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04
– 204화에 계속 –
204화 강화 협상
4월 15일. 청국 흠차대신 이홍장이 사절단을 거느리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전권부사에는 주일 공사를 지낸 양자 이경방, 수행원으로 주조선 상무위원을 지낸 마건충, 오정방, 외교 고문관으로 전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등 다수의 인원이 동참했다.
이홍장은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첫 해외 방문을 했지만, 하필 패전을 처리해야 하는 불운한 처지였다.
청국 사절단이 도착하여 여장을 푼 다음 날 국서 교환이 예정돼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 이선과 김옥균은 각국의 국서를 들고 나왔다.
회의장은 시모노세키의 고급 식당인 춘범루(春帆樓)로 지정되었다. 동아시아 3국의 운명을 결정할 자리였다.
“원로에 순풍을 만나 무사히 도착하셨는지요.”
이토의 덕담에 이홍장이 웃으면서 답했다.
“덕분에 순풍을 만났습니다. 각하의 성의로 훌륭한 공관을 준비해 주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곳이 워낙 후미진 곳이라 귀빈의 격에 맞는 공관이 없어 송구스럽습니다.”
이홍장과 청국 사절단의 숙소로 제공된 것은 춘범루 인근의 사찰이었다. 이홍장은 동양풍의 숙소가 제공된 곳에 만족감을 표했다.
의례적인 이야기가 오간 후 삼국 대표는 국서를 교환했다. 청국 황제, 일본 천황, 조선 대군주의 명의로 된 국서가 확인됐다.
각국 전권사절은 모두 영어가 유창한 관계로 회의의 공용어는 영어로 지정되었다. 물론 외교적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 통역도 배치되었다.
“우리 세 나라가 전쟁을 그치고 정의(情意)가 다시 통하여 앞으로 영원히 화친을 이루면 동양 삼국에 이익이 많을 것입니다.”
이토의 외교적 언사에 이홍장이 화답했다.
“동양에서 우리 삼국은 가장 가깝고, 서로 소통 가능한 한자를 사용합니다. 근래 비록 다투게 되었으나, 만약 계속해서 원수로 지내면 아국의 큰 손실이오, 귀국도 결코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서양 사정을 보면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이웃 나라와는 우호적으로 지냅니다. 우리도 서양의 사례를 참고하여 동양 평화를 이룩합시다. 동양 삼국의 관계가 악화되면 우리 황인은 계속 서양 백인에게 굴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홍장은 갑자기 동양 연대론을 들고 나왔다. 이선은 그의 노림수가 짐작되었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중당의 말씀이 꼭 제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니 10년 전에 제가 중당께 개혁을 권한 바 있습니다만, 어찌하여 오늘까지 이루지 못한 것입니까?”
공교롭게도 이 자리에 모인 이홍장, 이토, 이선은 10년 전 천진 회담에서도 조선 중립화를 결정한 당사자였다. 그때만 해도 청국이 이렇게 몰락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귀국은 저와 만난 후 개혁을 이루어 오늘과 같이 발전했으니 진실로 부럽습니다. 우리 청국은 구습에 젖어 10년 간 변화한 바가 없으니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이홍장은 일본에 이어 조선의 개혁에도 찬사를 보냈다. 자신을 깎아내리고, 적국인 일본과 조선에 찬미를 보내는 이홍장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어조는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유창하고 호쾌했다. 상대국의 동정을 사는 동시에, 패전의 굴욕을 감추려 했다. 과연 능변가다웠다.
이선은 냉정한 시선으로 이홍장의 장광설을 듣고 있었다. 이홍장이 저리 장광설을 늘어놓는 건 본심이 아닐 터였다.
과연 이홍장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일본과 조선은 개혁을 향해 국가가 일치단결하여 오늘날 승리자가 되었지만, 청국은 어떤가. 북양함대의 예산이 이화원 조성으로 유용되기도 했지. 나는 끊임없이 태후와 황제의 눈치를 봐야 했다. 하지만 이토와 완화군에게는 그런 장애물이 없었다. 그게 바로 승리와 패배를 가르는 경계선이 된 것이다.’
이날은 국서 교환만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회담은 4월 17일부터 시작되었다.
이홍장이 선 휴전 후 협상을 제안하자, 이토는 일본의 휴전 합의안을 전달했다.
“강화 협상이 빨리 이루어지면, 자연히 휴전도 체결될 것입니다.”
휴전 조건을 살펴본 이홍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1. 휴전의 대가로 천진·대고·산해관을 점령한다.
2. 현재 이 지역에 주둔 중인 청군을 철수시키고, 군수품을 인도한다.
