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07
– 207화에 계속 –
207화 전쟁의 끝?
조약이 체결된 후 종전을 기념해 춘범루에서 연회가 있었다.
당연히 청국 사절단은 참석을 거부했다. 이홍장은 위엄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참담한 표정으로 조약 체결의 소회를 밝혔다.
“이 조약의 서문처럼 동양 삼국 간에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길 바라지만, 귀국은 4억 중국 인민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소. 중국 인민은 오늘의 치욕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특히 청조가 성지로 여기는 영토의 할양은 평화의 항구적인 위협이 될 것이며, 새로운 전쟁의 씨앗이 될까 두렵소.”
이홍장의 말은 패배자의 단순한 푸념이 아니었다. 현실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때는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였다. 힘이 곧 정의요 진리인 시대였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뒤를 이어 중국을 분할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었다.
일본 당국자들은 자존심도 내버리고 청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 이홍장을 개인적으로 위로하긴 했지만, 그저 말뿐이었다.
이선은 이홍장에게 좀 더 실질적인 위로를 했다. 회담장을 떠나는 이홍장을 배웅하면서 잠시 밀담을 나누었다.
“조선은 병자년의 오랜 치욕을 씻고, 이제 자주독립국으로 나아갔습니다. 누대의 원한은 이로써 풀렸습니다.”
이홍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조선은 치욕을 갚았을 뿐이니, 원망하지 말라 이거요?”
“이제 우리는 대등한 대화가 가능합니다. 귀국이 옛 질서를 내던지고 조선을 동등한 관계로 존중해 준다면, 일본처럼 서양 열강의 흉내를 낼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국가의 독립과 국민의 보호를 위해 무기를 들 뿐입니다.”
“확실히 이 전쟁으로 조선이 아국에 끼친 영향이 크긴 하지.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옛 제후국이었던 조선에 참패했다는 사실은 중국인들을 오랜 미몽에서 깨어나게 할 것이오. 헛된 이름에 집착하지 말고, 조선과 일본처럼 경장과 유신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겠지.”
이홍장의 예측에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여전히 중당의 책무는 무겁습니다. 중당 말고 누가 국가의 대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미 늙고 기력이 쇠했소. 얼마나 더 살아있을지 모르겠군. 내 기반인 북양함대가 사라졌으니, 자리보전이나 할 수 있겠소?”
이홍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리 황제와 서태후, 공친왕의 동의를 얻기는 했다. 하지만 패전과 영토 할양의 굴욕에 대한 책임을 이홍장에게 쏟아질 것이었다.
‘다시 예전과 같은 권력을 가질 수는 없으리라.’
“여전히 열강과 외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중당밖에 없습니다. 지금 청국의 그 어떤 관료가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고, 열강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까?”
이선은 여전히 청국에서 대화할 상대는 이홍장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능하고 수구적인 황실이나 대책 없는 강경파들보다 훨씬 믿을 만했다.
“이 전쟁으로 일본이 급부상하긴 했지만, 앞으로 동양에서 러시아의 역할이 중요해질 겁니다.”
우울해 하던 이홍장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러시아가 일본을 압박해서 견제할 수 있다면, 그리고 완화군께서 이를 주선해 줄 수 있다면, 조선에는 원한을 갖지 않겠소.”
“노력해 보지요. 하지만 결코 내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늘까지의 동맹이었던 일본의 원한을 사는 일은 피하고 싶으니까요.”
“물론이오. 일이 성사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대화가 가능할 거요.”
“좋습니다. 아무쪼록 중당께서도 국내 정치의 풍파를 견뎌내시길 바랍니다. 내년에 러시아 황제 폐하의 대관식이 있을 터입니다. 동양의 운명에도 중요한 장소가 되겠지요. 모스크바에서 다시 뵙지요.”
이선은 예전처럼 이홍장에게 읍하지 않고, 악수를 청했다.
동양식 예법이 아닌 서양식 예법. 이홍장에게 악수는 익숙하지 않은 예법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홍장은 이선의 악수를 받았다.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상징적인 표현이었다.
춘범루에서 종전 기념 연회가 열렸다. 일본 대표단과 조선 대표단은 서로 덕담을 나누며 술잔을 부딪쳤다.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조선도 당당한 열강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귀국과 함께 싸운 덕이지요. 양국의 동맹 덕에 낡은 질서를 무너트리고, 동양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김옥균의 말을 이선이 받았다.
“일전에 김 공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본은 아시아의 영국이 되길 원하니 우리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자고. 10년 전만 해도 허풍이었지만, 이제는 용인될 수 있는 농담 아니겠습니까? 하하.”
