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92
– 192화에 계속 –
192화 압록강 도하
1894년 11월.
동아시아 전쟁은 조선 너머 만주로 이어졌다.
“제1군의 목표는 요동이다! 진격하라!”
일본군 제1군 사령관 노즈 미치즈라(野津道貫) 대장이 이끄는 3개 사단은 요동 반도 동쪽 화원구에 상륙했다. 1군은 10월 30일부터 11월 4일까지 세 차례로 나누어 상륙했다. 청군의 저항은 받지 않은, 순조로운 상륙이었다.
11월 6일, 1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1사단과 3사단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금주(金州)와 대련(大連), 북양함대의 모항인 여순(旅順)항을 공격해 점령할 계획이었다.
5사단은 북상하여 요하에 접한 영구(營口) 방향으로 진격해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다.
화원항에서 금주는 약 250km 정도였지만, 일본군은 거의 저항도 받지 않으며 진격했다.
“전군 포격 개시!”
11월 13일, 일본군은 금주성에 도달해 공격을 개시했다.
“돌격!”
금주성은 높은 성벽으로 보호를 받았지만, 방어하는 청군은 대부분 신병이었다. 대포 몇 방만 쏘다가 일본군이 돌격하자 성을 내버리고 퇴각했다.
일본군의 다음 목적지는 대련이었다. 대련은 북양함대의 기지이자 여순으로 향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수많은 물자도 집적되어 있었다.
대련에는 약 병력 1만이 있었지만, 문제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전투 의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금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들은 크게 동요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여순으로 도주했다.
11월 15일, 일본군은 대련을 손쉽게 점령했다. 수많은 무기와 탄약이 일본군에 노획되었다.
대련의 함락은 청군 지휘부에 막대한 심리적 손실을 입혔다.
“여순 요새는 반드시 방어하라! 여순이 함락되면 북경까지 위태롭다!”
이홍장은 조속한 종전 외에는 답이 없다고 판단했다. 여순의 철저 방위를 명한 후 조선에 이어 일본에도 휴전을 제안하기 위해 밀사를 보냈다.
만주군 사령관 송경은 이도 저도 못 한 채 우왕좌왕했다. 압록강 대안 의주에 조선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지만, 당장 요동에 상륙한 일본군이 발 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압록강 대안에 5만의 병력을 투입하여 조선의 도하를 저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여순에 지원군을 보내라. 금주를 탈환하여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하라!”
압록강으로 향하려 했던 청군은 부랴부랴 금주 방향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전투 의지를 상실한 청군의 공세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압록강 방위를 맡은 건 만주족 이크탕가(依克唐阿)였다. 당시에는 드문 만주 팔기 출신 장군이었다. 본래 흑룡강성을 지키던 이크탕가는 개전 이후 부랴부랴 남하하여 압록강에 도착했다.
이크탕가가 맡게 된 병력은 약 2만 8000명이었다. 이크탕가가 이끌고 온 병력 6천, 요동에서 온 유성휴(劉盛休)의 명자군 5천, 만주 연군 4천, 조선에서 퇴각해 온 부대 1만 3천이 전부였다.
“우리는 조선군의 도하를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
이크탕가는 장수들 앞에서 결의를 다졌지만, 군대 상황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패잔병이 절반이었고, 이들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다.
평양 전투의 패장, 섭지초는 회군을 ‘무사히 이끌고 퇴각’한 공로로 일단 유임될 수 있었다.
섭지초는 평양 전투의 패전 책임을 성자군 사령관 위여귀에게 떠넘겼다. 위여귀가 가장 먼저 도망쳤고, 보급품 횡령을 일삼은 무능하고 부패한 자임이 틀림없었기에 패전 책임자로 삼기에 적격이었다.
“어떻게 패전이 내게만 책임이 있다는 거냐! 나를 죽일 거면 섭지초도 함께 베어라!”
위여귀는 참수되어 죄상과 함께 머리가 내걸렸고, 휘하 병사들은 오히려 환호했다.
“개자식, 정말 어지간해도 해 처먹었구나!”
“어쩐지 우리 부대만 보급 상황이 최악이라더니.”
하지만 섭지초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동안 연전연승했다고 거짓 보고를 해 왔던 게 들통 난 것이다.
섭지초는 경질되어 천진으로 소환되었지만, 삭탈관직으로 끝이 났다. 이홍장의 동향 사람이자 측근이라는 게 그의 생존 요인이었다.
회군의 지휘권은 역시 이홍장의 동향 사람인 섭사성(聶士成)에게 넘어갔다.
장수들마다 추태를 보이니 청군 지휘부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유일하게 용맹히 싸우다 전사한 좌보귀가 표창을 받았다. 좌보귀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고, 태자소보(太子少保)로 추증되었다.
하지만 좌보귀도 청군 장수들 중 드물게 제대로 싸웠다는 데 의의가 있는 거지, 잘 싸웠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만큼 청군 지휘관의 질적 수준은 심각했다. 근대전에 익숙한 건 고사하고, 대부분 전의(戰意) 자체가 없었다.
