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83
– 183화에 계속 –
183화 선전포고
9월 26일 새벽.
밤늦게까지 군사 계획을 협의하다 뒤늦게 잠자리에 들었던 이선은 갑작스러운 보고에 즉각 일어나야 했다.
“압록강 하구에서 교전 발생?”
“예, 용암포에서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일본 해군과 청국 해군의 교전이 시작되었으며 전투가 시작된 이상 해안포대도 부득이하게 포격에 가담하겠다는 보고였다.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했다고? 하여튼 일본놈들, 전쟁 결정하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구먼. 외교적 뒷감당은 할 수 있으니까 일 저지른 거겠지?’
양국의 협의에 따르면, 10월 1일에 공동으로 대청 선전포고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교전을 시작한 것이다. 우발적인지 계획적인지는 몰라도 일본은 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상황이 올라오는 대로 바로 원수부에 보고하도록 하게.”
이선은 즉시 원수부에 회의를 소집했다.
9월 26일 오전, 전투 결과가 보고되었다.
“청국 순양함 광을 격침. 포함 조강 대파 후 나포. 수송선 3척 중 고승은 격침. 애인과 비경은 항복. 순양함 제원 도주. 청국 사상자 약 1000여 명, 포로 2000여 명 확보. 일본군 사상자는 없습니다.
3척의 수송선 중 고승에 탄 병사들은 전멸했고, 나머지 2척은 항복함에 따라 사상자가 압도적으로 늘어나고야 말았다.
“우아, 대승이로군!”
“일본 해군이 생각보다 대단하군요.”
“용암포 포대도 활약했다고 합니다. 조강을 대파시킨 건 우리 포대였다는군요.”
찬탄이 쏟아지는데, 원수부 군의에 정부를 대표해 참석한 총리대신 김홍집이 우려를 표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국제법 위반 아닙니까? 선전포고조차 없었는데…….”
“더 큰 문제는 수송선이 청국 국적이 아니라 영국 국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영국 국적 선원들은 모두 구조했다곤 합니다만.”
이선의 말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뭐, 뒷감당은 일본이 책임지겠지요. 이제 전쟁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선전포고는 없지만, 어제부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대비에 들어가도록 합시다.”
‘모양새는 안 좋게 됐지만,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조선 침략에 투입되었을 병사 3000명을 제압한 건 충분한 전략적 효과는 있으니…….’
일본 대본영은 이미 개전을 결의한 이상 선전포고와 무관하게 군사적 필요에 따라 선제공격을 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황이었다. 유격함대는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고, 그 결과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청국과 일본, 조선 사이에 거친 비난이 쏟아졌다.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 공격이라니! 이런 비열한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청국 군함은 명백히 조선을 공격할 목적으로 조선 영해에 진입했다. 우리 측 보고에 따르면 먼저 선제공격을 한 건 청국 군함이었다.”
“일본 측 주장이 맞다. 용암포에서 정선을 요구했으나 청국 군함이 먼저 공격적 자세를 보였다.”
“먼저 정선을 요구했으나 끝까지 요구에 응하지 않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여 부득이하게 교전에 들어갔다. 일본 해군의 자위(自衛)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수송선은 청국령인 안동을 향하고 있었지, 조선을 공격할 목적으로 가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 측 보고에 따르면 일본 군함에서 먼저 기습 공격을 가했다.”
“조선을 공격할 목적으로 대병을 수송하던 것이 아니었는가? 우리는 이미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청국이 묵살했다. 9월 20일 이후로 양국은 사실상 교전 상태에 들어갔던 것이다.”
“최후통첩이 어떻게 선전포고가 되는가? 일본의 후안무치가 뻔뻔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대청은 결코 이런 모욕을 참을 수가 없다.”
분명 선전포고 이전에 일본 해군이 청 군함을 공격한 사실은 국제법상 문제가 있었다. 특히 청의 군사와 무기를 실은 영국 국적 선박을 격침한 사실은 영국 여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청국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영국으로 일본을 제압하려고 했지만, 일본은 재빨리 영국에 피해 보상을 했다.
“순양함 간의 교전이 끝난 후에 나니와가 고승을 포격한 건 정선과 임검에 응한 다른 두 척과 달리 도주를 하려고 하였기에 부득이한 조치였습니다. 실제로 애인과 비경은 정선에 응했기에 정중한 대접을 하지 않았습니까?”
영국의 국제법 전문가들도 일본의 행위가 용인될 수 있다고 하였다. 영국 선원은 모두 구조되고 피해보상도 하겠다고 하자 영국 측의 여론은 무마되었다.
외교적 조치가 실패하자 남은 건 이제 정말 전쟁밖에 없었다.