“아시아의 영국과 프랑스라! 왜 안 되겠습니까? 하하하.”
양국 대표단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승리를 축하했지만, 속으로는 냉철함을 유지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 있는 게 국제정치였다.
일본과의 동맹은 청국과의 강화 조약이 체결되는 바로 오늘까지였다.
그동안 조선의 적은 자주독립을 가로막는 청국이었다. 그렇기에 일본과 손을 잡고 청국을 무찔렀다.
그러나 이제 청국이 조선의 독립을 침해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 가능성이 있다면, 새로운 동양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이었다.
이선은 전쟁으로 단련된 일본의 날카로운 예봉(銳鋒)을 대륙이 아닌 바다로 돌리길 원했다.
해양 패권과 상업 이익에 몰두하고 대륙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아시아의 영국’이 되기를 바랐다.
‘그게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한 길이지. 대륙에 대한 헛된 욕심은 버리길 바라네. 버릴 수 없다면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양국 대표단은 향후 동양의 질서를 어찌 재편성할지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던 중, 이선은 이토와 무쓰에게 지나가듯이 말했다.
“서양 열강은 약소국인 조선이 청국의 침입으로부터 완충지대를 확보한다는 명분은 허용할 겁니다. 하지만 일본이 요동 반도를 차지하면 동양의 지브롤터이자 보스포루스가 될 것이니, 조선과 청국의 독립과 안위를 위협한다고 여기겠지요.”
“그럼 열강이, 특히 러시아가 우리의 협상에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보십니까?”
“당연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일본 정부도 우려하던 바였다. 유럽 주재 일본 외교관들은 러시아와 독일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전보를 보내고 있었다.
“만약 그럴 기미가 보인다면, 완화군께서 러시아를 잘 설득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요동의 할양은 조선의 독립과 청국의 견제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토와 무쓰는 이선이 러시아와 특별한 관계임을 알고 있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일이긴 개뿔.’
오히려 그 반대겠지만, 이선은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알겠습니다. 만약에 그리되면 설득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 정부가 결정할 사항이니, 내가 확답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분명 내가 러시아 황제 폐하와 사적인 친분이 있다지만, 그게 국가의 대사를 결정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이해되는 말이라, 이토와 무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쪼록 러시아를 설득하는 일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른 나라는 우리가 설득해 보지요.”
상업적 이익에 주력하는 영국과 미국은 강화 조약에서 체결한 결과의 최혜국 대우를 받을 수 있음에 만족감을 표했다. 우려가 되는 나라는 역시 러시아였다.
일본 정부는 애당초 대만을 노렸고, 요동 할양을 강제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군부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여 청국을 압박한 것이었다.
그 결과 때문에 서양 열강이 개입하지 않을지 이토와 무쓰는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조약 체결 후, 조선 사절단은 귀국을 준비했다.
사절단이 일본을 떠나기 전에 만나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줄을 섰다. 일본에서는 이선과 김옥균을 ‘동양의 진보를 함께 이끄는 동지들’로 포장하고 있었으므로, 각계 인사가 회견을 요청했다.
이선은 일본어가 유창하고 일본 정계에 발이 넓은 김옥균에게 그동안 회견을 맡겨왔다.
이선은 여야를 막론하고, ‘동양 평화’나 ‘아시아 연대론’ 같은 번지르르한 말을 하는 일본 정치가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침략을 정의로 포장하는 제국주의자 놈들.’
조선을 대하는 일본의 인식이 엄청나게 좋아지긴 했지만, 은연중에 일본이 맹주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손님은 마다하지 않았다.
구 막부 해군 건설의 주역이자, 에도의 무혈개성을 이끌어 내전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신정부의 수립을 중재한 가쓰 가이슈(勝海舟)가 이선을 찾았다.
“이 늙은이의 회견 요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완화군 각하.”
68세의 가쓰는 막부의 해군봉행이자 메이지 정부의 해군대신을 역임했다. 현재는 은퇴했지만, 여전히 존경받는 원로로 백작이자 추밀원 의원이었다.
“백작의 고명한 이름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고균으로부터도 말씀을 전해 들었지요.”
“하하, 김 공이 일본 공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친분이 있었지요. 그래서 이번 회견도 김 공을 통해 사정했었습니다. 진작부터 뵙고 싶었는데 소원을 이뤘군요.”
“가쓰 백작께서는 조선에 대해 아주 우호적이십니다. 그 누구보다 조선의 개혁과 독립을 지지하고 기뻐하신 분이지요.”
김옥균의 말에 가쓰가 허허 웃었다.
