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90
– 190화에 계속 –
190화 개선(凱旋)
각국 공사는 니콜라이 2세를 찾아 알렉산드르 3세의 서거를 애도하며 조의를 표했다.
주러시아 조선공사 김학우도 예복을 입고 니콜라이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
김학우는 러시아 유학파인 조선에 전신 기술을 도입하여 조선 전역의 신속한 통신에 혁혁하게 기여했다.
전신 전문가로 한글을 기반으로 국문 전신부호인 ‘국문자모 호마타법(國文字母號碼打法)’을 만들었다. 자모음을 짧은 점과 긴 점의 두 가지 기호를 조합하여 만든 2진법 체계의 모스 부호와 같은 원리이다.
조선 정부는 이를 토대로 암호문을 만들었고, 그 덕분에 타국에서 쉽게 해독할 수 없었다.
전신 기술은 이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군은 전신 덕에 신속하게 정보를 파악하여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농상공무협판과 법무협판 등 요직을 지내기도 했던 김학우는 전쟁 발발 직전 러시아 공사로 부임하여 대러 외교를 전담했다.
러시아에 많은 인맥을 뒀던 김학우는 이선의 복심 역할을 했고, 러시아의 정세를 재빨리 파악해 조선에 전달했다.
“조선 대군주께서는 황제 폐하의 붕어에 큰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러시아를 벗으로 여기는 조선 국민의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군주 폐하께서는 국민 전체의 추모 뜻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고맙소. 대군주 폐하와 조선 국민의 호의를 잊지 않겠소.”
김학우가 조선의 국서를 전달하자 니콜라이가 감사를 표했다.
“귀국이 청의 침략에 맞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들었소. 참으로 훌륭한 일이오. 나의 벗, 이선 공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 주시오.”
“감사합니다, 폐하. 조선의 승리에는, 러시아군에서 제공해준 무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러시아의 최신 제식소총인 모신나강이 조선군에 지급되었고, 평양 전투의 승리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
“아니오. 귀국이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는데, 도움을 주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오.”
“조선은 폐하의 지극하신 성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선제 폐하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기간이라 쉽게 나설 수 없으나, 때가 되면 반드시 귀국에 도움을 드리겠소. 짐이 약속하리다.”
김학우는 내심 기뻤으나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조선에는 엄청난 힘이 될 것입니다.”
전쟁 발발 이후, 서양 열강들은 대부분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덴마크, 오스트리아-헝가리, 스웨덴-노르웨이, 이탈리아, 미국 등은 순차적으로 중립과 불개입을 선언했다.
그에 비해서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정세를 관망하며 자국의 이익이 되는 방향을 고려했다.
러시아는 특히 만주에 관심이 있었다. 군부 강경파는 청의 혼란을 틈타 북만주를 장악하길 원했다.
선제 알렉산드르 3세는 영국의 반발을 우려해 강경 주장을 억눌렀으나, 새로운 황제의 등장으로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만주에 대한 러시아 군부의 야욕, 외무부의 영국과 일본에 대한 경계, 조선에 대한 새 황제의 호감은, 앞으로 있을 정책의 변화가 있음을 암시했다.
평양 전투 승전 후, 조선군은 청군에게 점령됐던 평안도 해안 지역을 수복하고 북진을 계속 이어나갔다.
압록강을 넘어왔던 청군은 대부분 소탕되었다. 5만의 청군 중 병력을 유지해 압록강을 넘어 다시 돌아간 건 회군 정도였다. 청군 지휘부로부터 버림을 받아 조선군에 포로로 잡힌 청병도 2만이 넘어섰다.
포로를 국제법에 따라 존중하라는 정부의 지침에 따라 이들은 곳곳의 포로수용소에 분산 배치되었다.
전선의 급한 행정 업무를 마친 이선은, 정부와 앞으로의 전쟁 진행을 협의하기 위해 호위대를 대동하고 한성으로 귀환했다.
경의선의 시·종착역인 서대문역에 내리자, 못 보던 건물이 눈에 띄었다. 정부에서는 평양 전투 승리 소식을 듣자 재빨리 간이 개선문을 만든 것이다.
‘파리의 개선문을 어설프게 흉내 낸 조악한 건물이군.’
이선은 대형 태극기로 뒤덮인 ‘한성 개선문’을 보고 미적 감각이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큼 조선 정부가 승리를 기뻐한다는 의미였다.
평양 승전 소식은 전신을 타고 신속히 전해졌다. 관보에 실려 전국에 전해졌고, 이윽고 종군기자들의 온갖 미사여구가 담긴 필치로 널리 알려졌다.
