라고 권한 것도 대청이었고, 임오년에 조선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대원군의 집정을 승인한 것도 대청이었으며, 조선의 중립을 보장하는 조약을 맺을 때도 승인한 당사자는 대청이었소.”
엄밀히 말하면 ‘청’이 아니라 ‘이홍장’이 권하고 승인한 일이었다. 이홍장은 그래서 더욱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데 어찌하여 조선은 상국을 능멸하고, 서양과 일본을 내세워 맞서려 한단 말이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조선은 서양과 일본을 내세워 청국에 맞서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근래 북경에서 조선을 정벌하란 말이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조선도 살기 위해 자구책을 강구해야지요.”
이선이 정곡을 찌르자 이홍장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건 사실이오. 그만큼 북경에서는 조선의 행태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소. 하지만 이 사람이 나서서 정벌이 아니라 대화로 해결하자고 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고언을 무시하면 안 될 것이오.”
“말씀하시지요.”
“북경이, 아니 내가 우려하는 건, 조선이 서양이나 일본과 연합해 독립을 선포하고, 대청에 맞서려 하는 것이오. 근래 일본의 군비 확장이 우려스러운 수준이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대청과 조선의 우의는 끈끈해야 하오.”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일본은 청국과 언제든 일전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청국이 걱정해야 할 건, 조선이 아니라 일본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조선을 경계하십니까?”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제후국이었는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려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지. 특히 독립 운운하는 배후에 아라사와 일본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선은 다독이듯이 말했다.
“중당께서 국가의 안위와 동양 정세를 살피느라 노고가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경의 황족이나 청류파 대신들은 전혀 그 공로를 몰라주고, 오히려 질시와 비난만 퍼붓지요.”
말인즉슨 맞는 말이라, 이홍장은 반박하지 않았다.
“흠흠.”
“저나 중당이나 모두 현실주의자이기에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대외 갈등을 막고, 가급적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청국과 조선, 중당과 저의 이해관계는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북경의 부당한 요구 따위는 적당히 무마해 주십시오. 저는 중당과 대립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하오. 아라사나 일본과 내통하지 마시오. 허무맹랑한 독립 이야기는 걷어치우고, 계속 실질적인 자주를 누리시오. 하지만 독립 운운은 결코 용인할 수 없소.”
이선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조선은 일본이나 아라사의 꼭두각시가 아니며, 독자적으로 정책을 추진합니다. 청국이 조선을 어린아이 취급하니, 누가 그걸 좋아하겠습니까. 청국이 조선을 존중해 준다면 우리도 응당 존숭을 다 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
“조선의 내정은 자주요. 대체 제후국을 이 이상 어떻게 존중해 달라는 거요?”
이선은 승부수를 던졌다.
“대등한 관계는 아닐지라도, 상호 존중하는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종주국과 제후국, 사대 조공이라는 낡은 허상이 아니라, 만국공법 아래의 동맹이라는 실리를 추구했으면 합니다. 청국과 조선이 함께 동양을 노리는 외세에 맞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무슨 소리요. 오랫동안 내려온 중화 질서를 무너트리자고? 내가 그걸 받아들일 거로 생각하는 거요? 절대 그럴 수는 없소.”
이선은 이홍장이 ‘현실주의자’이기에 허상은 던져버리고 실속을 얻는 대화가 가능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서로 간에 평행선만은 확인했을 뿐이었다.
대전제가 통하지 않으니 실무 차원의 사소한 합의도 이뤄질 리가 없었다. 결국, 회담은 아무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종결되고야 말았다.
이홍장과 북양함대 지휘부는 돌아가기로 했다. 떠나기 전, 이선과 조선 관료들을 기함 정원에 초대하여 군함을 살펴보게 하고, 환송연을 벌여 환대에 답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저들이 군함을 태운 채로 그대로 떠난다면, 정원을 막을 수 있는 조선의 해군은 없습니다.”
김옥균의 우려에 이선은 고민했다.
“함상에 초대해 환송연을 하는 건, 국제적으로 흔한 일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가시지요.”
“그렇습니다. 조선 영해에서 조선 고관의 납치를 계획한다면, 그건 전쟁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이홍장이 그렇게까지 과격하진 않을 겁니다.”
해군고문 콜웰과 외교고문 르장드르가 승선을 권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지요. 멀리 갈 것 없이, 러시아 황태자가 일본 천황을 군함에 초대해 환송연을 베푼 바 있지요. 일본에서 납치를 우려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니까요.”
