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
– 2화에 계속 –
2화 회귀(回歸)
기묘년(己卯年) 음력 12월, 서력 1880년 1월.
대조선국이 개국한 지 488년, 금상(今上)의 치세는 16년째가 되는 해였다.
조선은 국가의 활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며, 점증하는 대내외의 압력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제국주의 시대로, 동방의 고요한 나라 조선을 향한 열강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전례 없는, 미증유의 위기였다.
하지만 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는 드물었으며,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국제 정세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이는 더욱 드물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감하게 개혁의 칼날을 들이밀며 흔들림 없이 국가를 이끌어나갈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시대의 부름에 정확히 응답할 지도자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다.
조선국 한성.
음력 12월의 첫날, 일식이 있었다.
일식은 본래 지극히 자연스러운 천문 현상이나, 태양은 곧 임금을 상징하였다.
태양이 그 빛을 잃는 것은 곧 제왕이 그 본래의 빛을 잃는 것과 통한다고 여겼기에, 궁중에서는 구식의(救食儀)가 치러진다. 임금과 제관들은 의식을 치르며 국가의 길흉화복을 빌었다.
보통 궁중의 구식의는 형식적으로 치러지지만, 올해만큼은 심각한 분위기였다.
세자, 즉 임금의 아들, 국본(國本)의 환후가 위중했던 것이다.
“군 대감께서는 어떠신가? 환후에 차도가 있으신가?”
“그게, 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어허, 대체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동궁전(東宮殿)에 이어 완화궁(完和宮)까지…….”
혀를 차던 사내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세자의 환후는 아직 공공연히 떠들 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이는 국가의 계승과 관계된 일이었다.
“군 대감은 반드시 쾌차하셔야 하네! 운현궁(雲峴宮)께서 완화궁을 늘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사내의 압박에 의원이 고개를 조아렸다.
“대감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을 뿐이니, 곧 쾌차하실 겁니다. 몸이 허하고 기력이 부족해 잠시 의식을 잃었을 뿐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의원은 호언장담하면서도, 속으로는 혀를 내둘렀다.
왕자의 환후에 대해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데도, 도통 일어나질 않았다. 그래도 병세가 보이지 않으니, 막연히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판국이었다.
“그래, 좋네. 자네 말을 믿어 보지. 군 대감이 쾌차하는 게 자네 일신에도 좋을 게야. 자네의 길흉화복이 완화궁과 함께한단 말이야, 알겠나?”
사내의 경고에 의원은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인, 최선을 다해서 운현궁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뒤.
의원의 호언장담대로, 왕자는 깨어났다.
“군 대감께옵서 의식을 찾으셨습니다!”
“오오!”
열 두엇 된 소년의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고, 감겼던 눈에 다시금 광채가 돌았다.
“천지신명께서 아직 나를 저버리지 않으셨구나! 내 어찌 마음 졸였는지…….”
아직 젊은 날의 미모가 사라지지 않은 여인이 아들의 회복 소식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여인이 눈물을 흘리자, 가내의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왕자의 회복을 축하했다.
주변 사람들의 감격과 달리 깨어난 소년은 지극히 무덤덤했다.
‘뭐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야.’
소년은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어나 보니 웬 한옥에 있고,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위에서 웃거나 울고 있다.
‘무슨 사극이라도 찍고 있는 거냐?’
“군 대감, 기체(氣體)는 어떠하온지요?”
소년은 목소리가 나온 곳을 쳐다보았다. 중년 사내가 빙글거리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되물었다.
“……여기가 어디요?”
순간 주위가 술렁거렸다.
“이 무슨 소리인가? 여기는 그대의 집이오.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어서 이 어미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시오?”
‘……어미? 내 어머니라고?’
갑자기 어머니라니,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년은 더더욱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누군가?”
주위가 더욱 술렁거렸다.
“대, 대감…….”
“아니, 이 무슨…….”
모두가 억장이 막혀 제대로 말을 못 잇는데, 소년은 더욱 환장할 지경이었다.
“으윽!”
갑자기 극심한 두통이 소년의 머리를 덮쳤다. 소년이 비틀거리며 머리를 베개에 처박자, 비명이 흘러나왔다.
“군 대감!”
“와, 완화군!”
“어서 대감의 환후를 살피지 않고 뭐 하는 게야!”
“예, 예! 대감의 안정이 중요하오니 어서 주위를 물려 주시옵소서!”
한바탕 소란이 불어닥친 후에야, 소년은 정신을 잃고 편히 잠들 수 있었다.
“…….”
소년은 자시(子時)가 넘어, 모두가 잠든 새벽에 깨어났다.
곁을 지키던 사람들도 밤이 깊어지자 모두 자리를 비웠고, 밖에서 시립(侍立)하던 하인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소년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정체를.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 올해 열두 살.
임금의 맏아들이자, 영보당(永保堂) 이 씨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후손이 귀한 왕실에서, 관례(冠禮)까지 치를 정도로 장성한 왕자의 존재는 더욱 소중했다.
‘그러니까, 내가 완화군 이선이라 그런 말이지?’
이선우, 아니 이선은 황당했다. 어이가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이건 꿈이야. 말도 안 돼. 그놈의 개화기 외교 문서들 계속 들여다보더니 이딴 꿈이나 꾸고 있는 거지?’
이선은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해 보려 했다.
그러나…….
‘꿈이라면 너무 생생하잖아. 대체 왜 내가 완화군 이선으로서의 삶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거지?’
완화군 이선의 기록은 지극히 적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는 태어남, 관례, 죽음과 장례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조부인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특별히 장손을 총애하여 세자를 세우고 싶어 했다든지, 계모인 중전 민 씨가 완화군 모자를 질투하고 미워했다는 건 검증되지 않은 야사 영역이다.