전쟁은 막 태동한 언론 산업에 호황을 불어넣었다. 호외가 매일 같이 발행되었고, 사람들은 신문을 보며 시시각각 전쟁 상황을 파악했다. 전황 보도는 원수부 검사국의 엄격한 검열절차를 거쳤지만, 승전 소식은 통제할 필요가 없었다.
전쟁 프로파간다는 일상이 되었다. 호외 경쟁을 하는 신문사들은 그림으로 시각적 효과를 더했다. 평양 전투는 화가들의 그림으로 그려져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서양식 제복을 입고 신식 무기를 든 조선군 병사들의 용맹한 분투와 대조되는, 변발 호복 차림을 하고 도망가기 여념 없는 무능한 청군의 모습은, 조선 국민에게 ‘문명국 조선과 야만국 청국’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중국을 문명의 중심으로 여겼던 전근대의 세계관은 완전히 전이되어 버린 것이었다.
청국 포로들 일부는 한성 교외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포로들이 경의선을 타고 한성에 도착하여 포로수용소를 향해 도보 이동하자, 조선 백성들은 야유를 퍼부으며 비웃었다.
“저기, 저놈들 봐라. 겁먹은 돼지 새끼꼴이 아닌가!”
“저런 놈들이 지금껏 상국이랍시고 거들먹거렸다니 참 웃기는 일이야.”
“침략자 되놈들아! 이렇게 될 줄 몰랐냐!”
일부 백성들이 침을 뱉고 돌을 던지며 위협을 가하자, 순검들이 훈계했다.
“개화된 문명 국민답게 포로를 대하시오. 조선은 청국과 달리 국제법을 준수하며 포로를 우대하오. 저들을 예로 갖춰 대하는 게 문명 국민다운 태도요.”
전쟁 이후, ‘개화’와 ‘문명’이란 단어는 조선 국민에게 완전히 내재화되었다.
“그래, 우리는 개화된 문명 국민이지. 야만인처럼 굴면 안 되네.”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기고, 포로도 우대한다!”
프로파간다의 정점에는 완화군 이선이 있었다.
왕족이 직접 친정하여 전선에서 외적과 맞서 싸운 건,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드문 일이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때 분조를 이끈 광해군과 소현세자 정도였다.
더욱이 평양 전투는 승리로 귀결되었으니 전선에 있던 완화군을 향한 개인숭배는 더욱 강해졌다.
육군 부장의 제복을 입고 한 손에는 태극기를 치켜들고, 한 손에는 칼을 빼 들고 평양성에서 지휘하는 완화군의 그림은 대청 항전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 이거 역사 왜곡 아니냐? 낯 뜨거워서 원.’
그림을 본 이선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평양성에 있었던 건 맞지만, 직접 군대를 지휘한 건 아니었다.
물론 10년간 근대화 정책을 이끈 이선이 승리에 혁혁하게 이바지했다고 하겠으나, 전투 지휘는 군인의 몫이었다. 평양에서 이선이 맡은 일은 군무대신으로서 행정적인 업무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부와 왕실, 대중이 원했던 건 상징성이었다. 최전방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운 승리를 이끈 왕족이라는 그림은 완벽히 일치했다.
정부는 근대화 정책을 이끈 지도자로서, 왕실은 왕가의 일원으로서, 완화군 이선의 상징성이 필요했다. 그리고 대중은 그 상징성에 열광했다.
백성들은 승리자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선의 귀환 소식에 태극기를 들고나온 백성들은 만세를 외치며 기뻐했다. 개중에는 이선의 그림을 들고 열광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기 완화군 대감이시다!”
“어디? 아, 저기 계시군!”
“와아아아!”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평양의 승리자, 완화군 천세!”
이선은 자신을 알아보고 밀려드는 인파에 화답하느라 길을 제대로 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즉석에서 대중 연설을 했다.
“친애하는 조선 국민 여러분! 이 전투의 승리는 우리 군장병과 국민 전체의 분투와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바로 개화의 성과이자, 국민개병제의 승리입니다.”
승전은 무관과 국민개병에 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전까지 무관은 문관에 비하면 격이 떨어졌고, 징병은 국가에서 부여하는 강제 군역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평양의 승리 소식 이후, 군인은 자부심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국민이 함께 만들어낸 승리라니! 더 늦게라도 군대에 들어가야겠어. 전공을 세우지 않으면 자식 보기에 부끄럽지.”
“어이, 자네 나이가 벌써 몇인지 알아? 군대에서 자네 같은 늙다리는 받아주지도 않아.”
“아니, 아직 마흔도 안 됐는데 뭐가 늙었나! 마음은 청춘이라고! 전봉준 의관도 마흔에 입대했는데.”
“흠, 그러고 보니 그렇군. 좋아, 나도 의용군으로…….”