9월 28일, 청은 주일 공사의 귀국을 명령했다. 이튿날, 총리아문은 주청 각국 공사에게 개전 책임은 일본과 조선에 있다는 문서를 보냈다. 30일에는 경친왕이 주청 일본 공사 고무라 쥬타로에게 청일 수호 조규 폐기와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같은 날, 일본도 국교단절을 선언하고 주일 각국 공사에게 교전 통고서를 전달했다.
이미 조선과 청국 사이는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으나, 조선 역시 주조선 각국 공사에게 교전 통고서를 전달했다.
1894년 10월 1일, 청, 일본, 조선은 순차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가장 먼저 반포된 것은 광서제의 선전 상유(上諭)였다.
조선이 우리 대청의 번병(藩屛)이 된 지 어언 200년 …… 최근 십수 년 동안 이 나라는 간신이 조정을 장악해 제 임금을 업신여기고, 상국의 은혜를 저버렸다. 조정은 이 소국을 가련히 여겨 보호하고 타일러 어리석은 행동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 이러한 행동의 배후에는 일본이 있다. 일본은 조약에 따르지 않고 공법을 지키지 않으며, 방자하게 위세를 부리며 오로지 간사하게 남을 속이려는 꾀만을 일삼고 있다. …… 짐은 이 간악한 적을 징벌하고, 역도를 제압해 정의를 되찾고자 한다.
광서 20년 9월 3일 (1894년 10월 1일)
조선은 제국과 수교한 이래, 열강의 대오에 선 하나의 독립국이다. 그러나 청국은 언제나 스스로 조선을 속국으로 칭하며 음으로 양으로 그 내정에 간섭했고, 내란을 획책했다. …… 짐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국민의 충실함과 용맹함에 기대어 속히 평화를 영원히 회복하고, 제국의 광영을 보전할 것을 결의한다.
메이지 27년 10월 1일
대조선국 대군주는 충실하고 용감한 국민에게 이르노라. 태조대왕께옵서 하늘의 명을 받들어 나라를 개창하신 이래, 조선의 국권은 언제나 조선에 있었다. 본래 저 만청은 여진의 건주위(建州衛)로, 우리 태조대왕의 신하이자 조종의 은혜를 입었던 자들이다. 그런데 대명의 천지가 어지러워지자, 사나운 짐승과도 같은 저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병자년, 삼전도의 치욕은 우리 왕실과 백성들에게 있어 씻을 수 없는 원한으로 남았다. …… 만청은 본성을 저버리지 않고, 열강의 반열에 선 당당한 독립국인 조선을 겁박하며 독립을 위협하였다. …… 이에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위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바이다. 만청 침략자를 무찌르고, 조선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이룩하자.
대조선 개국기원 503년 10월 1일
조선은 독립 선포의 뜻으로 즉각 청국 사신이 들어오는 문인 영은문(迎恩門)을 허물었다. 청국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慕華館)과 청국 상무위원이 머물던 관저도 징발했다.
조선 전역이 전시상태에 들어가고, 곳곳에 군대가 배치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경험하는 257년 만의 전쟁이었다.
“근위여단과 친위여단을 합쳐 근위사단을 편성하고, 4여단과 5여단을 합쳐 1사단을, 1여단과 6여단을 합쳐 2사단을, 2여단과 3여단을 합쳐 3사단을 편성한다.”
예비군의 동원과 소집이 완료되어 각 부대는 전시체제를 갖추었다. 지금까지 조선의 최대 전략 단위는 여단이었지만, 새로 사단이 편성되었다.
“용암포에서 확인했듯이 청군의 주력이 압록강 맞은편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목적은 육로 진격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평안도가 주전장이 되겠군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수도와 경기방위도 굳건히 하고…….”
“전쟁이 시작된 이상 북양함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일본 해군이 견제해 줘야 합니다.
일본 측을 대표해 원수부 군의에 참석한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가 흔쾌히 답했다.
“제국 해군이 북양함대를 격파하고 황해 제해권을 반드시 잡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1사단, 즉 평안도의 4여단과 함경도의 5여단은 평안도 방위에 집중합니다. 경기도의 1여단과 황해도의 6여단도 평양으로 보내고, 3사단은 경기도에 대기합니다. 근위사단은 일단 수도 방위를 맡으나, 전황 변화에 따라 이동할 계획입니다.”
지도에 조선군의 방위 계획이 표기되었다.
“의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지역은 서서히 퇴각하며, 평양에 병력을 집중시킵니다.”
“아니, 싸워보지도 않고 평양 이북 지역을 포기하자는 말씀입니까?”
원수부 군무국장에서 1사단장으로 임명된 윤웅렬이 답했다.
“포기하는 게 아니라, 가장 유리한 지점에서 싸우자는 겁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지요. 평양의 요새화는 그 어떤 곳보다 잘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철도로 연결되어 아군의 보급도 쉽습니다.”
