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95
– 195화에 계속 –
195화 전쟁과 정치
거듭된 패전 소식에 북경의 조정은 혼란 상황에 빠졌다. 특히 여순 함락과 학살 소식은 청 조정을 격분하게 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이홍장의 책임입니다. 이홍장을 벌하소서!”
이홍장을 탄핵하자는 상소가 빗발처럼 쏟아졌다. 이홍장이 책임은 져야겠지만, 그를 대신해서 전쟁과 외교를 지휘할 인물을 찾는 게 문제였다.
전쟁의 와중에 북경에서는 치열한 정치적 암투가 벌어졌다.
일단 외교를 전담할 총리아문의 대신으로, 10년 전 청불 전쟁의 여파로 은퇴했던 공친왕이 복귀했다.
“나는 늙어서도 패전 처리를 맡는군.”
공친왕은 씁쓸한 기분이었다. 1860년 영불 연합군에 의한 북경 함락 때에도, 공친왕은 열하로 도망친 함풍제를 대신해서 온갖 뒷감당을 맡았다. 그 공으로 동치제와 광서제 재위기 20여 년간 의정대신으로서 양무운동을 지휘했지만, 함께 손을 잡았던 형수 서태후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청불 전쟁의 책임을 지고 총리아문을 떠나야 했다.
서태후가 공친왕을 10년 만에 다시 부른 것도 결국에는 패전 뒤처리를 맡기기 위함이었다.
“황제가 되지 못한 자의 운명이란 이런 거겠지.”
공친왕은 형 함풍제보다 훨씬 자질이 뛰어났음에도, 아버지 도광제의 선택을 받지 못해 친왕으로 남아야 했다. 황제 한 사람이 바뀌었다고 청조의 몰락을 막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속도는 늦출 수 있었을 것이다.
공친왕은 씁쓸했지만, 황족으로서 위기에 처한 청조를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 이홍장의 직위를 삭탈한다. 단,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현재 맡고 있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애매한 타협책이었다. 이홍장의 직위는 박탈하되 직무는 그대로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이홍장 말고 누가 작금의 난국을 지휘할 능력이 되겠습니까? 비록 이홍장의 책임이 크나, 그를 너무 몰아세우면 안 됩니다. 공을 세우도록 하여 죄를 씻게 하십시오.”
양무운동의 동지였던 공친왕이 이홍장을 힘써 변호하여, 이홍장의 직무는 유지될 수 있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중당을 옹호하십니까? 한때 동지였다고 하지만, 그는 북양함대처럼 이미 가라앉는 배입니다. 전하께서 그와 책임을 함께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측근의 진언에, 공친왕은 고개를 저었다.
“왕조가 망하느냐 마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일세. 황상의 주위에는 용맹한 말만 늘어놓는 주전파들이 가득하네. 이런 분위기에서는 진실을 말하기도 힘들지. 그래서 이홍장이 필요하네.”
공친왕은 패전을 거듭하는 이홍장보다, 광서제 앞에서 울면서 철저 항전을 부르짖는 주전파를 더 경멸했다.
‘이길 수 있다면 싸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기지 못할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싸우는 건 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이다. 저놈들은 나라가 망해도 상관없다 이건가?’
공친왕은 이홍장처럼 현실주의자였다. 화의의 조건으로 조선 독립, 배상금 지불, 영토 할양을 감내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거듭된 패전에도 여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지금으로선 그런 조건으로는 화의를 언급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족 대신들이야, 전쟁이 끝없이 지속하여 왕조가 무너져도 상관없겠지. 작은 일본과 조선이 중국 전역을 지배할 일은 없을 터이니, 전쟁의 폐허 뒤에 새로운 한족 왕조가 수립될 수도 있다. 차라리 영토를 할양하고 빨리 종전하는 게 낫다.’
전쟁의 폐허 뒤에 만주족의 청 왕조 대신에 새로운 한족 왕조가 세워질 수 있다. 공친왕이 우려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의심스러운 건 이홍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이 전쟁으로 북경을 원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주족 측근의 우려에 공친왕은 빙긋 웃었다.
“이 전쟁으로 중당이 잃은 게 가장 많다. 지금까지 상실한 군대와 함대는 모두 중당의 것이었다.”
“이홍장이 조기 정전으로 군대를 아끼고 이를 다시 회복한다면…….”
태평천국 전쟁의 최대 공로자, 증국번이 종전 이후 자발적으로 자신의 군대를 해산시킨 것도 바로 이런 의혹 때문이었다.