이선은 북양함대 기함 정원을 살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이선은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정원을 시찰할 조선 해군 장교단과 정예 호위대 병력 외에도, 르장드르와 브라운, 콜웰을 함께 정원에 동반하기로 했다. 서양 고문관이 보는 앞에서 납치를 자행한다면, 청국의 신인도는 최악이 되는 건 자명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해안의 비상경계를 높이고 해안포를 정조준하게 했다.
그리고 조선 해군의 군함을 모두 정원 근처에 집결시키게 했다. 조선 해군은 막 창설된 단계라 군함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영국에서 수입한 포함 1척과 어뢰정 5척이 전부였다. 전함에 상대가 될 리 없었지만, 상징적인 조치였다.
1894년 7월 23일.
‘실제 역사에서는 일본군이 청일전쟁을 계획하고 경복궁을 습격한 날이군. 묘한 우연의 일치인걸.’
조선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다행히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전쟁을 피하고 싶었다.
군무대신 이선, 내무대신 홍영식, 외무대신 김옥균, 서양인 고문 르장드르, 브라운, 콜웰, 조선해군 장교단, 호위대 병력 등이 보트를 타고 정원에 차례로 올라갔다.
“북양함대 기함, 정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북양수사통령 정여창이 정중한 태도로 이선 일행을 반겼다.
“정원은 동양 최대의 군함으로 7000톤의 배수량, 30센티미터가 넘는 두께의 측면 장갑, 12인치 구경 2연장 포탑 2기, 6인치 구경 포탑 2기를 장비한…….”
정여창과 북양함대 사령부는 직접 이선 일행에게 정원을 소개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게 했다. 정원의 거대한 규모 앞에 서양 고문관들도 감탄했다.
“과연, 엄청나긴 하군.”
“하지만, 군기의 상태가…….”
평시라 그런지는 몰라도, 전함에 탑승한 장교와 수병의 태도가 극히 느슨했다. 정여창과 사령부가 올 때만 벌떡 일어날 뿐, 그 외에는 거의 널브러져 있다시피 했다. 군함 곳곳에 수병들이 내건 빨래가 내걸려 있었다. 거대한 포탑 옆에 빨래가 널려있는 걸 보고, 콜웰 소령이 혀를 끌끌 찼다.
‘진짜 오합지졸인 거냐, 아니면 속이려고 하는 거냐?’
이선은 반신반의했다. 북양함대의 실상은 실제 역사에서 드러나긴 했지만, 명색이 북양대신 이홍장이 타고 있는 기함인데 너무 느슨했다.
함대 시찰이 끝나고, 장교식당에 환송연이 준비되었다. 한쪽에는 이홍장과 북양함대 사령부, 다른 한쪽에는 조선 관료들과 서양 고문들이 착석했다.
한동안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던 중 이홍장이 갑자기 정색하며 물었다.
“완화군께, 조선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묻고 싶소.”
“무엇입니까?”
“정녕 조선은, 예전과 같이 대청에 충성할 뜻이 없소?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하고, 황상께서 봉한 조선 국왕에게 충성을 다할 생각이 없느냐는 말이오.”
이선은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며 답했다.
“우리는 언제나 국가와 국왕을 위해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는?”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조선 관료들이 불쾌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이홍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황제 폐하께 그대들의 충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얻어야겠소. 우리와 함께 북경으로 갑시다.”
이홍장의 손짓에 수병들이 장교식당에 난입했다. 그리고 총을 조선 관료들에게 겨누었다.
“어허, 폭력은 쓰지 말고. 정중히 모시게.”
“이게 대체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이선과 조선 관료들이 격분하여 외쳤다.
“함께 북경으로 가서 황제 폐하를 알현합시다. 염려 마시오. 별일은 없을 터이니.”
서양 고문관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납치입니다! 조선 영해에서 조선 고관을 납치하다니, 전쟁이나 다름없는 행위요!”
“조선은 대청의 제후국이오. 황제가 신하를 보려 하는 일이 어찌 납치라 할 수가 있겠소? 여러분은 천진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풀어 들이겠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정말 유감스럽군요. 청국이 우리를 납치하려 든다는 것은 곧, 조선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려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선은 의외로 침착했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듯 냉소까지 띠고 있었다.
이선의 말에 이홍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소. 동양의 전쟁을 막고, 황상의 진노도 풀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요. 천진까지는 금방이오. 어서 갑시다.”
군함의 기관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선은 결단을 내렸다.
“아니, 죽으면 죽었지 우리를 전리품으로 데려가진 못할 겁니다.”
이선은 주위에 눈짓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