“…… 이는 대조선국과 조선 국민 전체의 승리이며, 진정한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공로를 군대와 국민에게 돌리는 내용의 연설을 마치자 백성들은 더욱 열광했다.
“모든 공을 국민에게 돌리다니, 어쩜 저렇게 마음이 깊으시단 말인가!”
“이러니 우리가 충성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런 왕자님이 계신데 어찌 나라가 망하리오!”
“암, 흥할 일만 남았지, 하하하.”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이선은 감격했다.
‘국민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지 체감하는 것보다 정치인으로서 더 행복한 경험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까닭 모를 불안감을 느껴졌다.
‘국민이 보내는 충성의 대상은 나나 왕실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가 되어야 한다. 신민의 충성이 아니라 국민의 애국심이 되어야 하는데……. 평양 전투의 영광은 내 개인이 아니라 군대와 국민이 누려야 하는 게 맞다.’
근대화가 시작되고 국민교육이 확산하여 국민의 지적 수준이 크게 상승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500년 왕조 국가의 틀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이선에게 열광하는 건 그가 왕의 장자라는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 노력하고 솔선수범한다는 데에 있었다. 그건 이선이 왕자라는 신분을 타고났기에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전쟁을 근대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으려는 이선에게 지나치게 쏟아지는 개인숭배는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이라는 추상적인 대상보다, 왕자라는 상징적인 개인이 백성들에게 더욱 쉽게 와닿았다. 적어도 당분간 그들의 소박한 환상을 깰 이유가 없었기에 이선은 자신의 상징성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선은 대군주에게 승전 소식을 보고한 후, 치하를 받았다.
“완화군, 경의 공로가 실로 크다. 국가와 왕실의 홍복이자 짐의 기쁨이다.”
임금은 웃으며 말했다. 승전으로 인해 왕실의 권위가 올라가는 건 임금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개전 당시만 해도 패전할까 봐 노심초사했던 임금이지만, 이제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황공하옵니다. 이는 모두 대군주 폐하의 성은 덕입니다.”
“경은 겸손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짐이 한 일이 뭐가 있는가? 다 경과 정부, 군부의 공이다.”
임금의 말은 중의적이었다. 겸손을 가장했지만, 권력에서 소외되어 권위만 누리는 자신의 처지가 여전히 속이 쓰렸다.
이제 이선은 국가의 지도자인 동시에 전쟁 영웅까지 겸하게 됐으니 부왕으로서도 뛰어넘을 수 없는 아들이 된 것이다.
“신과 모든 국민은 대군주 폐하를 위해 충성을 다할 따름이옵니다.”
이선은 임금이 내리는 포상을 겸손히 사양했다. 임금이 이선의 공적을 기려 전투가 벌어진 평양 인근의 토지를 완화궁(完和宮)에 하사할 계획이라고 밝히자,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신은 이미 충분히 부유합니다. 그보다 왕실에서 전상자들을 위해 은사금을 하사하면, 군인과 백성은 성은에 감격하여 왕실에 더욱 충성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러하구나. 경의 말이 옳다. 정부에 명하여, 궁내부 예산 일부를 전상자를 위해 쓰도록 하라.”
임금은 이선의 생각에 찬탄을 표하면서도, 내심 속이 쓰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선이 한성으로 돌아온 건, 향후 전황을 정부 및 원수부와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전선은 청군의 퇴각으로 종료되었고, 전선은 만주로 확장되었다.
“전선의 정보에 따르면…….”
이홍장의 주청대로, 여순에 주둔 중인 의군(毅軍) 사령관 송경(宋慶)이 만주의 전군을 지휘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송경은 염군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장수가 되고, 좌종당의 신장 원정에 동참하여 뛰어난 공을 세운 백전노장이었다.
“신 송경, 삼가 황명을 받들어 적을 쳐부수겠나이다.”
하지만 송경은 이홍장보다 나이가 많은 일흔다섯의 노장이었다. 분명 조정의 신망이 두터운 장수였으나, 전쟁을 지휘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이 늙은 신하에게 전장에서 죽을 기회가 주어졌구나. 황명에 보답하기 위함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송경은 동삼성의 군대를 지휘하는 전권을 부여받았다. 만주군 8만 5000명이 송경의 지휘권으로 들어왔으나, 그는 전황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어찌 되었건 황명이 떨어진 이상, 송경은 방위계획에 착수했다. 송경은 향후 조선이 상대해야 할 새로운 적장이었다. 그는 조선의 북진에 대비해, 압록강 대안 구련성(九連城)에 엄중한 방어를 명했다.
조선 정부가 한창 북진을 논의하던 차에, 이홍장이 보낸 밀사가 한성에 당도했다. 밀사의 정체는 뜻밖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