태평천국 전쟁 이후 청군은 점차 지역별로 군벌화되었고, 군벌화된 지휘관들은 전쟁의 승리보다 자신의 부대가 피해를 입지 않는 걸 더 따졌다. 전투마다 보이는 추태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최고사령관인 이홍장조차도 군대의 소모를 꺼려 소극적인 전략으로만 일관했으니, 일선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크탕가는 만주 팔기군 출신이라 그나마 황실에 대한 충심이 두터웠다. 어려운 책무를 맡은 이크탕가는 포 100문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구련성 전면의 호산(虎山)에 전진 기지를 세웠다.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도보로 건널 수 있는 의주 수구진(水口鎭) 대안에도 병력을 배치해 조선군의 진격에 대비했다.
11월 하순이 되도록 조선군의 동태는 변함이 없었다. 요동에서 들려오는 거듭된 패전 소식과 달리, 조선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 지휘관들은 다행으로 여겼다.
“조선군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
“조선놈들은 왜인들과 달리 지금껏 대외원정이란 걸 해본 적이 없소. 방어와 달리 원정이 좀 어렵소? 그러니 쉽게 진격을 못 하는 거겠지.”
“하긴, 기껏해야 성조 황제 재위기에 아라사에 맞서 군대를 파병한 게 전부라지.”
1658년 나선 정벌 이래 조선군이 대외원정에 나선 건 전혀 없었다. 그간 간도에서 국경분쟁이 있었다지만, 대규모 원정은 전무했다.
“이중당이 조선에 화의를 제안했다고 들었소. 그 조건을 따져보는 것일지도 모르지.”
아직 조선은 이홍장의 제안에 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저놈들, 압록강이 얼어붙길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가장 현실적인 이유였지만, 청군 지휘부는 낙관론에 빠져 있었다. 전투를 피하고 싶다는 속내가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그쪽에도 병력을 배치해놨소. 조선군은 감히 나서지 못할 것이오.”
“과연 그렇군요.”
“조선군이 분수를 모르고 공격해 오면, 평양에서의 원수를 갚아줍시다.”
압록강 대안, 의주.
조선군 3개 사단, 6개 여단 4만여 명이 순차적으로 압록강 일대에 도달했다. 대부분은 평양 전투에 참여했던 병력이었다. 이들이 1차로 만주에 진격할 병력이었다.
1사단 휘하의 평안도 4여단, 함경도 5여단, 2사단 휘하의 경기도 1여단, 황해도와 강원도 12여단, 그리고 근위사단 휘하의 근위여단과 친위여단이었다.
1사단장 윤웅렬, 2사단장 한성근, 근위사단 참모장 한규설은 압록강 도하를 논의했다.
명목상 근위사단장을 겸임하고 있는 이선도 직접 의주에 도착하여 병사들을 격려했다.
“병사 제군! 북방의 추위 속에서 노고가 많다. 곧 북벌이 시작된다. 목표는 만주, 심양이다. 적도(敵都) 심양을 함락시켜 병자년의 치욕을 씻고, 열성조의 원수를 갚자!”
“와아아아!”
300년 전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에 온 이래, 왕족이 직접 국경 지대까지 온 건 처음이었다. 더욱이 그때는 파천해서 도망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북벌을 위해 왔으니 비교할 수도 없었다.
‘…… 엄청나게 춥군.’
아직 11월인데도, 북방의 추위는 굉장했다. 21세기와 비교해서 19세기는 평균 온도가 낮았고, 압록강 일대는 이미 11월이면 한겨울이었다.
가장 추운 곳인 중강진은 10월 초면 이미 강이 얼어붙었고, 하류에 면한 의주도 11월이면 결빙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동계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군의 대외 원정은 250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이래, 대규모 원정은 500년 만이었다.
이선은 의주에 오기 전, 왕실을 대표해서 위화도에서 제사를 올렸다.
위화도에 이르자 감회가 새로웠다. 좋든 싫든, 위화도는 조선 왕조가 시작된 출발점이나 다름없었다.
“요동을 정복했던 태조대왕의 혼이 그대들과 함께할 것이다.”
1388년의 요동 정벌은 위화도 회군으로 끝이 났지만, 이성계는 요동으로 진격한 적이 있었다.
1370년, 공민왕의 명을 받은 이성계와 고려군은 요동으로 진격했고, 몽골군을 무찌르고 요동성을 점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차 요동 정벌은 절반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고려는 요동을 지킬 여력이 없었다. 고려군은 다시 압록강 너머로 퇴각했다.
그 이후로, 한민족이 요동으로 진격한 적이 없었다. 1388년 최영의 2차 요동정벌은 위화도 회군으로, 1398년 정도전의 3차 요동 정벌은 무인정사(戊寅定社, 왕자의 난)로 인해 미수로 끝이 났다.
이후 500년간, 조선은 압록강을 넘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효종 대왕의 한을 갚고, 북벌의 꿈을 실현하자!”
