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88
– 188화에 계속 –
188화 황해 해전
평양 전투의 결과, 청군의 피해는 참담한 지경이었다. 단 하루 사이에 사상자는 1만을 넘겼다. 부상자는 모두 포로가 되었고, 사지 멀쩡한데도 백기를 들고 투항한 자도 허다했다.
빠른 도주로 인해 청군의 과반은 전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나 군대라고 부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청군의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평양에서 북쪽으로 퇴각하는 동안, 후방에서 추격해온 기병대와 전방을 가로막은 유격군이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혔다.
“오랑캐들이 순순히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지 마라!”
“간나새끼들, 총알맛 좀 보라!”
유격전을 벌이던 6연대와 평안도 의병들은 청군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주전장이 평안도가 되면서 청야 작전을 시행하는 바람에 주민들 상당수가 집과 농토를 잃어야 했고, 평안도 의병들은 청군에 대한 증오가 상당했다.
청군은 계속되는 출혈을 감수해 나가며 가까스로 청천강 일대 안주(安州)에 도달했다.
“손실이 너무 크다. 육로로 행군을 계속한다면 희생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함대의 지원을 요청한다.”
섭지초는 북양함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북양함대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에 파견된 원정군은 소식이 닿지 않아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북양함대는 이미 참패한 뒤였다.
북양함대는 요동의 정예군인 명군과 수많은 육군의 수송을 맡아 압록강 하구 안동에 도착하여 상륙시켰다. 이들은 조선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북양함대는 이홍장의 소극적인 전략에 따라 압록강 이남으로 진출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오로지 지상군 병력과 군수물자의 수송에만 전념했다.
이홍장이 북양함대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소극적 전략을 지시했지만, 합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북양함대의 장점은 전함의 거함·거포다. 그에 비해 일본 해군은 순양함 중심으로 작지만 빠르다. 넓은 바다에서 해전을 벌이면 일본에 유리한 건 기정사실. 요새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여순과 위해위에 머무르며 접근하는 일본 함대를 격퇴한다.”
하지만 이홍장의 소극적인 전략은 북경 조정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대체 그동안 거액을 들여서 함대를 육성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쟁에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왜국 함대가 중국의 앞바다를 멋대로 드나드는데, 북양함대는 항구에 틀어박혀 있으려고만 하니 부끄러운 노릇입니다!”
“이홍장은 북양함대를 사병으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왜국 함대와 싸우지 않는다면 역심을 인정하는 꼴입니다!”
격렬하게 쏟아지는 비난에도 이홍장은 개의치 않았다. 북양함대에 가급적 교전을 피하고, 임무를 마치면 여순항으로 귀항하라고 명령했다.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은 이홍장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쟁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평양에서 격전이 벌어진 날인 10월 17일, 일본 연합함대와 북양함대는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개전 초기, 일본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일차적으로 해군은 반드시 북양함대를 격퇴하고 황해 제해권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육군이 요동 반도로 진격하고, 최종 목적인 직례 결전을 벌일 수 있다.”
개전 초기부터 연합함대는 북양함대를 쫓아 교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북양함대는 순순히 교전에 응하지 않았고, 군대를 수송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여순과 위해위에 틀어박혀 있었다.
10월 초, 연합합대는 회군을 진남포로 수송하기 위해 모항을 떠난 북양함대와 일전을 벌일 수 있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일본 해군 군령부는 점차 초조해졌다.
전쟁을 지휘하는 대본영에서는 제해권의 조속한 확보를 원했다. 전시 편제된 육군 3개 사단이 요동 반도로 투입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육지에서 청군을 막고 있는 조선 측에서도 속히 북양함대를 격퇴해서 바다로부터의 위협을 없게 해 달라고 거듭 요청하고 있었다.
“청군은 반드시 조선에 추가 파병을 할 것이다. 다음에 수송할 때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마침내 일본이 원하는 기회가 왔다. 북양함대가 여순을 떠나 압록강 하구로 항행한다는 정보를 얻은 연합함대는, 머물고 있던 인천항을 즉시 떠났다.
수송 임무를 마친 북양함대는 바로 여순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정여창은 즉각 회항을 명령했고, 북양함대는 압록강 하구를 빠져나왔다.
바로 그 순간, 일본 연합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북양함대 발견!”
“전투 준비!”
연합함대 사령장관 이토 스케유키는 전투 명령을 내렸다.