“중당의 나이가 몇이라 생각하는가? 일흔둘이다. 나이가 너무 많지.”
이홍장이 20년만 젊었어도, 공친왕도 그에 대한 의혹을 저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지금 당장은, 이홍장을 대신할 만큼 무력을 가진 실력자가 없었다. 태평천국 전쟁처럼 전쟁이 장기화한다면 증국번이나 좌종당, 이홍장 같은 실력자가 또 등장할 수 있었다. 공친왕은 그런 우를 범할 생각이 없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늙은 신하는 죽음으로서 황은에 보답할 것입니다.”
이홍장은 황명을 전하러 온 칙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내심 냉소적이었다.
‘황마궤를 빼앗은 다음에는 삭탈관직이라. 다음에는 목을 내놓으라고 하겠군. 하지만 내 목을 요구하는 북경의 애송이들이 입으로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
여순 함락은 이홍장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여순 요새에 그토록 공을 들였음에도 단 며칠 만에 함락되다니. 대체 뭐 하는 놈들이란 말이냐!”
이윽고 들려온 학살 소식에, 이홍장은 분노하는 대신 기회를 모색했다.
“됐다. 서양 열강의 여론이 우리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이 기회를 이용해 종전 교섭을 논의해야 한다.”
이홍장은 공친왕과 협력하여 외교로 종전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청군이 일본과 조선에 종전을 강요할 수 없는 상황이니 서양 열강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에 중재를 타진했다. 하지만 서양 열강은 시끄럽게 떠들기만 할 뿐, 청나라를 위해 중재에 나서는 나라는 없었다. 청나라의 패배에서 이득을 찾으려는 속내가 뻔했다.
그나마 공정한 중재자를 자처하는 미국이 나섰다. 하지만 미국의 중재를 일본과 조선은 모두 거절했다.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삼국 정부 모두 종전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과 조선은 청국에 더 큰 타격을 입힌 후에, 북경 조정은 최소한 반격에 성공하여 체면을 차린 후에 종전을 논의하길 원했다.
결국, 전쟁은 1895년에도 계속될 상황이었다.
1894년 12월, 일본군 1군은 북상하여 요하 방향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만주의 혹한은 일본군에게 동계 전투의 위험성을 깨닫게 했지만, 1군 사령관 노즈 대장은 애초 계획한 대로 공세를 준비했다.
“비록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한다.”
일본군의 전략 목표는 요동 반도를 석권하고, 봉천으로 진격할 조선군과 연결하여 요하 동쪽에서 청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2군이 산동 반도를 점령하면 최종적으로 산해관을 넘어 직례에서 대결전을 벌여 북경까지 공략한다는 계획이었다.
12월 20일, 일본군은 봉천의 서남쪽 120km, 요양과 영구 사이, 사하(沙河)에 면한 전략적 요충지인 해성(海城)을 함락시켰다. 1군이 기습적으로 동북방으로 기동하여 청군의 허를 찔러, 손쉽게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해성의 함락은 청군에게 심각성을 불러일으켰다. 만주군 사령부가 있는 요양과 중요한 항구인 영구의 방위가 위태롭게 됐고, 더 나아가 요서로 가는 길까지 뚫릴 수 있었다.
“해성은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 적의 공세도 분명 한계에 도달했을 것이다.
만주군 사령관 송경은 영구와 요양 두 방향에서 출진하여 일본군을 요격하게 했다. 1군의 3개 사단은 혹한의 동계 전투에 적잖이 애를 먹고 있었다. 보급선이 길어질수록 보급도 점차 여의치 않았고, 전사자보다 질병으로 쓰러지는 이들이 훨씬 많을 정도였다.
청군은 일본군이 약화한 상황을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청군의 전쟁 수행 능력이었다.
청군의 반격을 예측한 일본군은 오히려 선제공격을 가했다.
해성을 지키는 3사단은 소수의 병력만 북방 방위를 위해 남겨 놓고, 기습적으로 영구 방향의 청군에 공세를 가했다.
“돌격!”
“기습이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청군은 또다시 패배했다. 전장에 수많은 주검을 남긴 채 영구로 급히 퇴각했다.
“해성을 지키고 요동을 완전히 확보한 후, 직례 결전을 벌이려면 2군의 지원이 필요하다.”