북벌을 꿈꿨던 효종도, 젊은 나이에 복수설치의 한을 품고 죽었다.
의기는 좋았어도, 현실적으로 그때는 북벌이 불가능했다. 만주족의 청은 북경을 점령하고, 엄청난 기세로 중국 대륙 전체를 제패하여 패자(霸者)로 군림했다.
하지만 성자필쇠(盛者必衰)라, 1644년 청이 북경을 점령한 지 꼭 250년이 지났다. 이제 청은 몰락하는 국가였다. 덩치만 클 뿐, 더 이상 패권을 유지할 수 없는 나라였다.
조선은 바로 그 패권의 전환기에 북벌을 개시했다.
11월 하순, 강추위가 밀려왔다. 20일에 압록강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는 하류는 여전히 얼음이 송송 언 강물이 흘렀지만, 22일이 되자 수구진 일대의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조선군은 기만전술을 부렸다. 그 이전부터, 부교를 공사하는 시늉을 하면서 구련성과 호산을 정면 공격하려는 척했다.
하지만 조선군의 목표는 그로부터 동북쪽 50리(20km)에 있는 수구진이었다.
수구진은 의주부 관할의 진으로, 군제개편 과정에서 혁파되었다가 국경 방비 시설로 다시 세워졌다.
이 지점은 강폭이 좁고 수위가 낮을뿐더러, 추위가 밀려오면 쉽게 결빙되었다.
청군도 조선군이 이 지점을 이용해 공격하리라 예상하고, 나름 방비책을 세워 놨다. 이크팅가는 흑룡강군 6천을 수구진 대안에 배치해 조선군의 도하를 막고자 했다.
11월 23일 오전 6시.
“방포하라!”
콰앙!
조선군의 포격과 함께, 공격이 시작되었다.
포격에 이어 조선군 주력은 징발한 민간선을 이어 만든 부교로 압록강을 도하하려 했다.
구련성과 호산 방면으로 정면 공격을 해오자, 청군도 대응에 나섰다.
“반격하라! 조선군이 강을 못 건너게 하라!”
청군도 대포를 쏘며 반격했다.
청군의 반격에 조선군은 제대로 도하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대안을 향해 포격만 할 뿐이었다.
“역시 조선군은 공세를 할 능력은 못 된다!”
모처럼 승기가 보이자, 청군 지휘부는 기뻐하며 포격을 이어나갔다.
22일 밤.
북방 지리에 밝고, 청군과의 전투 경험이 많은 평안도 4여단이 수구진에 이르러 공세를 준비했다.
콰앙! 콰앙!
23일 새벽, 포격 소리를 개시로, 4여단의 공세가 시작됐다.
“전군 돌격!”
간도 월경 공격의 경험이 있는 6연대장 이범윤이 선봉에 서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 돌격을 개시했다.
“와아아아!”
4여단은 얼어붙은 강을 단숨에 돌진했다.
“조선군이다!”
“쏴라!”
타다다다다앙!
탕! 탕! 탕!
조선군의 강력한 돌격에 청군은 야포와 개틀링 건을 쏘며 저항했지만, 4여단은 희생을 감수하고 돌진을 이어나갔다.
“으아아악!”
포탄이 강에 떨어져 얼음이 깨지고 빠져 죽는 이들도 속출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픽픽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4여단 병사들은 오직 앞을 향해 돌진할 뿐이었다.
“공격! 공격!”
4여단장 김유현과 6연대장 이범윤은 오직 공격하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대규모 공세는 조선군도 처음이었고, 군사교관단에게 교육받은 대로 포격 이후 돌격이라는 방식을 충실히 따랐다.
잘 방비된 근대적 군대를 만났더라면 큰 손실을 입었겠지만, 상대는 청군이었다.
“고지가 눈앞이다! 돌격하라!”
4연대 특무대장 홍범도 참령은 모신나강 소총을 쏘며 돌진했다. 좌보귀를 저격한 공로로 참령으로 특진한 홍범도는, 압록강을 넘어서는 공세에도 앞장섰다.
“고지에 깃발을 꽂아라!”
6연대 척후 부대가 한 발 먼저 압록강 건너 대안에 태극기를 꽂는 데 성공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걸 보자, 병사들은 더욱 용기백배하여 대안을 향해 돌진했다.
조선군의 사기가 꺾이지 않는 것과 반대로, 청군은 급속히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조선군이 눈앞까지 왔다!”
이크팅가는 수구진 대안에 직계부대인 흑룡강군을 배치했다. 다른 부대와 달리 조선군에게 패배한 경험이 없으니, 굳건히 싸우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흑룡강군도 다른 군영의 사기 저하에 영향을 받았고, 그동안 후방에 배치되어 실전경험이 부족했던 이들은 전투가 개시되자 금방 흔들렸다.
“퇴각! 퇴각해라!”
청의 황룡기가 휘날리던 자리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걸 보자, 흑룡강군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퇴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