3. 천진과 산해관 철도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4. 휴전 중의 군비는 모두 청국이 부담한다.
—–
‘진짜 총칼 든 강도구만.’
일본의 요구사항이 조선과 미리 합의한 사항보다 더 강경해지자 이선은 냉소를 흘렸다.
휴전의 대가로 군부가 요구한 사항을 정부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일본과 조선이 점령하지 못한 지역까지 내놓으라니, 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쟁을 멈추려는 건 삼국에 모두 이익이 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휴전은 일방적으로 귀국에만 유리하지요. 마땅히 우리는 세 곳을 점령해 담보로 하여 이익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곳은 황제가 계신 북경에 인접해 있으니, 청국의 핵심 요지입니다.”
“휴전 동안만 점령하는 것이니, 강화가 이루어지면 자연히 철수할 일입니다.”
이홍장은 거듭 조건 없는 휴전을 호소했지만, 이토는 강경하게 나왔다.
“청국이 조선의 독립을 침해하고 전쟁을 개시하였으니,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선의 자주독립이라는 전쟁 명분은 나 역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구는 분명히 전쟁 명분을 초과한 것입니다. 애초에 이 전쟁은 내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홍장이 눈짓을 보내자, 마건충이 문건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는 조선 국왕이 대청 황제 폐하께 호소한 글입니다. 읽어 보시지요.”
——
조선국왕 신(臣) 이형이 황상께 엎드려 아룁니다.
근자에 이르러 소방(小邦)이 대국에 맞서고 있는 것은, 결코 신의 본의가 아닙니다.
임오년 이래 일부 왕족과 강신(强臣)들이 왕권을 침해하고, 국사를 멋대로 농단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제후국의 본분을 벗어난 건, 이들 강신의 강요였지 결코 신의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이제는 일본이나 서양과 연대하여 대국과 맞서 싸우려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부디 황상께서는 밝게 봐 주시어, 전쟁의 위기에 내몰릴 조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의 군민은 결코 대국과의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대국에 반역하는 일부 강신만 조정에서 제거된다면, 평화는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황상의 너그러운 성단을 갈구하는 바입니다.
광서 20년 조선국왕 이형
——
이선은 임금이 보냈다는 국서를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김옥균과 조서 사절단들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청국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내건 전쟁 명분이 바로 임금의 요청이었다. 하지만 임금은 강력하게 부정했고, 조선도 청국의 선전을 일찌감치 분쇄했다. 청국의 선전대로 ‘역적을 토벌하여 조선의 정치를 바로 세운다’는 요구에 응한 조선인은 없었다.
“조작이군요.”
이선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찌 진위를 따지지 않고 조작을 운운합니까?”
“대군주께서는 이미 청국에 맞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만천하에 선언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서한에 어보가 찍혀있습니까? 혹은 정식 외교문서가 되기라도 합니까? 설마 이게 전쟁 명분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 문서가 진짜 임금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쟁 명분을 떠넘기려는 시도는 분쇄해야했다.
이토와 무쓰도 서한을 보고 나서 냉정하게 말했다.
“이는 정식 문서가 아닙니다. 논할만한 사항이 아닙니다.”
“문서의 진위는 조선 국왕에게 물어보면 알 것입니다.”
“그건 이 회담의 쟁점이 아닙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전쟁 명분을 떠넘기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이홍장은 결국 이홍장은 휴전을 포기했다.
“일단 본국에 상의는 해보겠지만, 귀국의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조속한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1주일만 시간을 주었으면 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3일 이내에 답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3일 후에 뵙지요. 하지만 강화를 논할 때는 이렇게 각박하게 굴지 말았으면 합니다. 향후 삼국의 우호관계를 생각하고, 대청의 체면도 고려해주었으면 합니다.”
이홍장은 간곡히 부탁했으나, 이미 ‘체면’을 고려할 시기는 지난 상황이었다.
3일 후, 협상이 재개되었다.
“휴전은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조속히 종전 조약을 체결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건 우리도 바라던 바입니다. 그렇다면 협상안을 전달하겠습니다.”
조일 동맹이 합의한 협상안 초안이 청국 사절단에게 전해졌다.
——
1. 청국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을 명확히 승인한다. 조공과 같은 독립을 침해하는 행위는 영구히 폐지한다.
2.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전하고,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청국은 다음과 같은 지역의 영속적 소유권과 통치권을 양도한다.
a. 이른바 간도라 불리는, 길림성의 조선인 다수 거주 지역.
b. 압록강 이북의 성경성 지역. 안동현, 봉황성, 관전현, 수암주, 요양주.
c. 성경성 남부 지역. 서쪽으로는 요하, 북위 41도와 동경 122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만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요동 반도와 그 부속 섬.
d. 대만 섬과 그 부속 열도.
e. 팽호 열도에 속하는 모든 섬.
a와 b는 조선에, c와 d와 e는 일본에 할양한다.