연합함대의 전력은 방호순양함(防護巡洋艦) 9척, 코르벳 2척, 포함 1척, 위장순양함 1척 등 총 12척 배수량 4만 톤이었다.
“일본 함대입니다!”
“교전을 피할 수가 없겠군.”
북양함대 통령 정여창도 해전에 응했다.
북양함대는 전함 2척, 경순양함 8척, 포함 2척, 어뢰정 2척 등 총 14척 배수량 3만 6000톤이었다.
전력은 비등해 보였지만, 북양함대에는 동양 최대의 전함 정원과 진원이 있었다.
오후 1시경, 청국 전함 정원과 일본 순양함 요시노가 포탄을 주고받으며 해전이 시작되었다.
“전함 포격 개시!”
“발포!”
연합함대의 일제 포격이 시작되자 북양함대 주위로 무수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10월 17일 13시경 압록강 하구에서 교전. 18시경 교전 종료. 연합함대는 순양함 마츠시마, 히에이, 포함 아카키, 사이쿄마루 대파. 북양함대는 전함 정원, 진원 중파. 순양함 경원, 치원, 초용, 양위, 포함 광을 격침!”
북양함대가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연합함대는 승리를 거두었다.
분명 전함의 무장 상태는 북양함대가 더 좋았지만, 지휘관의 자질과 수병의 숙련도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연합함대가 6척의 포탄을 쏘는 동안, 북양함대는 1발을 쏘는 정도였다. 수병의 숙련도도 떨어졌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화약과 포탄의 부족이었다.
각 포는 불과 15발의 포탄만을 보유했고, 그나마도 결함이 일쑤였다.
“7시 방향으로 포격! 빨리!”
“포가 나가지 않습니다!”
“뭐야?”
청 말의 부패로 인해 북양함대에 납품되는 화약과 포탄은 쓸 수 없는 저질이었다. 이러니 훈련이 제대로 될 리 없고, 실전에서 제대로 싸울 일은 더 없었다.
그나마 동양 최대의 전함이라는 정원과 진원은 제대로 운용되었다. 하지만 정원과 진원의 함포와 장갑은 강했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북양함대는 평균 7노트의 속도를 냈지만, 연합함대는 그 두 배의 속도로 움직였다. 연합함대의 ‘히트 앤드 런’ 전술에 북양함대는 꼼짝없이 두들겨 맞았다.
정원과 진원이 연합함대의 주공격 대상이 되어 포탄 수백 발을 맞으면서도 버티는 무서운 분전을 해 준 덕에 북양함대는 궤멸을 피할 수 있었다.
“아군의 희생도 적지 않습니다. 4척이 대파되었고, 이제 탄약도 떨어져 갑니다.”
“정원과 진원은 정말 괴물이로군! 어쩔 수 없다. 교전을 중지하고 퇴각한다.”
오후 6시, 해가 저물어가자 일본 해군은 야간 교전을 포기하고 인천으로 회항했다.
이만해도 상당한 성과였다. 일본은 4척의 함대가 파손을 입었다지만, 복구가 가능했고, 북양함대는 5척의 군함을 잃었던 것이다.
북양함대는 간신히 주력을 보존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여순항으로 속히 퇴각했다.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라 전쟁 소식은 신속히 전해졌다.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의 결과가 전 세계에 타진되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평양 전투에서 조선 육군이 청국 육군을 대파!”
“황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청국 해군을 대파!”
이틀 사이에 벌어진 두 전투는 조일 동맹 측에는 환희의 순간이었고, 청국에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조선의 승리는 더욱 상징적이었다. 불과 20년 전까지, 조선은 알려지지 않은 ‘은자의 나라’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은 청의 속국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조선이 청나라와 싸워서 이기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근대화 개혁에 나선 지 불과 10년 만에, 조선은 청나라의 침략을 무찌를 수 있는 나라로 성장한 것이다.
평양 전투 이후 조선군은 국내에 침입한 청군의 소탕전에 들어갔다.
황해 해전의 참패 소식을 전해 들은 압록강 북쪽의 만주군은 조선 진격을 포기하고, 방어로 전환했다.
육지에서도, 해상에서도 도움이 끊긴 원정군은 능력껏 압록강을 넘어 도주해야 했다.