원수부에서 청국의 침략에 대비해 작전을 구상했고, 요새화된 평양으로 끌어들여 결전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육로로 진격할 적의 보급선을 최대한 늘리고, 평양에서 적을 역으로 포위 섬멸할 계획입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선전포고 직후인 10월 2일. 안동에 대기하고 있던 청군이 압록강을 넘어 진격을 개시했다.
“진격하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의 병력은 약 4만이었다.
성자군(盛字軍) 1만 8000명, 의자군(毅字軍) 6000명, 봉천군(奉天軍) 1만 명, 성자연군(盛字練軍) 5000명으로 이들은 모두 만주의 용군과 연군이었다.
동시에 북양함대의 호위를 받는 회군 1만 2000명이 황해로 항행을 개시했다.
목표는 조선 제2의 도시, 평양이었다.
“연대장님! 청군이 압록강을 넘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성미만 같아선 당장이라도 맞서 싸우고 싶으나…….”
의주를 지키는 6연대장 이범윤 부령은 쓴 입맛을 다셨다. 간도 분쟁 이후 책임을 지고 좌천되었던 이범윤은 올해 부령으로 승진해 북방 방위를 맡는 6연대장에 보임되었다. 청군에 맞서 이겨본 실전 경험을 높이 평가해서였다.
하지만 원수부는 6연대에 교전을 벌이지 말고,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적을 교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사이 중앙군은 평양에서 집결하여 청군과 일전을 벌인다는 계획이었다.
애초에 4만이나 되는 만주군을 6연대 병력으로 정규전에서 싸운다는 건 한계가 있었다.
“6연대는 일단 퇴각 후 의용군과 연합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
4만의 만주군은 의주에 무혈입성했다.
“조선놈들, 대청의 위엄 앞에 알아서 도망가는군.”
“이대로 평양까지 쭉 뻗어있는 거 아닙니까? 하하!”
기세가 오른 만주군은 해안을 따라 평양으로 진격했다. 조선군은 정말로 청군의 위협에 겁이 먹었는지, 정주까지 진격하는 동안 제대로 된 저항도 없었다.
“장군, 적들이 청야전술을 쓰고 있습니다.”
10월은 수확 철이었지만, 논밭은 싹 비어 있었다. 해상 수송을 제외하면 현지 조달을 계획한 청군의 보급을 교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도 없을 리가 있나? 있는 건 다 털어오도록 하라!”
청군 선발대가 보급이라는 명목 아래에 약탈을 개시하자 관리와 주민들은 죄다 산으로 도망쳐 버렸다.
“저, 저 겁 많은 조선놈들. 누가 잡아먹나?”
“역시 아직 다 못 가져간 게 있었군. 전부 군영으로 실어가세.”
“조선놈들이 열심히 일해 준 덕에 우리가 포식하겠구먼, 하하.”
관청 창고에 실려 있던 각종 곡물과 가축이 청군의 군량으로 쓰기 위해 징발되었다. 청군 선발대는 희희낙락하며 군영으로 돌아갔다.
타다다다당!
갑작스러운 총성에 청군은 깜짝 놀랐다.
“적이다!”
“반격하라!”
6연대가 기습공격을 개시했다. 중대 단위로 쪼개진 6연대 병력은 지방의 의용군과 결합하여 유격전을 벌였고, 청군의 보급선을 교란했다.
“퇴, 퇴각하라!”
갑작스러운 기습에 청군이 도망치자, 6연대는 기세를 올려 추격을 하려 했다.
“쫓지 마라! 저들이 계속 출혈을 하며 평양으로 가게 내버려 둬야 한다.”
이범윤과 6연대는 유격전이라는 본래의 임무에 충실했다.
도처에서 유격군에 의한 피해가 발생하자, 만주군 사령부는 의견충돌이 발생했다.
“후방을 모두 정리하고 진격해야 합니다. 두고두고 신경이 쓰일 겁니다.”
“사소한 피해에 불과하오. 우리의 목표는 평양으로 진격하는 것이오. 회군과 평양에서 합류하기로 한 시간이 있소. 그런 놈들 신경 쓰다간 언제 평양으로 가겠소?”
조선 공격군의 총지휘권은 해로로 진격 중인 회군 사령관 섭지초(葉志超)에게 있었다.
하지만 육로로 진격 중인 만주군의 지휘권은 일원화되지 않았고, 특히 성자군 사령관 위여귀(衛汝貴)와 봉천군 사령관 좌보귀(左宝貴)의 대립이 컸다.
결국, 섭지초가 명령한 집결시간에 맞춰 평양에 진격하자는 의견이 우세를 이뤘다.
“제기랄, 회군 놈들은 편안하게 배로 이동하는데 우리는 육로로 이동하면서 이 무슨 고생이야.”
“회군은 귀족이고, 우리는 평민이라 이거지.”
병사들의 불평을 뒤로하고, 4만의 만주군은 무작정 평양을 향해 진격을 재개했다.
그 무렵, 회군과 북양함대는 해로로 진남포에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