“조선은 일본의 이웃 나라이자 오랜 벗이지요. 조선의 개혁과 독립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백작은 일본 해군의 건설자이니, 일본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가 더욱 기쁘시겠습니다.”
이선의 덕담에, 가쓰는 감사를 표했지만 쓴웃음을 지었다.
“기쁜 일이지요. 하지만 너무 크게 이겨서 걱정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작금의 일본인들은 승리에 너무 도취해 있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청국을 짓뭉개려고 하지요. 이는 일본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여야와 좌우를 막론하고 일본은 전쟁에 열광적으로 환호를 보냈다. 정부에 비판적이던 인사들조차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받아들였다.
가쓰는 정치인과 원로를 통틀어 유일하게 전쟁을 반대한 인물이었다.
“섬나라 일본이 나아갈 길은 해양 국가이다. 영국을 보라. 바다를 제패하여 상업의 이익을 독점하지 않는가.”
그는 청국과의 전쟁을 ‘의롭지 않은 전쟁’으로 보았다. 조선 독립과 동양 평화라는 대의를 지지한다면, 강화 조약에서 그 대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력을 써서 이웃 나라를 짓밟으려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조선 독립과 동양 평화가 전쟁의 명분이라면,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영토 할양은 최소화하고, 청국에도 관용과 화해의 악수를 내밀어 동양 삼국의 연대를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가쓰의 고언(苦言)은 승리에 도취한 일본인에게 와 닿지 않았다.
“이번 전쟁은 분명히 우리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아마 다음 전쟁도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4억 중국인이 누대의 원한을 품는다면 큰 문제입니다. 중국은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으니, 그 인민이 깨어난다면 얼마든지 권토중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선이 우려하는 점이었다. 그는 패전이 중국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걸 우려했다.
아직까지 중국인은 청조의 ‘신민’이었다. 그들에게 만주의 전쟁은 남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승전의 결과로 지나친 굴욕과 원한을 안겨주어 민족의식이 싹트고, 4억 인구의 중국이 항구적인 적이 된다는 건 두고두고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렇기에 적을 ‘중국’이 아니라 ‘청조’로 규정하여 청조의 무능과 부패를 규탄하고 현지 백성들을 우대하는 데 공을 들였다.
영토 할양도 조선의 독립 보전, 조선인의 안전을 명분으로 내걸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했다. 지나친 원한을 사는 일은 피해야 했다.
‘명분을 갖추고, 국력을 키워 내실을 다지면, 역사의 변화에 따라 영토 확장의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다.’
“일본이 중국 전체를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전쟁이 반복될 뿐입니다. 어찌 일본 정치가들은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골몰하며 먼 미래를 보지 못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가쓰의 예견은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불길하고 정확했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승리에 도취한 일본은 끊임없이 대륙진출을 노렸다. 조선, 만주, 중국 본토, 더 나아가 아시아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 결과는 비참했다. 수많은 아시아인의 시체 위에서, 끝없이 과욕을 부리던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했다.
‘그런 비참한 역사의 고리는 내가 끊어주도록 해야지.’
“백작께서 굳이 이 사람을 찾아와 그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실례했습니다. 아마 각하께서는 이 늙은이와 생각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강화 회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시더군요.”
“나도 백작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어야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됩니다. 조선의 요동 할양은 적당한 명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요동 할양은 지나치게 과도하고, 명분이 부족합니다. 열강이 개입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제가 가장 우려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일본의 국력이 충분하지 못하면서 이빨을 드러냈으니, 열강의 시선이 달라지겠지요.”
“만약 열강이 개입하여 요동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면, 일본의 반응은 어떨까요?”
가쓰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군부와 국민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정치인을 냉정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섬나라 일본이 나아갈 길은 바다에 있으니, 오히려 대륙진출의 헛된 꿈을 저버리기에 좋겠지요.”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이 보기에 가쓰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미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백작과도 같은 현인이 일본을 이끌어야 할 터인데, 아쉽습니다.”
가쓰는 허허 웃었다.
“그러기엔 너무 늙었지요. 저는 원래 막부와 함께 죽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별말씀을요. 지금 정부를 이끄는 이들은 비교적 합리적이니, 그들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책무는 다할 생각입니다. 각하께서도 부디 조선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가길 바랍니다. 향후 동양의 균형추는 조선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에 동의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이선과 가쓰는 정중히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조청일 전쟁, 혹은 1차 동아시아 전쟁은 강화 조약으로 막을 내리지 않았다.
조약문의 잉크조차 마르지 않은 시점에, 주일본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 공사는 통첩문을 들고 일본 외무성을 방문했다.