단순히 꿈을 꾸는 것이라면, 역사학, 특히 국가 간의 외교사를 공부한 그가 완화군 이선의 세세한 삶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완화군 이선으로서 살았던 12년의 기억이 생생하게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현대인으로 살았던 32년의 기억과 완화군 이선의 기억이 일치하면서, 그는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두 개의 영혼이 14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하나의 육체로 합쳐졌다 이런 거냐? 그것참 눈물 나게 낭만적이네.’
말도 안 되는 비과학적 전개에 한동안 현실을 부정하던 이선은, 새벽닭이 울고 동이 틀 무렵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 뭐 좋다 이거야. 서삼릉에 잠들어 있던 완화군의 영혼이 뭐 어떻게든 공명해서 내가 이 시대에 왔다고 치자.’
이제 과학적인 해석 따위는 포기한 상황이었다. 무덤에서 들려왔던 목소리, 그게 완화군의 목소리였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완화군이 되어 있다니.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이 현실로 일어나자 따지고 싶은 기운도 없었다.
‘근데 왜 하필 완화군인데?!’
왕자, 특히 왕의 장자라는 신분은 더없이 귀중한 존재다. 비록 서자라 할지라도, 적자가 없다는 가정하에 왕위를 계승할 유력한 후보이기도 하다.
…… 서장자(庶長子)이자, 적자(嫡子)인 세자의 이복형이라는 애매한 위치가 아니라면 말이다.
임금, 즉 아버지인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슬하에는 적자인 세자 이척(李坧), 즉 순종(純宗)이 있다.
적자가 있는 이상, 서자는 맏이라 할지라도 찬밥 신세다.
임금의 서장자, 차기 임금의 이복형.
왕자로서 존귀한 대우는 받겠지만, 위태로운 처지였다. 임금과 조정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면 추대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하물며 운현궁의 기대와 중궁전의 경계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본인이 아무리 납작 엎드려 있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세자의 형, 완화군의 존재는 중전에게 더없이 거슬리는 존재였다.
흥선군의 차남 이재황(李載晃)이 즉위하여 한 살 위인 여흥 민문의 여식 민자영(閔玆暎)과 국혼을 치렀다.
하지만 소년 임금의 마음은 중전이 아닌 아홉 살 연상의 상궁, 영보당 이 씨에 빠져 있었다.
무진년(1868), 임금의 나이 열일곱에 왕자 선이 태어났고, 이는 왕실에 큰 경사였다.
순조 이래 왕손이 귀해져 대통이 끊어지고, 먼 방계의 후손까지 양자로 데려와 왕위를 계승해야 했던 조선 왕실에 왕자의 탄생은 더없이 큰 경사였다.
임금의 양모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 씨와 생부인 흥선 대원군은 왕자의 탄생에 크게 기뻐하였고, 왕실의 관심은 오직 왕자 이선에 집중되었다.
대원군이 이선을 총애하여 직접 운현궁에서 양육을 맡고, 세자 책봉까지 추진한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였다.
세자 책봉 운운은 뜬소문에 불과했지만, 3년 넘게 독수공방하며 소외되었던 중전 민 씨에게 굴욕과 인내의 시기였다.
‘음, 그래. 조강지처를 한동안 내팽개친 아버지가 잘못했네. 근데 그게 아이 잘못은 아니지 않나?’
계유년(1873), 고종의 친정(親征) 이후 부자 관계였던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관계는 정적(政敵)으로 돌변했고, 이를 부추겼다고 여겨진 중전 민 씨와 대원군의 관계는 더더욱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에 반비례해 임금과 중전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
갑술년(1874), 왕자 척이 태어났다.
신미년(1871)에 왕자의 형이자 중전의 맏이인 대군이 생후 4일 만에 죽었는데, 왕실에서 다시 적자가 탄생하니 더욱더 큰 경사로 여겼다.
임금과 중전에게는 친정을 기념하는 하늘의 선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원자가 채 돌이 되기 전, 세자 책봉이 강행되었다. 보통 세자 책봉이 유년기를 지나 7세 내외에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례없이 빠른 책봉이었다.
이는 그만큼 중전이 경쟁자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의미였다.
세자 책봉 얼마 후, 완화군으로 봉해진 이선은 8살의 나이로 궁궐 밖으로 내몰렸다.
세자 이외의 왕자가 궁궐 밖에 나가 사는 게 법도이긴 했으나, 적어도 관례를 치른 10살 이후에 나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빠른 출궁이었다.
영보당 이 씨는 왕자를 낳은 승은 상궁에게 내리는 내명부의 품계조차 받지 못한 채, 궁궐에서 밀려났다.
일반적으로 왕자를 낳은 상궁은 후궁의 첩지를 내리고, 종4품 숙원(淑媛)의 지위는 내리는 게 관례였다.
이조차 무시당한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계모에, 버림받은 어머니, 무관심한 아버지. 뭔 내가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냐?’
평범한 가정 내의 문제라면 그럭저럭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국가의 일이었다.
대원군 추종 세력과 중전의 가문인 여흥 민씨는 서로를 증오했고, 그 갈등은 단지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10년간 심혈을 기울였던 대원군의 정치가 하나씩 뒤엎어지면서 그 추종 세력은 점차 과격해지고 있었고, ‘국태공의 은혜를 저버리고 잘못된 정치를 하는’ 임금과 중전에 대한 불평도 커지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반역을 꾀한다면, 추대 대상 1순위가 누구겠어?’
말하나 마나, 임금의 장자이자 대원군이 총애하는 손자보다 더 좋은 후보는 없었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뜬금없이 현대인의 기억과 왕자로서의 기억을 한 몸에 지니고 살게 된 완화군 이선의 목표는 소박했다.
1880년대, 이 격동의 시대에, 일단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