3. 청국은 침략전쟁에 책임을 지고, 군비 배상금을 지불한다. 일본에 총 3억 냥의 고평은, 조선에 1억 냥의 고평은. 상기 금액은 5회에 걸쳐 납부한다.
——
협상안은 11항까지 이어졌지만, 이홍장은 3항까지 읽다가 중단했다.
“가혹하오, 너무 가혹하오! 내가 외교를 여러 번 해 보았지만, 이렇게 지독한 요구는 처음 봤소.”
이홍장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진심으로 경악한 듯했다. 손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조일 동맹의 요구는 그의 생각을 초월할 정도로 가혹했다.
“백번 양보해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전하기 위해 조선인 다수 거주지역과 완충지대를 할양한다고 쳐도, 일본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이와 같은 가혹한 요구를 한단 말입니까?”
이홍장의 항변에 이토는 냉정하게 답했다.
“조선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우리 일본 군인들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전비도 엄청나게 많이 들었지요. 청국이 마땅히 보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내걸어야 협상이 이뤄지는 거지요. 이건 일방적인 징벌이 아닙니까.”
이홍장은 고개를 돌려 이선을 바라보았다. 이선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선은 이와 같은 조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성경성은 대청의 고도인 봉천이 있는 곳입니다. 그 영토를 떼어간다는 건 청국 황실과 조정, 인민을 누대의 원수로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천하대세를 깊이 고려해서 논의했으면 합니다.”
“조일 두 나라는 이미 깊이 고려해서 제안한 바입니다.”
마침내 이홍장은 자리를 박찼다.
“내가 아무리 전권을 맡은 흠차대신이라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중요한 사항은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조정에 상신하겠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와 그 어떤 대신도 이러한 조건은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현명한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만약 협상이 결렬된다면, 결국 전투는 직례로까지 확전되겠지요. 그건 우리도 원치 않는 바입니다.”
이토의 은근한 협박이었다. 청국 사절단은 일본과 조선 대표단을 한껏 노려보고 회담장을 빠져나왔다.
협상이 결렬될 때까지, 이선과 조선 대표단은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홍장과 청국 대표단은 조선이 일본에 외교를 위임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아니었다. 이선의 침묵은 ‘굿 캅, 배드 캅(good cop, bad cop)’ 전략이었다.
‘악역은 일본에 모두 떠넘기고, 조선은 점잖게 중재하는 척하며 이익을 누려볼까.’
조선의 침묵에 과연 반응이 있었다. 일본의 지나친 강경 자세에, 이홍장은 조선의 의견을 알고 싶어 했다.
이홍장은 이선에게 ‘개인적인’ 회동을 요청했다.
일본은 청과 조선이 별도의 합의를 할지 의심했으나, 이선이 웃으면서 의혹을 풀었다.
“일본은 지금 협상을 아주 잘 이끌어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채찍만 휘두른다면 어찌 말이 움직이겠습니까? 당근도 좀 쥐어줘야지요. 나는 본래 중당과 친분이 있었으니, 잘 설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과 일본 모두 청국과 단독 협상은 불가하다고 정해놓았지만, 개인적인 만남은 가능했다. 이홍장도 도착하자마자 이토와 단독 회동을 한 바 있었다.
4월 21일. 이홍장은 일본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숙소로 향했다.
이홍장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길에 몰려들어 있었다.
그동안 일본 프로파간다에서 이홍장은 청국 황제를 겁박하고, 조선의 독립을 침해하는 노회한 악당으로 묘사되었다. 자연히 일본인들은 이홍장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저자가 청국 대신 이홍장이로군.”
“저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거 아닌가? 정말 교활한 늙은이야.”
“이번 회담에서 단단히 쓴맛을 안겨 줘야지.”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홍장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피로감이 몰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본과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다니.’
조일 동맹은 생각 이상으로 강경한 조건을 내걸었고, 북경 조정은 결코 이런 조건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조선은 어째서 침묵만 지키고 있는 건가? 일본에 묻어가겠다는 건가? 그래도 완화군과 대화를 시도해봐야 한다. 일본이 저렇게 요동에 과도한 영토를 요구한다면, 아라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 터. 완화군은 아라사 황제와 잘 통하는 사이니…….’
이홍장은 피곤함을 느껴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누군가 경찰의 통제를 벗어나 군중의 무리에서 뛰쳐나왔다.
품에서 권총을 빼든 사내는, 이홍장이 탄 인력거 바로 앞으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