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196
– 196화에 계속 –
196화 전쟁과 정치 (2)
“어서 오십시오. 조선의 승리를 축하드리라는 황제 폐하의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베베르는 공사관을 찾은 이선에게 니콜라이 2세의 축하를 전했다. 러시아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비공식적인 축하였지만, 이선은 웃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아직 승전까지 갈 길이 멉니다만, 황제 폐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주십시오. 조선의 승전에는 러시아의 공도 큽니다.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이 뛰어난 성능을 보였지요.”
러시아의 최신 제식소총, 모신-나강 M1891은 조선군 일선 부대에서 사용되었다. 개발 이후 실전에 투입된 첫 사례였다.
모신나강은 조선 병사들에게서 호평을 받았고, 승리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 러시아 관전무관단도 총의 성능에 만족해 했다.
“조선에 도움이 된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황제 폐하의 통치가 안정기에 접어 들어서 다행입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즉위한 지 3개월, 니콜라이 2세는 그럭저럭 통치에 적응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을 이끄는 각하의 분투를 보고 큰 영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선은 내심 기뻤지만, 겸손하게 대응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나는 그저 내각의 각료일 뿐이고, 폐하께서는 1억 5000만 신민을 책임지는 전제군주이니 어찌 그 무게가 같다고 하겠습니까.”
덕담을 주고받은 이선과 베베르는 외교적 현안을 논의했다.
“전선이 만주로 확대되었으니, 앞으로 러시아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는 만주에 특수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선은 외교적인 미사여구를 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실로 그렇습니다. 러시아의 극동 영토는 만주를 에워싸고 있으니 특수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베베르도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을 감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러시아에 당장 필요한 건, 러시아 극동 영토를 빙 돌아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아니라, 북만주를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철도가 아니겠습니까?”
북만주 철도, 이른바 ‘동청(東淸) 철도’였다. 러시아는 동청 철도 부설 계획을 하고 있지만, 청의 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정확하십니다.”
“내가 러시아와 극동, 철도에 모두 관심이 많으니 모를 수가 없지요. 하하하.”
“하하, 과연 그렇군요.”
이선은 웃음을 거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극비입니다. 오직 공사와 황제 폐하만이 알았으면 합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각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조선은 종전 이후 러시아가 북만주 철도를 부설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청 조정이 동의하겠습니까?”
“러시아가 청국에 은혜를 베푼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1860년처럼 협상을 중재라도?”
영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과 조약 중재로 러시아는 연해주를 획득할 수 있었다.
“1860년과 달리, 러시아가 협상을 중재하면 일본은 물론이고 영국도 못 받아들일 겁니다.”
러시아가 나서면 영국도 나설 게 뻔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신경질적으로 받아들이는 영국이 개입에 동의할 리 없었다.
“공사께 묻겠습니다. 만약 일본이 포트 아서(여순)와 요동 반도 전역을 할양받고자 한다면, 러시아는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동의하기 어렵지요.”
러시아는 부동항이자 좋은 항구의 입지를 가진 여순항에 은밀한 관심을 두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점령에 동의할 리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 삼국간섭이 등장한 이유였다.
“일본은 종전의 대가로 요동 반도와 대만, 팽호 열도를 요구할 예정입니다.”
현재로서는 추정이지만, 이선은 일본이 이대로 요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대만은 상관이 없습니다만, 요동 반도 할양은 조선의 독립을 침해하고 영구적으로 청국의 수도인 북경을 위협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선의 생각은 베베르와 정확히 일치했다. 현시점에선 일본은 청에 맞선 동맹이라지만,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모른다. 일본이 요동 반도를 차지한다는 건 조선에 걸리적거리는 일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청국은 물론이고, 전시 동맹인 조선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본 군부는 강행하려고 할 겁니다.”
“일본이 부당하게 영토 확장을 노린다면, 러시아의 개입이 필요하겠군요.”
이선은 빙긋 웃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나는 일본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과대한 요구를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러시아의 우정 어린 조언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염두에 두겠습니다. 본국에 보고하고, 동맹국인 프랑스와 함께 대처를 준비하겠습니다.”