원정군 총사령 섭지초는 회군의 전력 보존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회군 대부분은 온갖 고생 끝에 압록강을 넘어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군영은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군의 전열은 대부분 붕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뿔뿔이 흩어진 청군이 도적화한다면 그게 더 골치 아픈 일이었다.
“투항하라! 조선국은 항복하는 청국 장병을 정중히 대우할 것을 약속한다. 평양에서 항복한 장병들 역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국땅에서 싸우다 죽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조선군은 항복한 병사들을 내세워 선무공작에 들어갔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자들과 싸워서 전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선무공작의 효과는 상당했다. 장교와 병사를 가리지 않고, 백기를 들고 조선군에 투항하는 자가 속출했다.
“降服! 降服!”
청군의 항복을 접수하면서 4연대 특무대장 홍범도 정위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거 참, 청군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이야.”
“그게 다 대장님께서 적장을 사살한 덕 아니겠습니까?”
“어허, 그 무슨 소리. 우리 군이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적을 격파한 덕이지.”
홍범도는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그의 서울말은 자연스러웠다. 정부는 전국적으로 군대에 서울말을 사용할 것을 강조했고, 특히 장교들은 확실한 서울말을 구사해야 했다. 지역적 이질감을 줄이고, 단일한 조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출신별로 대립과 암투를 일삼으며 서로를 불신하던 청군과 대비되었다.
“뭐, 우리가 잘 싸운 것도 있지만, 청군이 너무 못 싸우기도 했어. 내가 사살한 그 장수를 제외하면, 제대로 싸우려는 이도 없었지. 쭉정이뿐인 청군 지휘관 중에서 유일하게 용맹한 이였어.”
홍범도는 순수한 무인다운 감상으로, 자신이 저격한 좌보귀에게 경의를 표했다. 하나같이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청군 지휘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 역할을 하다 전사한 이였다. 나머지는 모두 도망치느라 바빴다.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후, 평양 기자릉 인근에 전사한 조선군의 묘역이 신설되었다. 조선군 전사자는 약 700명이었다. 완화군 이선을 대표로 한 정부 인사들이 정중히 예를 갖춰 전사한 이들을 안장했다.
“대조선국은, 조국을 위해 전사한 장병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선이 머리를 숙이며 조의를 표하자 병사와 백성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적군의 시체라고 해서 함부로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적의 장군 중에서 유일하게 전사한 좌보귀의 시신을 수습하여 정중하게 예를 표해 장례를 치러주었다.
7천이 넘는 청군 전사자들의 시신은 청군 포로들이 수습하여 조선 군의관이 주재하는 가운데 화장(火葬)으로 장례를 치러 주었다.
시체를 방치하는 건 전염병의 근원이 될 수 있으니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속히 화장한 것이지만, 청군 병사들은 관대한 조치라고 칭송했다. 침략자의 시신까지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주는 일은 그전까지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조선은 문명국가로 국제법을 준수한다. 적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항복하는 자는 포로로 정당히 대우하라.”
이선은 서양과 일본의 종군기자들을 평양으로 초청해 전장을 둘러보게 했다.
“조선의 야전병원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를 치료해 줍니다.”
미국 유학파로, 영어에 능통한 군의부장 서재필이 직접 종군기자들을 야전병원으로 안내했다.
서재필의 설명대로 항복한 청군 병사들도 부상을 치료받고 있었다.
“과연, 조선은 문명국가다운 행보를 보이는군요.”
전쟁은 프로파간다, 이른바 선전전이기도 했다. 조선과 일본은 청국에 대한 전쟁을 ‘문명과 야만, 진보와 수구, 자주와 억압, 근대 국민국가와 전근대 제국의 투쟁’으로 규정하고 선전했다.
당연히 그 ‘문명’이라는 것은 근대 서양 문명에 기준을 맞춘 것이었다.
서양 종군기자들은 ‘문명과 야만’이 더욱 대비되는 자극적인 사진들을 찍었고, ‘문명의 승리’를 세계적으로 선전했다.
서양식 군복을 입고 최신 무기를 장비한 체격 좋은 조선 근위대 병사들과 찢긴 옷에 변발한 청군 포로들의 초라한 모습이 여실히 대비되는 사진이 찍혀서 유포되었다.
1894년 10월. 평양에서, 오랜 세월을 내려온 중화 질서는 종말을 고했다. 중화제국의 시체 위에서 새로운 국민국가의 시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