일본군 2군 3개 사단은 산동 반도 공격을 대비해 대기 중이었다. 1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참모 본부는, 2군에서 혼성여단을 뽑아 요동 반도 금주에 상륙시켰다.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소장 지휘 하의 혼성여단 8000명은 혹한을 극복하고 영구 남쪽의 개평(蓋平)으로 진격했다. 개평에는 견고한 진지와 청군 5000명이 수비대로 있었다.
“전군, 돌격!”
1월 15일, 혼성여단은 단 4시간의 공세로 개평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소 우직할 정도의 정면공격이었음에도, 청군의 방어는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해성과 개평의 함락은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해성은 육로에서, 개평은 해로로 청군을 감제하는 요충지였다.
이제 요동 반도에서 남은 유일한 청군의 진지는 영구뿐이었으며 이마저도 포위된 상황이었다.
송경은 어떻게든 해성을 탈환해 영구로 가는 길을 연결하고자 했다.
조선군의 진격이 봉황성 북방에서 멈추자, 송경은 봉천 방위에 필요했던 병력을 요양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1월 22일, 청군은 해성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번만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만주군의 주력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였다.
일본 도쿄.
거듭된 승전 소식에 일본 조야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대로 북경까지 진격하여 청국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자!”
“영토와 배상금을 최대한 받아낼 수 있을 만큼 받아내야 한다.”
강경한 언동을 쏟아내는 군부나 야당과 달리, 정부 인사들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대본영의 계획대로 직례 결전을 벌여 승리하고, 북경을 공격한다고 칩시다. 서양 열강이 그 상황을 절대 용인할 리가 없소. 청조의 완전 붕괴는 우리 정부의 목표가 아니오. 동맹국인 조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서양 열강의 개입을 두려워했다. 지금 단계까지는 이익을 재며 관망하고 있지만, 정말로 북경이 함락되어 청조의 안위가 위태로운 상황이 된다면 서양 열강이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현실적인 목표를 쟁취해야 하오. 원래 작전 목표였던 요동, 산동, 팽호, 대만에 대한 공격만 이어나갑시다.”
“특히 이 전쟁으로 대만을 확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종전 협상이 이뤄지기 전까지 대만에 교두보를 확보합시다.”
정부를 이끄는 핵심 3인방인 이토와 무쓰 외무대신, 마쓰가타 대장대신은 대본영에 직례 결전 대신 팽호 열도와 대만에 대한 공격을 요구했다. 육군은 대만보다 중국 본토에서의 싸움을 원했지만, 해군은 팽호와 대만에 더 관심이 많았다.
대본영은 곧 예정된 2군의 산동 작전이 완료되는 대로, 일본 본토에 남은 병력인 근위사단과 후비사단을 동원해 팽호와 대만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정부와 달리 북경 진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은 군부는, 산동 작전이 완료되면 직례 결전을 준비하도록 했다. 1군과 2군을 모두 동원하여 요동과 산동 두 방향에서 북경으로 진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전 병력을 중국 침공에 사용하겠다는 의미였다.
조선 한양.
1895년 1월 26일은 음력으로 을미년 정월 초하루였다. 전쟁 중이었지만, 새해를 맞이하여 한양은 축제 분위기였다. 거듭된 승전은 사람들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만청 오랑캐 놈들, 정말 별거 아니군.”
“아아, 올해는 마침내 북벌을 완수할 수 있겠어.”
“심양을 점령해 열성조의 원수를 갚아야지!”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수복해야…….”
여론의 들뜬 분위기와 달리 조선 정부 역시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과 차이가 있다면 군부 또한 온건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정부가 확실히 군부를 통제하고 있었다.
동계 공세는 현실적 이유로 중단되었다. 심리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청군의 저항이 갈수록 강해졌고, 혹한의 추위에 만주에서 전투를 이어나가는 건 힘들었다.
“북벌군은 사실상 조선군의 전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귀중한 병력을 소모전으로 희생시킬 수 없습니다.”
요양과 봉천에 대한 공세를 아예 멈춘 건 아니었다. 2월 말에서 3월 초로 계획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청군의 전력이 최대한 소모되었을 때,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얻는 게 목표입니다.”
군무대신 이선의 설명에 정부와 군부 인사들도 모두 동의를 표했다.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 전쟁 그 자체에 매몰되지 말고, 정치적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이선은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의 전쟁론을 떠올렸다. 이선은 특히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란 금언을 확신했다.
국내정치는 전쟁으로 확실히 목표를 달성했다. 문제는 국제 정치였다. 서양 열강의 행보가 중대한 변수였다.
이선은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를 새로운 파트너로 선택했다. 러시아와 종전 후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을 찾아 베베르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