“조선은 일본과 달리 과도한 요구를 할 생각이 아닙니다. 조선을 억압하고 전쟁을 도발한 청국에 배상금을 요구하고, 재침(再侵)을 막을 완충지대를 형성하고자 합니다.”
“어디가 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선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만강 이북, 간도라 불리는 조선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 그리고 압록강 이북, 완충지대가 될 지역. 이 지역은 모두 조선의 역사적인 고토입니다. 동양 평화를 위해서도, 러시아를 위해서도 조선이 확보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베베르는 이선이 할양받길 원하는 지역을 공개하는 이유를 파악했다. 러시아의 동의를 얻는다는 의미였다.
“오늘 각하께서 조선과 러시아의 미래를 위하여 중요한 말씀들을 해 주셨습니다. 본국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현명하신 분이니 좋은 판단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예, 그리하실 겁니다. 공개적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만, 폐하께서도 조선의 승전을 기원하시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의 호의에 보답할 날이 있을 겁니다.”
이선은 공사관에 들고 온 선물을 꺼냈다.
“중요한 대화도 끝났으니, 가볍게 한잔하시지요. 바다 건너온 보르도 와인입니다.”
“하하, 이런 귀한 것을. 감사히 받지요.”
이선과 베베르는 웃으면서 술잔을 부딪쳤다. 와인의 붉은색은 마치 핏빛처럼 보였다.
“이는 러시아 제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이선의 예상대로, 러시아는 반응을 보였다.
조선과 이선에 대한 니콜라이 2세의 개인적인 호감은 차치하고, 러시아는 조선이 청국과 일본 사이에서 균형을 잡길 희망했다. 러시아와 영토분쟁이 있어 경계하는 청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은 러시아에 우호적인 나라였다.
조선이 지금처럼 약소국이 아니라 견실한 중견국으로 성장해 러시아와 우호를 유지하고, 청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면 바라던 바였다.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알렉산드르 3세와 달리, 니콜라이 2세의 새로운 러시아는 만주에 진출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만주를 요구할 역사적, 정치적 근거가 없으니 만주와 깊은 역사적 연원이 있는 조선을 파트너로 삼을 수 있었다.
이선은 이를 어필하였고, 러시아는 이해했다.
러시아는 은밀히 극동군 전력을 강화했다. 육군을 추가로 파병하고, 지중해에 머무르던 군함을 태평양함대로 급파했다.
동맹국인 프랑스와도 극비리에 논의하여, 동아시아 삼국 전쟁의 종전에 외교적 대비를 하였다.
공세를 일시적으로 멈추고 있는 기간 동안, 조선은 점령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점령지 안정에 최선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필요한 식량과 물자는…….”
조선은 현재 압록강 이북으로 봉황성까지, 두만강 이북으로 북간도 일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정예군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압록강 도하작전과 달리, 두만강을 넘은 부대는 5연대 일부와 변계경무서 순검, 예비군과 의용군으로 구성된 2선급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북간도를 점령했다.
길림장군은 인구 대부분이 조선인인 북간도를 지킬 이유를 못 느끼고, 간도를 방어하던 청군 국경부대에 길림으로 퇴각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그냥 퇴각하는 건 아니었다. 만주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야 작전의 하나로 모든 식량과 물자를 빼앗고, 조선인 주민들이 사는 가옥과 농토를 불살랐다.
“야, 이 개자식들아! 모든 걸 다 뺏고 태워버리면 우리는 겨울을 어떻게 보내란 말이냐!”
“강 건너 조선놈들에게 받으면 될 거 아니냐? 네놈들이 조선의 첩자라는 걸 모를 것 같으냐?”
농민들의 항의에 청군 통역이 위협적으로 쏘아붙였다.
“조선과 내통하는 네놈들의 목을 모조리 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황은에 감사하란 말이다.”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청군이 조선인들을 죽이지 않는 건 조선군이 보복하는 걸 우려해서였다.
“우리가 이대로 도망친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곳은 대청의 영토이고, 일시적으로 후퇴하나 반드시 되돌아올 것이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엄포를 놓던 청군이었지만, 물자를 약탈하고 도망치는 마적 떼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북간도의 조선인들은 조선군의 진주를 열렬히 환영했다.
“대조선국 만세!”
“해방군 만세!”
북간도에 진주한 조선군은 전투 없이 점령에 성공하고, 진주를 환영하는 동포들을 보며 기뻐했다.
하지만 곧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되놈들이 모든 걸 다 쓸어갔습니다. 당장 겨울을 나는 게 걱정입니다.”
“제발 먹을 것을 주십시오. 어른들은 그렇다 쳐도, 아이들을 굶길 수야 없지 않습니까?”
북간도 점령지를 관할하게 된 함경북도 관찰사 이중하는 보고를 받자, 즉시 조처를 한 후 한성을 향해 지원을 요청했다.
“일단 진주군의 군량을 풀고, 함경도의 식량을 공출하여 간도 동포들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니, 정부의 지원을 바랍니다.”
조선 정부는 점령지의 빈곤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았다.
점령지에 민정청(民政廳)을 설치하고, 조선의 관리들이 파견되었다. 식량을 배급하고 주거를 확보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 줄을 서시오! 이는 조선국에서 온 귀중한 식량이오. 대군주 폐하의 성은이자, 어려운 상황에서도 동포들을 돕고자 하는 조선국민의 성의를 잊지 마시오.”
“참으로 감읍할 일입니다.”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그렇게 포장은 했지만, 사실 조선국민의 동의를 얻은 일은 아니었다.
정규군과 예비군, 의용군을 합쳐 10만이 넘는 군대가 편성되고, 5만의 북벌군이 국경 너머에 주둔했다.
군대에 군량과 각종 물자를 대기도 쉽지 않은 일이라, 조선 본토에서는 점령지에 이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푸념도 있었다.
“본토에서도 식량이 모자란대 강 건너 점령지까지 공급할 이유가 뭔지.”
“우리 군인들 먹일 군량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수출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조일 공수 동맹에 따라, 전쟁에 소요될 군비 8할은 재정 여건이 훨씬 넉넉한 일본이 부담하기로 약속했다. 조선군의 전쟁비용은 상당 부분 일본이 부담하고 있었다.
조선이 부담하기로 한 2할은 주로 군량과 각종 물자에 할당되어 있었다. 상당한 물자가 일본으로 수출되어 일본군용으로 쓰였다.
1894년도에 수확한 조선 13도의 식량은 대부분 군량으로 확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점령지 관리에 들어가니 조선 본토 백성들의 푸념이 나올 만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 점령이 아니라 영구 점령을 기도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민정청을 설치한 지역은 향후 종전 조약에서 할양을 요구할 지역들이었다.
“본토와 점령지의 구분은 의미가 없소. 조선군이 진주한 곳은 일시적으로 점령한 청국 영토가 아니라, 장차 대조선국의 영토가 될 곳이오.”
지금 당장 비용이 많이 들어가더라도, 아까울 게 전혀 없었다.
“우리가 전쟁에 소요하는 모든 비용을, 아니 그 수십 배를 청국이 배상금으로 토해내게 될 거요. 그러니 아까워할 것 없소. 청국의 돈으로 점령지를 관리하게 되는 셈이니까. 지금 당장 힘들더라도, 참고 견디도록 합시다.”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일부 불평불만이 있더라도, 전쟁에 대한 조선 국민의 지지도는 절대적이었다. 승리가 거듭되고, 승전이 목전에 다가오니 더욱 그랬다.
전쟁의 와중에도, 정치는 활발하게 돌아갔다. 아니, 오히려 전쟁 중이므로 정치가 더욱 중요했다.
국내정치적으로 전쟁을 통해 국내정치의 문제가 일시적으로 모두 해결되었고, 국민적 통합을 끌어냈다.
국제정치적으로도 조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는 곧 결실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선은 전쟁 그 자체에 매몰되지 않았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며 펜으로 하는 대신 총칼로 하는 정치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금언을 충실히 이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